백두대간 제3구간(고남산),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유일 마을 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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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백두대간

백두대간 제3구간(고남산),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유일 마을 노치

by 정산 돌구름 2009. 11. 6.

백두대간 제3구간(고남산),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의 노치마을..

(고기리 ~ 수정봉 ~ 여원재 ~ 고남산 ~ 매요리)

 

○ 일시 : 2008. 3. 29(토) 08:10~13:30

○ 기상 : 흐린 후 비

○ 거리 : 16.3km - (전북 남원)

  고기리~2.15km~노치마을~1.5km~수정봉~2.95km~여원재~1.15km~561.8봉~3.15km~고남산~5.4km~매요리

○ 소요시간 : 5시간20분

  고기리(08:10) ~ 덕치보건진료소(08:20) ~ 백두대간 표지석(08:28) ~ 노치샘(08:31) ~ 수정봉(09:08) ~ 입망치(09:27) ~

  700봉(09:45) ~ 여원재(10:22) ~ 고남산(11:55) ~ KT중계탑(12:25) ~ 통안재(12:34) ~ 유치재(13:00) ~ 매요리(13:30)

 

○ 주요봉우리노치샘(550m), 수정봉(804.7m), 입망치(545m), 여원재(480m), 고남산(846.4m)

○ 산행팀 : 광주아침번개팀(3명)

○ 교통

  비엔날레(07:10) ~ 서광주 ~ 88도로 ~ 남원IC ~ 19번도로 ~ 60번도로 ~ 고기리(08:00)

  매요리(13:50) ~ 743도로 ~ 60번도로 ~ 19번도로 ~ 남원IC ~ 88도로 ~ 비엔날레(15:30)

○ 구간소개

  이번 구간은 「고기리 ~ 매요리」로써 전북 남원시 주천면, 이백면, 운봉읍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수정봉은 운봉과 주천, 이백의 3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봉우리로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벌판 너머에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고산자 김정호의『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극적인 구간이 있는 이곳을 더욱 알려서 조상들의 정확한 분수계 설정과 백두대간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산행후기

 대간 초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구간을 번개산행 하기로 번개산행방에 올렸지만 참여가 저조하여 3명이 신청하였다.

 6시45분 집에서 나와 비엔날레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한사람은 와 있지만 한사람이 도착하지 않아 조금 기다리다가 7시10분에 출발하였다. 날씨가 잔뜩 흐리다.

 서광주IC로 들어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구룡분소가 있는 육모정, 춘향묘를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오른다.

 

08:10, 고기리 출발

정령치로 오르는 고기 3거리를 지나 지리산웰빙텔 앞 공터에 주차하고 배낭을 챙겨 출발..

잔뜩 흐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행정구역상 남원시 주천면에 속하는 고기리는 고촌리와 내기리를 병합하여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고촌리는 마을이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며, 내기리는 깊은 산중의 안쪽에 있는 안터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내기마을은 임진왜란때 정씨와 이씨가 피난와서 정착하였고, 고촌마을은 경주이씨, 밀양박씨 등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1995.1.1 남원시, 군 통폐합으로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고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매우 높고 깊은 산중 마을이다.

해발 500~6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로 정령치에서 발원하는 원천천의 상류지역으로 물이 매우 맑고 마을 앞으로는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이 펼쳐져 있어 산수경관이 수려하다..

 

주천면 덕치리와 운봉읍 주촌리 사이 지방도 60호선운봉분지의 곡중분수계로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60번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삼거리 갈림길에 있는 덕치보건진료소 앞에서 마을 진입도로를 따라 덕치리로 직진한다.(08:20)..

 

논밭사이의 시멘트 포장의 마을 농로를 따라 노치마을로 향한다.

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九龍峙)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다..

< 노치마을 진입도로, 수정봉 능선 >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들 산줄기의 높은 곳은 갈대로 덮여있어 갈재라 하고 노치(蘆峙)라

쓴 것이다. 노치마을 좌측 회덕마을에는 전북 민속자료 제35호인 덕치리 초가가 있다.

마을 골목길을 들어서면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있고, 옆으로 정자와 개울건너에는 깨끗하게 단장한 농촌주택이 있다.(08;28)

 

대간기념석은 3개로 되어 있어 대한민국 전도와 백두대간과 14정맥,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 마을,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라고 적혀 있다. 기념촬영후 뒤돌아서 종주리본 걸린 골목으로 오른다..

 

08:31, 노치

골목길을 따라 오르면 모퉁이에 잘 다듬어진 돌로 지붕을 씌운 노치샘이 있다.

옆에는 「노치샘/해발550m/정령치6.0km/여원재6.7km」이정표가 있다..

 

담길을 따라 오르면 잘 정리된 묘지가 있고 그 주변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다섯그루가 병풍처럼 서 있으며..

 

바로 나무 밑에는 당산제전이 있다.(08:33)

산제(堂山祭)는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였다.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 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몇 년 전 자손이 없던 마을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자정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

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된다.

또 상주집을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수령 500년의 소나무는 높이 17m, 흉고둘레 2.6m, 수관폭 10m, 지하고 2.5m이다.

마을 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란히 서있으며 보는 사람마다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한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리적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 드려서 가꾸어 형성되었다..

 

스텐레스로 제작된 백두대간 등산안내도를 보고 이제부터 오르기 시작..

 

첫 봉우리에 들어서 우측 능선을 따라 다시 약간의 내리막 또 오르막 후 봉우리(08:53)..

 

도차가 별로 없는 작은 봉들을 지나고 잘 다듬어진 묘지를 지나 약간 가파르게 오르니 암봉이 수정봉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09:08, 수정봉(804.7m)

능선길을 지나 솔밭사이를 오르니 펑퍼짐한 봉우리에 표지판이 있다.

수정봉 정상엔 삼각점(운봉308/1981복구)이 있고, 성터 흔적이 있다...

 

수정봉... 남원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이백면에서는 650m의 높은 산이 운봉읍 주촌리

서는 250m의 낮은 산이 된다.

입망치를 사이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개의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성의 평면 형태는 표주박 형태를 이룬다.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봉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봉우리로 남원에 들어선 마루금은「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

오르면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벌판 너머에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다..

  

09:27, 입망치(545m)

다시 내리막.... 내리막길에 접어드니 다시 안부 능선이 이어진다.

관목사이로 뚜렷하게 좋은 길이 이어지면서 지그재그로 내려가는데 좌측 사면에는 죽은 소나무를 간벌한 소나무 숲이며,

잠시 후 헬기장을 지나 내려서면 좌우로 임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에 이르면 이정표「덕치마을샘3.3km/여원재3.4km/ 운봉읍

엄계리2.5km/이백면 과립리2.3km」가 서있는 입망치(545m)에 이른다. 입망치는 예전에 갓바래기재라고도 불리었다..

 

안부를 가로질러 오르면 전주이씨 묘를 지나 솔잎이 수북이 쌓인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585m봉에 이르는데,

간벌한 나무들 사이로 700봉이 올려다 보인다.(09:31)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통나무로 만든 계단길을 오르는데(09:35) 계단길의 경사가 제법이다...

 

오름길에 뒤돌아보면 지나온 능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09:45, 700봉

리본들이 많이 걸린 700봉에 도착한다. 리본에 700고지봉이라는 표지가 있다...

 

700m봉은 우측에 592.1봉 지능선이 분기하는 능선 분기봉으로 잠시 휴식 후 좌측으로 꺾어 내려서서 조금 지나면 좌측에

전망바위가 있고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가다가 돌계단길을 가파르게 오르면 655m봉에 이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고남산이 바라보인다.(10:00)

 

능선을 따르다가 665봉은 사면길로 우회하여..

 

 임도에 내려서고(10:07) 임도를 따라가도 되나 리본들이 걸려있는 능선길로 다시 들어선다.. 

 

임도와 능선길의 반복..

 

다시 임도에 내려서면 이정표「수정봉3.8km/여원재0.6km/주지암0.3km」가 있는 주지사 갈림길에 이른다.(10:09)

 

잠시 평탄한 산길을 따르면 10여m 시멘트 농로(10:18)와 옆에는 묘비가 커다란 묘지가 나오고 다시 도로에 가까운 길이다..

 

10:22, 여원재

마을 뒷길을 따라 가다가 내려서면 24번 국도가 이백면과 운봉읍을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는 해발 470m의 여원치이다..

 

여원재(女院峙)..

기원전 삼한시대 마한의 별궁이 있었다는 전설, 그 궁터가 남아있는 계곡, 여원치 마애여래불에 얽힌인의 정절에 대한 이야기,

호국혼의 전설을 간직한 아흔아홉 구비의 고개, 주지봉 산신단에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준다는 전설 등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손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이 고개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때 이곳 운봉현까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고개마루 주변 주막집을 들락거리던 왜구무리들은 주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에 주모는 날이 시퍼런 칼로 왜구의 손을 탄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한다.

한편,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성계는 꿈에 나타난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라고 믿고,

고갯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연으로 여원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이 여원치를 연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필시 여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렇듯이 고개 이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하다 여원치 정상 바로 못미처 한 굽이 휘돌다 우측의 옛 도로 수풀 사이에 발을 디디면 남원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 시루봉을 비해 서쪽으로 장쾌하게 펼쳐진 산군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여원재에서 바라보는 일몰, 즉 여원낙조는 운봉팔경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답다.

산인이나 문화유산답사 애호가들은 지리산 연봉을 한눈에 감상하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여원치라고 말한다.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는 운봉대장군 석물상을 지나치면 들녘끝에 지리산 산줄기에서 뻗어나온 부운치와 팔랑치, 바래봉의

장엄한 능선이 펼쳐진다. 한편 운봉읍은 목기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24번국도 주변에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여러 개의 목기공장과 전시장이 길손의 눈길을 끈다.

운봉은 목기외에도 동편제라는 소리가 자랑인 곳이기도 하다.

인월로 가는 비전마을에는 송흥록에서 송만갑, 근대 명창 박소월로 이어지는 동편제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들곤 한다.

가에는「雲城大將軍(운성대장군)」이 우뚝 서 있고 뒷면에 새겨진 글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봉의 문화유적/운봉은 신라 거문고의 명인 옥보고가 은거하면서 거문고를 전수시킨 이래 판소리 동편재 고장으로써

가왕 송홍록, 국창 송만갑, 인간문화재 박초월, 낙화의 명인 박항규 등이 터를 이룬 고장으로 많은 문화유적과 민속사료들이

산재해 있어 민속문화의 보고라 불리운다. 주요문화재로는 황산대첩비지, 서천리 당산, 운봉향교, 행정리 고분, 여원치 마애불,

동학 토벌비 등이 있고, 고성으로 고남산성, 장교리 합민성, 춘향산성, 수정산성, 노치산성, 정령치 순라도가 있다. 

명승과 고적으로 옥계동과 피바위, 면왕목장, 정령치 등이 있으며, 서천리 장승, 북천리 장승, 권포리 장승, 임리 당산 등 많은

민속자료와 황산대첩제, 운봉줄싸움, 목기와 유기 낙곡공예 은 옛부터 운봉의 특산품으로 알려져 왔다.」

여원치 인근 산정부에서는 남원의 들판과 지리산 시루봉을 비롯한 산군을 볼 수 있다.

고개마루 바로 아래는 여원치를 알리는 비석이 있으며, 6각형의 2층으로 된 여원정이란 정자도 있다..

 

길을 건너 표지판을 따라 바로 오르면 널따란 공터가 나오고 여기에서 잠시 휴식..

마을 뒤편 밭둑길을 따라 대간길은 계속된다. 밭으로 개간되어 대간길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그러나 남원시에서 세운 표지판이 많이 설치되어 크게 길을 염려는 없다.

밭 가운데에는 이정표「여원재0.2km/고남산5.2km/ 백두대간등산로 해발490m」가 서있다.(10:35)

 

이정표 「여원재0.4km/고남산5.0km/백두대간등산로 해발485m」를 지나 다시 숲속으로 접어든다.(10:39)..

 

야트막한 봉우리를 몇 개 넘나들고 상당한 경사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다시 안부로 접어들면서 잠시 리본이 보이질 않는다.

오르막을 따라 잠시 오르니 비석이 있는 묘를 지나 봉우리 하나를 옆에 두고 90도로 꺾이면서 대간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벌목한 듯한 개간지에 나무심은 흔적이 있는 지대를 지나니(10:53) 고개마루인 듯한 곳에 길이 나있다..

 

지에 가까운 봉우리 몇개를 넘으면 시야가 제법 트이며 멀리「바래봉~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경사진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잘 단장된 묘역에 1908년 졸이라고 쓰인 비석을 보니 올해가 돌아가신지 100년이 되었나 보다.(11:39)..

 

암봉을 지나(11:46) 모처럼 암벽이 나타나 로프를 잡고 오르고 다시 나무계단을 오른다.(11:50)..

 

고남산인 줄 알았는데 건너편에 고남산이 있다..

 

처음 나타나는 로프구간..

 

전망이 확 트인 작은 봉우리(11:53)..

 

바로 앞 지능선의 상투바위..

 

11:55, 고남산(846.5m)

약간의 내리막 후 다시 오르니 고남산... 철탑이 세워져 있고 철재 표지판이 있다.

5명의 산객들이 산상 예배를 보고있는 팀을 지나친다. 정상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고남산....

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 경계에 있어 운봉의 북서쪽을 지키는 산으로 운봉분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천이 흘러내리는 산동과 남원 쪽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산이다. 위치상 옛날부터 전쟁의 요충지가 되었다.

고려말인 1380년에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당도하여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개하고 산신제를 올리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남산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민들에 의하면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도 부른다.

조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를 때 이곳에 단을 쌓아 제를 올렸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성계와 관련한 지명이 전해지는데 여원치에서 고남산 초입마을은 이성계를 수행하던 무학대가 지세를 보고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까지 뻗어 내린 모습이 마치 긴 다리를 이어 놓은 것 같다하여 장교리(長橋里)라 지었다.

한, 고남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올릴 때 주둔하던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일가의 권세가 크다하여

권포리(權布里)라 칭하였다.

백두대간 주맥의 분수계로 고남산 물줄기는 동쪽으로는 운봉천과 남천을 지나 경호강을 통해서 낙동강으로 유입되지만

북서쪽의 산동면으로는 요천을 통해서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산정상의 길목에 백두대간비가 세워져 있으며, 무선중계소와 헬기장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자리를 폈다. 잔뜩이나 흐린 날씨에 바람이 분다..

 

10여분 만에 점심을 끝내고 다시 출발(12:19)..

바로 밑의 널따란 곳에 산불감시초소와 고남산 표지석이 있다..

 

바로 아래로 KT중계탑과 도로가 바라보인다..

 

고남산을 내려서면 잘 정비된 헬기장이 있고(12:22),

 

커다란 KT중계탑이 있는 철조망을 우회하면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시멘트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리본이 많은 내리막 등산로로 연결되고 바로 밑으로 다시 도로와 연결된다..

24번 국도에서 KT중계탑까지 연결된 시멘트 포장도로다. 시멘트도로는 구불구불 계속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12:34, 통안재(670m)

시멘트도로에서 급격히 구부러지는 지점에 다시 등산로가 선명히 나있다. 이곳이 통안재다.

능선길을 따라 다시 등산로가 시작된다..

 

13:00, 유치재(430m)

통안재를 지나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704봉을 앞에 두고 급격히 휘감아 돈다.(12:52)

다시 내려서면 경사가 거의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지나면 유치재가 나온다..

 

잠시 평온한 등산로가 이어지고 봉우리라 할 수 없는 등산로에 삼각점이 있다.(13:08)

 

유치재를 지나면서 거의 평지에 가깝다..

 

마을 뒤편..

 

마을 입구에 표지판「해발470m/고남산4.4km/사치재 3.2km」이 있다.(11:27)..

 

마을 길을 따라 매요보건진료소를 지나(11:29) 매요리 마을 회관에 도착한다.(11:30)

 

13:30, 매요리  

매요리는 운봉읍소재지로부터 4km지점까지 군도 8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 뒤편으로는 88올림픽도로를 통과한다.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말 마(馬)」자와「허리 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馬腰里)」라 칭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7년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惟政)]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마요리에도하였다.

사명당은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

(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고남산과 황산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날줄기가 마을을 포옹하듯 휘감고 있다.

쪽 뒷산이 구릉을 이루어 방풍 구실을 하니 풍수해가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농사에 더없이 좋은 환경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많은 리본이 매달려 있고 콘테이너에 매요 휴게실이 있다..

 

막걸리 두병으로 갈증을 채운다..

 

택시를 부르니 10분정도 후에 도착한다.

고기리까지는 10,000원이다. 차를 회수하여 광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