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1구간(지리산),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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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백두대간

백두대간 제1구간(지리산),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by 정산 돌구름 2009. 11. 5.

백두대간 제1구간(지리산), 한국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하다..

(천왕봉~장터목~토끼봉~삼도봉~노고단~성삼재)

 

 

○ 일시 : 2006. 6. 4(일) 05:20~18:30

○ 날씨 : 흐린 후 맑음

○ 거리 : 28.13km (접속 14.1km 포함 총 42.23km)

  천왕봉~1.6km~장터목산장~0.8km~연하봉~1.86km~촛대봉~0.6km~세석산장~2.0km~칠선봉~1.5km~선비샘~

  2.55km~벽소령~1.3km~형제봉~2.05km~연하천~2.94km~토끼봉~1.25km~화개재~0.75km~삼도봉~2.15km~

  임걸령~1.05km~돼지평전~2.23km~노고단~3.5km~성삼재

○ 소요시간 : 13시간10분 (대간 9시간10분 + 접속 4시간)

  성삼재(05:20)~노고단(06:00)~임걸령(06:40)~노루목(07:00)~삼도봉(07:15)~화개재(07:30)~토끼봉(07:50)~

  연하천산장(08:45)~형제봉(09:25)~벽소령산장(09:50)~선비샘(10:40)~칠선봉(11:15)~영신봉(11:55)~세석대피소

  (12:05)~촛대봉(12:20~40)~연하봉(13:30)~장터목대피소 (13:45)~제석봉(14:05)~통천문(14:20)~천왕봉(14:30)

  ※ 접속구간 : 천왕봉(14:50)~중봉(15:10)~써리봉(15:45)~치밭목산장(16:15~25)~밤밭골(18:00)~매표소(18:30)

○ 산행팀: 광주나사모산우회 (72명) - 회비 25,000원

○ 교통

  광주역(03:00)~서광주IC~호남고속도로~석곡IC~화엄사입구(04:10~04:40, 아침식사 및 준비운동)~성삼재(05:00)  

  유평(19:15)~중산리~산청온천 및 뒤풀이(19:55~21:40)~대전-통영고속도로~88고속도로~동광주IC~홈플러스(23:15)

○ 구간개요

  대간종주 첫 걸음인 지리산 천왕봉~성삼재 구간은 백두대간을 통틀어 가장 힘든 구간이다.

  대부분의 산행은 벽소령대피소에서 하루를 묵어가는 1박2일 코스나 음정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한다.

  (도상거리는 약 30km, 실거리는 50km 정도로 생각하여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등정과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최소 35km이상에 1박2일 20~25시간 이상을 걸어야한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는 아마추어들에게는 『진짜 산꾼』의 경지에 올라서는 관문 같은 코스이기도 하다.

  지리산(智異山)..

  1967년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 그 넓이가 4백84㎢, 1억4천평이 넘는 계룡산의 7배, 여의도의 52배쯤 된다.

  우리나라 단일 산으로는 최장 최대를 자랑하는 장엄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산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활처럼 굽은 25.5km 주능선은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 등 1천5백m가 넘는 봉우리만도 16개나 이어진다.

  지리산은 백두대간 남쪽 끝자락에서 훨훨 일어난 거대한 산괴로서, 서쪽은 전남 구례군에,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

  반란의 산 지리산..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을 들 수 있다.

  1948년 여순사건이후 한달 이상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은 반란군 김지회의 근거지였다.

  반란군이 물러가고 난 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이곳이 또다시 빨치산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노고단고원이 황폐해진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노고단 산장 서측은 흉물스런 별장촌 잔해가 남아있고,

  외국인 별장촌은  노고단 남쪽 왕시루봉 기슭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6.25 이후 빨치산 잔당들은 또다시 지리산으로 모여 들었고, 이는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 포격, 방화로 이어지고 만다.

  피아골산장터에서 빨치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한 트럭분 이상의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토벌작전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1952년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 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의

  숨은 골짜기에서 인골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의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양민이 국군토벌대에 의해 학살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05:20, 성삼재(해발 1,090m)

성삼재는 구례 천은사를 거쳐 뱀사골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정상엔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다.

861번지방도가 지나가고, 남서쪽은 구례 천은사 방향, 북동쪽은 뱀사골이나 정령치, 남동쪽은 노고단 정상으로 가는 도로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오르는 길은 넓은 완만한 경사로의 포장길이라 오르기에 편하다.

대간길은 휴게소 뒤편의 종석대를 거쳐야 하나 통제되어 도로를 따라 가야한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굽이쳐오르는 도로는 내 갈림길이다. 편안한 포장길을 버리고 오른쪽 숲속의 지름길로 접어든다..

< 코재에서 본 노고단 >

 

06:00, 노고단(老姑壇, 해발 1,507m)

나뭇잎 사이로 아침햇살이 내리비치는 숲길 터널을 벗어나자 노고단대피소가 나타나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파가 북적인다..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꼽힌다.

지리산 종주의 시점이며, 북쪽으로 심원계곡을 남쪽으로 화엄사 계곡과 문수계곡, 피아골계곡에 물을 보태는 크나큰 봉우리다.

노고단 산자락 끝에 천년고찰 화엄사가 자리해 한층 위엄을 갖추었다.

노고단에 마치 호텔처럼 보이는 3층 벽돌건물의 호화산장이 들어선 것은 지리산의 본격적인 관광지 개발의 서곡이자 우리나라

최초 「무장비등산」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점과 맨몸으로 노고단을 오르더라도 이 산장에 들르기만 하면 산상생활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산장의 건립이 천은사~반선의 서부 지리산 종단 관광도로 개설과 연계되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고단산장은 건평 115평의 본관 외에도 취사장 화장실 등의 부속시설과 5천여평의 방대한 야영장을 갖추고 있다.

본관에는「노고단」,「반야봉」,「종석대」라고 명명된 2백명 수용의 객실 3개와 샤워실, 매점, 직원용식당, 보일러실,

관리사무실이 들어 있다. 객실은 2층 침상으로 난방장치가 되어있는데다 침구도 제공된다..

 

대피소에서 가파르게 10여분 오르면 노고단이다. 6월 지리산의 산 밑과 위의 기온차가 심해 날씨가 뿌옇고 시야는 흐리다. 

동으로 천왕봉까지 뻗어 있을 주능선은 커녕 바로 눈앞에 버티고 솟아 있을 반야봉조차 시야가 흐리다.

다만, 노고단 정상과 KBS중계탑만이 한눈에 조망되고 있었다.

날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 노고(老姑)를 모시는 단(壇)이라 하여 노고단이라 불린다.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한번에 100명씩 사전예약신청을 받아 탐방하는 노고단 정상 오르는 길은 굳게 혀 있었다.

노고단 안부능선 끝에 정상의 돌탑과 동일한 형태의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 돌탑으로 달래고 주능선 길로 방향을 틀었다. 

드디어 종주 능선길 25.5km의 들머리에 접어들었다..

< 주능선 시작 이정표 >

 

< 노고단의 철쭉 >

 

06:40, 임걸령(林傑嶺, 1,320m)

노고단에서 돼지령을 지나 임걸령 샘터까지의 길은 평탄한 오솔길이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다.

산행이라기보다 달리듯이 하여 40여 분만에 임걸령 샘터에 도착했다..

 < 돼지령에서 본 가야할 능선과 운해 >

 

시원한 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는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3.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320m의 높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속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 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 의적이나 도적들의 은거지로 유명하며 특히 의적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샘터에서 피아골쪽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는데 이곳을 「황(黃)호랑이 막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황장사가 눈 내리는 겨울밤에 이곳에 천막을 치고 자다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6.25동란 때 빨치산들이 수없이 죽어 그 피로 골짜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이름 붙여진 피아골로 내리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07:00, 노루목

임걸령에서 반야봉을 향해 가파른 능선을 한동안 오르다보면 평지가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노루목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좌로 1km를 오르면 반야봉(般若峰). 

반야봉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 제2봉이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우리이다.

봉(1,732m)과 중봉이 절묘하게 빚어낸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답게 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많이 한다. 

또한,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내는 지리산 8경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서편으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고 한다..

< 노루목 이정표 >

 

< 삼도봉에서 본 반야봉 >

 

07:15, 삼도봉(三道峰, 1,550m)

제부터 본격적인 주능선 산행이 시작되어 천왕봉까지 수십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지루할 정도로 오르내려야 한다.

반야봉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허리를 돌아 삼도봉에 도착한다.

삼도봉 정상에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를 구분짓는 삼각뿔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전남와 전라북도, 경상남도라는 삼도의 큰 경계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경남의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개군과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 그리고 15개 면의 행정단위로 그 구역을 구분짓고 있다.

그 광활한 지리산 자락은 계곡과 산등성이를 기점으로 해 수많은 자연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역할은 경계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리산의 특성을 단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전남∙북과 경남을 구분 짓는 삼도봉이다..

 

야봉 바로 아래 해발 1,550m로 지리산의 수많은 준봉 가운데 특이할 만하게 눈에 띄는 봉우리는 아니다.

반야 그늘에 가려 아주 이름없고 별 특징을 찾을수 없지만 지리산을 삼도로 구분하는 기점이라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수 있다.

「삼도봉~불무장대~통족봉~촛대봉~섬진강」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 능선을 경계로 전남과 경남이 구분되며,

「삼도봉~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 영원령~삼정산」을 연결하는 능선을 경계로 전북과 경남이 구분된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는「삼도봉~반야봉~도계삼거리~ 만복대~다름재」구간으로 이 경우는 능선으로 경계선을 만들다 계곡을

건너 다시 능선이 경계선이 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삼도를 나누는 이곳의 지명은 그 동안 「삼도봉」이란 지명으로 불리지 못하다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에

이정표를 우면서부터「삼도봉」으로 명명됐다. 「낫날봉」,「날라리봉」,「늴리리봉」등 다양하게 불리던 봉우리가

삼도의 경계기점이라 해 「삼도봉」으로 명명되고 정착된 것이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낫날봉」으로 불렸다한다.

낫날이란 표현의 발음이 어려운 탓에 등산객 사이에선「낫날봉」이「날라리봉」또는「늴리리봉」등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 삼도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운해 >

 

삼도봉에서 화개재 내리막길에는 목재데크가 정갈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탐방객 안전과 자연보호를 위해 지난 99년 설치된 목재데크는 폭 1.5m에 길이 240m로 정확히 600계단을 이루고 있다고한다.

600계단의 나무등산로는 산행의 지루함을 없애주고 새로운 묘미를 안겨주었다..

 

07:30, 화개재(1,315m)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나무계단을 지나 10여분간 내리막을 타면「화개재」에 이른다. 

화개재는 지리산 종주 안부 중 가장 저지대이다.

능선 왼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산장과 뱀사골로 내리는 갈림길이다..

 

1978년10월8일 「반야봉산장」이란 이름으로 조립식 철제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뱀사골산장은 그후 보수 개축하여 지금은

8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149㎡ 면적의 아담한 건물이었다.(지금은 전면 폐쇄)

반야봉의 큼직한 덩치 아래에 위치, 샘물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뱀사골은 핏빛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힌다..

 

그 옛날 수로가 발달했던 시절에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온 장사치들이 이곳 화개재에 짐을 부리고,

지리산 북쪽의 상인들이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다니던 길이다.

탁 트인 조망이 시원스러운 화개재 역시 나무를 이용한 깔끔한 전망대 구역이 만들어져 있다.

앞쪽으로는 토끼봉과 멀리 명선봉이 한눈에 조망되고, 뒤로는 지나온 삼도봉이 우뚝 솟아 있다..


 

07:50, 토끼봉(1,533m)

화개재를 지나 앞에 딱 버티고 서있는 토끼봉..

토끼봉은 계속 고도를 높이며 올라야한다. 주능선 중 가장 길게 오르는 오르막이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모양이라서가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

(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남쪽 능선을 따라 20여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구상나무 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 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이제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이어지고 오른 만큼 다시 내려야하는 것이 종주능선의 특징이다..

 

08:45, 연하천산장(烟霞泉山莊, 1,440m)

가파른 경사를 오르면 차츰 경사가 완만해지다가「명선봉」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서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잘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을 따라 내리면 지리산 주능선 샘 중 수량이 가장 풍부한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명선봉(1,462m)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나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천지에 온 듯하다.

지리산 주능선상의 명선봉 바로 아래 자리한 「연하천산장」은 다른 산장들과 견주어「첩첩산중의 고도」처럼 생각된다.

이 산장만이 바로 연결되는 하산 또는 등정 루트가 없기 때문이다..

동쪽의 삼각봉이나 서쪽의 토끼봉을 거치는 등정 또는 하산 루트가 있다. 

뱀사골입구인 반선에서 연하천산장에 닿으려면 뱀사골을 따라 화개재까지 12km를 오른 뒤 다시 주능선을 따라 토끼봉,

명선봉을 지나는 8km를 더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반선에서 이 산장까지 11km의 짧은 거리로 바로 오를 수 있는 직행루트가 숨겨져 있다.

뱀사골 지류에 은밀하게 자리한 와운마을로써 뱀사골 입구의 와운교를 건너 편편한 오솔길 3km로 30분이면 닿게 된다.

운마을을 흐르는 계곡은 이 마을 동남쪽 삼각봉과 면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명선봉 지맥을 감돌아 뱀사골에 합류한다.

뱀사골과 와운지계곡 사이 능선을 따라 연하천산장에 닿는 오솔길이 곧 직행루트이다.

산장 앞 귀퉁이 고사목에는 장난감 같은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아마도 취침시간 등을 알리기 위한 종인 듯 했다.

본래 사설 위탁산장이었으나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 운영체제로 바뀌었다.

뱀사골산장이 폐쇄되면서 역할의 비중이 더 커젔다.

눈에 띄는 것은 지붕에 집광판을 설치하여 태양열 발전시스템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로써 기존 석유발전을 통해 사용하던 조명을 100% 태양광 발전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연하천대피소만의 특이한 점은 무인판매대이다. 취사장에 마련된 무인판매대는 등산인의 양심에 물품을 맡기고 있다.

최대 수용인원은 60명이며 산장 앞 샘물은 맛은 일품이다..

지리산의 병꽃...

09:25, 형제봉( 1,440m)

연하천을 떠나 숲속으로 접어들면 음정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각고지를 지난다. 

지리산 남북종주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고도를 높여 오르면 고사목 한그루가 어서오라고 환영 인사를 하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삼각봉에 오르면 조망이 트인다..

 

잠시 내려서 이정표「벽소령대피소2.4km/연하천대피소1.2km」를 지나 오르면 고사목 가지사이로 형제봉이 우뚝 솟아있다..

 

넘어야할 형제봉..

 

다시 가파르게 올라 암봉을 넘어 이정표「노고단12.6km/벽소령대피소1.5km/세석대피소7.8km/장터목대피소11.2km」가

있는 형제봉을 넘어선다..

 

형제봉 아래 이정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조망바위에 서면 벽소령대피소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뒤돌아보면 형제봉이 우뚝 솟아있다.(09:35)

 

09:50, 벽소령대피소(碧霄領待避所 1,340m)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km에 달하는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이다.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결하는 산령으로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 도로다..


 

벽소령은 그 주위에 높고 푸른 능선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벽소령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된듯 착각을 하게 한다. 산이 낮고 구름이 주위를 뒤덮고 있어 그런 느낌을 받는다.

벽소령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면 밤하늘의 둥근 달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벽소명월(碧霄明月)..

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하였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 10경 중의 하나다.

벽소령대피소는 약25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지금은 휴대전화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엔 전화가 설치되지 않아 비상시에는

무전기로 지리산국립공원동부관리소와 연락하였다하며, 시설이 깨끗하고 취사장이 있다..

 

따가운 햇볕은 계속 내리쬐고 목장길 같은 목책 사이로 나있는 널따란 길을 따른다.

이정표 「해발1,354m/벽소령대피소0.6km/천왕봉10.8km/세석대피소5.7km」를 지난다..

 

10:40, 선비샘   

절개지 공터에 이르고 좌측으로는 우거진 숲 사이로 군사도로가 나 있지만 지금은 통행이 금지되어 자취가 희미하다.

다시 숲속으로 오르면 평덕봉(1,522m)을 지나 「선비샘」에 이른다..

널따란 공간의 샘터가 지금은 서서 물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지만 예전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옛날 덕평골 아랫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에 쪼달리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박복한 사람이었다.

러다보니 배우지 못해 무식한 데다 얼굴마저 못 생기고 그 인품이 몹시 초라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으며 살아야했다.

그러나 노인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사람들에게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성스런 아들들은 훗날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 꼭 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고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앞에

무릎 꿇고 절을 하게 되어 노인은 생전에 그리고 한이 되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 속에서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후일 이 동네 사람들이 이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해 주기 위한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러나 지금은 무덤도 없고 샘도 서서 받도록 하였기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씁쓸한 전설을 생각하며 세석방향으로 향한다..

 

걸음을 재촉하여 이정표 「벽소령대피소3.6km/천왕봉 7.8km/세석대피소2.7km」가 있는 곳을 지나면 조망이 확 트이는

곳에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찾아보세요!」안내판이 있다..

 

멀리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11:15, 칠선봉(1,558M)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이정표 「칠선봉 1,558m/ 세석대피소 2.1km/천왕봉7.2km/벽소령대피소4.2km」뒤로

칠선봉이 거만스럽게 비스듬히 서있고 전면은 조망이 트인다..

 

칠선봉은 선비샘을 지나 남쪽으로 대성골과 북쪽으로 한신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위치한 봉우리로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위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일곱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능선에 구름이 스쳐 지나가면 더욱 운치가 있다..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통나무 울타리 앞에 서있다..

이정표벽소령대피소4.9km/천왕봉6.5km/세석대피소1.4km」를 지나면(11:37) 긴 나무계단길이 이어진다..

 

 

계단 전망대에서 본 반야봉...

 

계단길에서 바라본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 멀리 천왕봉 >

 

11:55, 영신봉

선을 따라 오르면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세석평전에서 촛대봉을 지나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따라 고도차 없이 가면 널따란 들판과도 같은 영신봉에 이른다.

좌측의 영신봉은 오를 수 없고 로프와 목책 옆으로는 이정표 「영신봉 1,651.9m/연하천대피소9.3km/벽소령대피소5.7km」

가 있으며, 바로 아래로는 세석대피소와 세석평전, 그리고 한가로운 촛대봉 오름길이 바라보인다..

 

「잔돌평전」이라 하는 세석(細石)은 화개 땅의 영신봉과 산청땅의 촛대봉사이의 1,600m 고지대에 있는 평야지대이다.

이곳에 있는 수 만 그루의 철쭉이 되는 5월 하순은 요염한 철쭉의 붉은 색과 등산객들의 오색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지리산은

온통 신열을 앓는다고 한다. 이곳 철쭉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철쭉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신봉은 화개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화개동천의 선경을 연출하며 주민의 젖줄이 되는 화개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미 이륙선생은 1463년 「지리산기」에서, ‘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또 영신봉은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작점이다.

벽소령이 시발점이라 알려졌으나 산이 수계를 가른다는「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의 이론에 의하면 그렇다.

천왕봉에서 흐르는 물은 어떤 경우라도 낙동강수계로 흐르고, 벽소령에서 흐르는 물도 언제나 섬진강수계로만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에 따라 섬진강으로도,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그러하니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산지를 포함하는 낙남정맥의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낙남정맥은 영신봉에서 낙동강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까지 약300km에 이르는 산줄기「영신봉~삼신봉~외삼신봉~

태봉산~실봉산~와룡산~무선봉~봉대산~양전산~백운산~천황산~대곡산~무랼산~백운산~덕산~필두봉~용암산~깃대봉~

여항산~서북산~봉화산~광려산~대산~대곡산~무학산~천주산~ 정병산~대암산~용지봉~신어산~동신어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영신봉은 지리산 불교문화의 중요한 요람이자 삼신동의 제일 끝자리에 내려다보는 맏형같은 산이다.

영신봉은 화개 제1봉으로 성산(聖山)이자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아래의 세석대피소와 세석평전위에 솟아있는 촛대봉이 눈에 든다..

 

12:05, 세석대피소

바로 앞으로 펼쳐지는 세석평전.. 세석평전은 각종 희귀한 식물들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식물원을 연상케 한다.

그 중에서도 구상나무가 가장 눈길을 끈다.

반야봉주변 구상나무 군락지가 아니라도 지리산 곳곳에 산재해 있어 지리산을 대표할 수 있는 나무가 구상나무다.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세석고원은 신라 때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이용됐으나 6.25를 전후해서는 공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땅으로 말끔한 모습의 대피소가 서있다..

 

석대피소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3억원을 투입 96년1월1일 완공, 개장한 통나무식 대피소이다.

수용인원이 300명으로 지리산내 대피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운치가 뛰어난다.

구 대피소는 취사장으로 사용하고 대피소 아래 50m지점에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다.

세석고원의 철쭉꽃이 유별나게 많고 아름다운 것은 「여진」이란 여인의 슬픈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옛날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온 호야(乎也)라는 남자와 여진여인은 대성계곡에 보금자리를 열었다.

그들은 씨족사회의 모든 간섭으로 벗어나 지리산의 대자연속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찾은 것.

이 한쌍의 남녀는 산채와 산과를 따먹으며 원앙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나 자녀가 없는 것이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느날 흑곰이 나타나 여진에게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딸을 낳게 해주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진은 너무 기뻐 남편과 상의할 틈도 없이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찾아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러나 곰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호랑이가 곰과 여진이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 지리산 신령님께 고해 바쳤다.

지리산 신령은 음양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것에 크게 노하여 곰을 토굴 속에 감금하였고, 호랑이에게 백수의 왕으로 군림

하도록 특별 배려를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마신 여진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려 평생 잔돌밭에서 혼자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그날부터 여진은 뜻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어

철쭉은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게 되었다.

여진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유별나게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애련하게 피고 진다는 것이다.

또, 여진여인은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의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는데,

촛대봉의 앉은 바위가 바로 가련한 여진의 굳어진 모습이란 전설이다. 

세석고원에선 지난 72년부터 매년 6월 첫째주 주말에 철쭉제를 열어왔다.

진주산악회가 주최해 왔던 이 산상축제는 전국 산악인들의 큰잔치로 자리를 잡았으나 철쭉밭의 훼손 등을 염려하여 88년까지

5년 동안 중단을 했다. 이 기간 중 공식행사는 중단한 채 진주산악회원들만 세석고원에 올라 산신제를 모셔 왔다.

철쭉제가 중단된 5년동안 철쭉밭이 거의 원상복구가 되어 89년6월3일 18회 철쭉제는 5년만에 부활시키고,

축제도 자연보호경진대회로 성격을 바꾸어「지리산 제모습찾기」운동을 벌였다...

 

12:20, 촛대봉(1,703m)

석산장에서 좌측으로는「한신폭포~가내소폭소~첫나들이폭포」로 이어지는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서고

우측으로는 거림이나 의신으로 내려서는데 소위「남북종주구간」은 삼신봉을 거쳐 관음봉~성제봉으로 이어진다.

세석을 지나 촛대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은 불과 0.7km이지만 매우 힘든 코스다...

 

촛대봉에 오르는 길목은 세석평전으로 때늦은 철쭉이 만개하였다. 정상이 촛대처럼 생겼다하여 이름 붙여진 촛대봉이다..

촛대봉은 설악산 대청봉보다 겨우 5미터 낮은 해발 1,703m로 리 천왕봉이 팔을 뻗치면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

촛대봉에서 보이는 세석의 묘미는 사뭇 대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 듯하다.

더욱이 6월의 촛대봉은 고산대 특유의 황량함이 감도는 곳으로 붉으스레한 철쭉꽃 봉오리들이 곧 철쭉의 향연임을 암시한다.

일명 세석골로도 구분되어져 불리는 골을 따라 시루봉~촛대봉~세석코스를 등반하는 묘미는 색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촛대봉~시루봉 구간에서 보는 천왕봉의 웅장함과 발아래 도장골의 아름다움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삼재를 출발한지 7시간이 지나서야 촛대봉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출발한다.(12:40)

 

촛대봉에서 내려다 본 세석대피소, 그 뒤로 멀리 반야봉...

 

13:30, 연하봉(煙霞峰, 1,730m)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지루한 줄 모르고 장터목으로 향하였다.

세석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철따라 향기 그윽한 꽃들이 만발하고, 기암괴석은 천년의 고색창연한 이끼를 입고 서있다.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은 꿈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탁 트인 전망, 기암괴석, 주변의 기화요초와 고사목,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천연의 조화를 이룬다..

 

연하선경(煙霞仙境)...

천왕봉 일출광경과 신비한 반야봉 낙조를 영겁의 세월동안 간직한 채 대자연의 섭리를 알 듯 말 듯 인간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연하봉은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 연하봉의 구상나무와 철쭉 >

 

 < 연하봉 이정표 >

 

 < 뒤돌아 본 연하봉 >

 

 

13:45, 장터목대피소(1,653m)

연하봉에서 800여m 내려가면 장터목산장이다.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갯마루를 장터목이라 한다.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남쪽 기슭의 사천주민과 북쪽의 마천주민이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 모여 장을 열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장터가 섰다는 것은 지리산에 기대하고 삶을 영위했던 옛사람들의 강렬한 생의 의지를 엿보게 해 준다.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에서 9km, 북쪽의 백무동에서 9km의 거리이다.

덕산이나 인월에서 등짐을 지고 올랐던 사람들에게는 그 거리가 더욱 멀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많은 등산객이 모이는 종주 능선의 마지막 산장이다..

 

왕봉 서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산장으로 항상 복잡하고, 산희샘(150m)의 수량이 적어 한참 기다려야 한다.

구 산장건물과 통로로 연결, 새 산장을 건축한 후 구 산장도 통나무로 새로이 장식하고 97년11월3일 준공했다.

세석대피소와 같이 난방이 잘되어 얇은 침낭만으로도 견딜 수 있다..

 <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이정표 >

14:05, 제석봉(1,806m)

장터목을 출발 가파른 등산로를 15분 올라서니 제석봉 고사목지대다..

 

예전에는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저지른 자연파괴 행위가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는 고사목 군락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는 중봉(1,875m) 다음가는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천왕봉은 동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 한층 유명하다.

이 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있고 바닥은 풀밭일 뿐이다.

고사목 그 자체는 재난으로 생명을 중도에 마감한 나무들의 시체여서 살벌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고사목들이 한두그루도 아니요, 10만여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경관이 되고 있다.

이곳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다..

 

고사목의 훼손금지는 물론 이곳에서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지하고,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지한다.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50년째 침묵의 증언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제석봉에서 고사목 사이로 서쪽을 바라보면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히 떠올라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 제석봉에서 본 천왕봉 >

 

14:20, 통천문(通天門, 1,814m)

제석봉을 지난 능선을 내려가다가 오르니 거대한 바위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하늘로 올라가는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등반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선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통천문」을 두어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비탈길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두 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 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개천문은 법계사를 거쳐 정상으로 향하다보면 나타나는데 원래 좌우로 두개의 바위기둥이 서있어 그 위용을 자랑했는데 한쪽은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고 한다. 하늘을 여는 문이라 하여「개천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14:30, 천왕봉(天王峰, 1,915m)..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천왕봉에 올라 우리의 땅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벅차다. 지금까지의 힘들었던 모든 것을 잊고....

아! 우리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여, 천왕봉이여 !!!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에서 발원된다는 지리산 천왕봉이여!!!

 

지리의 천왕봉은 언제 찾아도 웅장한 모습을 달리 하고 있다.

때로는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칠 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이 일찍이「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반야봉과 노고단 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마다 용솟음치듯

흐르는 물보라 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행정구역상 경남 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루는 천왕봉은 함양방면으로 칠선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내며

산청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세갈래로 헤어졌다 진양호에서 다시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의 젖줄이 된다.

운무에 휩싸인 채 말없이 억겁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천왕봉은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터전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정상에는 82년 경상남도가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전면에는 「智異山 天王峰 1915m」,

면에는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스러운 모습을 하며 인간을 자연으로 부르는 천왕봉은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들로 이루어있으면서도

큰바위 틈새에서 샘물을 빚어내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다시한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중산리로 내려서는 길을 따라 300m 가량을 가다보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이 샘물은 ‘천왕샘’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리산을 찾는 반객들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천왕봉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기라도 하듯 뭇인간들을 보내지를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天王日出」과 「夕陽落照」를 빚어내는 천왕봉은 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 이에게는 천지개벽을

연상케 하는 일출광경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함께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 천왕봉에서 바라본 중봉 >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의 주능선만 장장 8시간 30분 만에 완주한 것이다..

 

20여분을 관망하다가 다시 중봉으로 향한다.(14:50)..

 < 중산리, 대원사 갈림길 > 

15:10, 중봉(中峯, 1,875m)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과 마주하며 서있는 중봉..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원시림을 자랑하며, 지리산의 제일에 해당하는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천왕봉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봉에서 바라다보이는 반쯤 운무에 잠긴 천왕봉 또한  절경이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려 다시 하봉(下峯)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형성한다.

중봉의 철쭉평전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 내려서 써리봉으로 향하였다..

< 하봉, 써리봉 갈림길 >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시「국수봉」으로 연결돼 「구곡산」까지 계속된다.

이 능선은 이른바 「황금능선」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산세가 험난한데다 울창한 산죽들로 인해 등산로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 일반 등산객들은 잘 찾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이 능선을 분기점으로 해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있는데 바로 「중봉골」이다..

 

흔히들 이 중봉골을「지리산 최후의 비경」,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 중봉골이 일반에 덜 개방돼 비교적 자연 그대로의 계곡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실제 이 계곡에는 아직도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있으며,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이 계곡 입구에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이 걸려있다..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이정표가 있는 써리봉(1,602m)에 이른다.(15:45)

우측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황금능선을 버리고 「치밭목대피소~무제치기폭포~유평리」로 내려서는 이어지는 확실한 등산로를

따른다..

 


16:15, 치밭목대피소(1,425m)..

계속되는 내리막을 따라 치밭목에 도착한다. 곰취, 참취 등의 취나물이 밭을 이루고 있어 이곳을 「치밭목」이라고 부른다..

 

지리산 대피소중 「치밭목대피소」는 뱀사골산장, 연하천산장과 함께 개인이 운영하는 대피소였으나 연하천대피소가 지금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하므로 개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대피소이다..

 

천왕봉에서 대원사쪽으로 4km 거리에 위치하고 한산한 편이다.

수용인원은 45명이고 숙박료는 3000원, 침구사용료는 1000원으로 산장지기는 진주 산악인 마차푸차레 산악회원 민병태씨고

전화는 없다. 예약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유일한 산장이다.

100m 옆에 있는 식수터가 있고 수량이 풍부하다.  아직까지도 해발 1,425m 지점이다..

 

한참을 내려가면 새재갈림길이 나타나고 계곡을 따라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지리산에서 사람이 사는 골짜기로 제일 깊은 곳은 대원사가 있는 「대원사계곡」이다. 계곡이 넓고 깊어 수량이 많다.

경사가 완만해 가야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룬 곳으로 남원의 「달궁계곡」과 동서 쌍벽을 이루는 골짜기다.

대원사계곡 상류는 조개가 발견 되었다고 해서 「조개골」로도 불린다.

가야말기에는 구형왕이 들어와 유평 위 외곡에 나라를 세웠고, 현대사에는 빨치산의 경남도당 자리가 있던 곳이다.

잠시 내려서면 이정표「천왕봉5.1km/ 치밭목대피소1.1km/대원사6.8km/무제치기폭포0.1km」가 있는 무제치기폭포 갈림길

이르는데 100m 정도를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벽에서 흘러내리는 무제치기 폭포가 위엄있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써리봉에서 발원해 치밭목 산장 아래 해발 1000m에 위치한 무제치기폭포는 40여m의 거대한 암벽 위에 3단을 이루고 있다.

폭포수 갈래가 여럿이다 보니 물소리 또한 피아노건반을 두드리듯 앙상블을 연출한다.

옛날 우륵이 이곳에서 물소리에 맞춰 나무에 매단 실을 튕겨가며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다시 올라와 길을 따라가면 계곡을 따라 수없이 오르내림이 반복되며 금방 나타날 것 같은 유평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도를 낮추며 밭들이 나타나고 감나무 밭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밤밭골이다. 오후 6시가 되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밤밭골에서 대원사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대원사... 신라 진흥왕때(548) 연기가 창건하여 평원사라 하였다.

그 뒤 폐사되었던 것을 숙종 11년에 운권이 다시 절을 짓고 대원암이라 하였으며, 고종 17년 중건되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 때

소실된 뒤 방치되다가 1955년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비구니들이 참선하고 있는 도량으로 경남 양산 석남사, 충남 예산 견성암 등과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대웅전, 원통보전, 응향각, 산왕각, 봉상루, 천왕문, 범종각, 요사채 등 다닥다닥 붙은 대부분의 건물들은 근래

신축되어 고풍스러운 멋은 찾아볼 수 없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고 청량하다..

대웅전의 왼쪽에 있는 원통보전의 지붕 모양새가 독특하며, 원통보전 뒤쪽 축대에 만들어 놓은 장독대가 볼만하다.

이 장독대를 보면 절이 아니라 손맛 좋고 정갈한 양갓집 안주인이 살림하는 집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정갈하고 깔끔한 문화유적은 보물 제1112호로 지정된 다층석탑이다.

철분이 많은 화강암으로 붉은 기가 돌아 석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인 석탑은 군살 한점 없이 훤칠하게 뻗어올라가 대원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대원사계곡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남한 제1의 탁족처」로 손꼽은 계곡이다.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해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세차다. 게다가 폭이 넓고 너럭바위가 줄줄이 이어져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짙푸른 숲에 가려 등산로에서는 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 계곡은 30리에 걸쳐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계류가 암석을

쓰다듬듯 흘러내린다.

계곡 초입에서부터 외곡마을을 지나 새재, 밤밭골, 조개골, 신밭골로 향할수록 웅장한 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폭포가 깊은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선녀탕, 세신대, 옥녀탕, 호랑이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맹세이골은 아이들의 자연학습장이다..

 

18:30, 유평매표소

포장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유평매표소 탐방지원센터 옆으로 주차장이 있다..

 

성삼재 ~ 천왕봉의 대간능선 28.13km를 지나 천왕봉 ~ 유평매표소까지의 14.1km..

이렇게 백두대간 첫 구간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