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 캠핑여행 - 2. 함양 남계서원, 청계서원, 개평한옥마을, 용추폭포, 용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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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 캠핑여행 - 2. 함양 남계서원, 청계서원, 개평한옥마을, 용추폭포, 용추사

by 정산 돌구름 2024. 8. 15.

3박4일 캠핑여행 - 2. 함양 남계서원, 청계서원, 개평한옥마을, 용추폭포, 용추사


3박4일 전남 경남여행(8월 11일 ~ 14일  전남 광양, 경남 진주, 마산, 함양, 장주 지지계곡)

○ 1일차(8월 11일, 일) : 광주 - 전남 광양 배알도

○ 2일차(8월 12일, 월) : 배알도 - 경남 진주 문수사 - 마산 용댐계곡 - 영남캠핑카 - 함양 용추계곡

○ 3일차(8월 13일, 화) : 함양 용추계곡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개평한옥마을 - 용추폭포 - 용추사 - 용추계곡

○ 4일차(8월 14일, 수) : 함양 용추계곡 - 함양상림 - 전북 장수 지지계곡 - 담양농장 -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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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운 함양 남계서원..

폭염특보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용추계곡에서 남계서원으로 이동한다.

시들어가는 배롱나무꽃과 서원,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잠시 머무렀다가 떠난다.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동방 5현 및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인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명종 7년(1552년)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며, 명종 21년(1566)년에 ‘남계(灆溪)’를 사액으로 받았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년)에 나촌(구라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년)에 옛터에 재건하였다.

정여창 외에도 숙종 때 인물 동계(桐溪) 정온(鄭蘊), 개암(介庵) 강익(姜翼)을 추가로 제향하고 있다.

별도의 사당에는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과 송탄(松灘) 정홍서(鄭弘緖)를 모셨다.

남계서원은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창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전국에 걸쳐 서원 훼철이 진행되었지만 함양 남계서원은 존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4년2월16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5월26일 사적 제49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등이다.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남계서원은 앞쪽 낮은 곳에는 강학 공간을 두어 강습을 하도록 하였고, 뒤쪽의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 공간을 이루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전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사당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되는 위패]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누문(樓門)인 풍영루를 들어서면 강학 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이 위치하고 있다.

명성당은 1559년에 완성된 정면 4칸 규모의 건물로 명성당의 앞쪽 양옆으로는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동재)와 보인재(서재)가 있다.

양정재와 보인재의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어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 이름하였다.

이 누마루 아래 누문 쪽으로 연당(蓮塘)[연못]이 하나씩 꾸며져 있다.

이밖에 전사청, 고직사, 정여창·정온·강익을 칭송하는 송덕비인 묘정비가 있는 묘정비각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8월 13일, 노송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함양 청계서원..

함양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연산군 때의 학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기리기 위하여 1921년에 건립되었다.

청계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1495년에 김일손이 청계정사(淸溪精舍)를 건립하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김일손은 성균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을 쓴 학자이다. 하지만 「조의제문(弔義帝文)」 수록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희생되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면서 청계정사도 폐사되었다.

1906년에 유림들이 상의하여 청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청계정사 중건은 1917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준공되고, 이름을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청계서원은 남계서원과 인접하고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의 입지는 높은 곳에 제향 영역, 낮은 곳에 강학 공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전형을 보이고 있다.

서원 건물 중앙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다.

강당 뒤쪽의 높은 지대 위에는 사당인 청계사(靑溪祠)를 중심으로 맞은편에 내삼문이 배치되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求敬齋)와 서재인 역가재(亦可齋)가 있다.

경내에는 탁영김선생유허비와 연당(蓮塘)[연꽃을 심은 못, 곧 연못]이 있다.

 

8월 13일, 전통한옥과 능소화의 어울림, 500년 역사의 함양 개평한옥마을에서~

푹푹 찌는듯한 무더운 날씨였지만 능소화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잠시 개평마을길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떠난다. 

함양 개평(介坪)마을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자 5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정여창 생가인 일두고택을 필두로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정씨 고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개평(介坪)이라는 지명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이 위치해 ‘낄 개(介)’ 자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유래되었다.

또한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개들’이라고도 불린다.

14세기 경주(慶州) 김(金)씨와 하동(河東) 정(鄭)씨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5세기에 풍천(豊川) 노(盧)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거주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약 60여 채의 전통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함양은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으로 불림만큼 안동과 더불어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개평마을은 영남의 대표 사림이라 불리는 성리학자 정여창(鄭汝昌)의 고향이다.

정여창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으나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고택들이 남아 있다.

중용민속자료 제186호인 일두고택(一蠹古宅)은 1570년 정여창의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 되었다.

‘정여창 고택’, 또는 문화재 지정 당시 등록된 이름인 ‘정병옥 가옥’으로도 불린다.

전형적인 경상도 양반집의 형태로 현재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풍천노씨의 시조 노숙동이 1820년대에 지은 풍천노씨 대종가(豊川盧氏大宗家 문화재자료 제343호)는 조선후기 건축양식과 기법을 볼 수 있다.

함양 오담고택(咸陽梧潭古宅 문화재자료 제407호)과 1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양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河東鄭氏古家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남아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마을 특산물인 500년 전통의 지리산 솔송주는 봄에 나는 소나무 순과 찹쌀, 솔잎을 이용하여 만든다.

진한 솔향기가 특징인 솔송주는 정여창(鄭汝昌)의 종가에서 술, 엿, 식혜를 빚어 방문객에게 접대했던 가양주로, 당시 성종에게 진상한 전통 명주라 전해진다.

정여창 문중의 자손들이 솔송주 주조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8월 13일,함양 용추계곡 용추폭포와 용추사..

연일 계속되는 무더운 날씨에 용추계곡에 자리를 잡고 용추폭포와 용추사를 둘러본다.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황석산 등 고산으로 둘러싸인 용추계곡의 용추폭포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명승 제85호로 전국의 수많은 용추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함양팔경 중 하나로 과거 안의현에서 빼어난 절경으로 꼽은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심진동에 있다.

안의삼동은 심진동, 원학동, 화림동으로, 이곳 주변은 삼림이 울창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며, 떨어지는 함양 심진동 용추폭포와 그 아래 용소가 어우러져 명승을 이룬다.

강수량이 많은 장마철과 여름철에는 웅장한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함양 용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소지왕 8년(487년)에 각연(覺然)대사가 장수사를 창건하였고, 고려 말 무학(無學)이 중수한 뒤 은거하여 수행하였다.

숙종 6년(1680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계곡의 아래쪽으로 절터를 이전하였다.

그 뒤 숙종 7년(1681년)에 운흡(雲洽)과 전 주지 수오(秀悟) 등이 합심하여 절을 아래쪽으로 이전하였고, 1684년에는 문찬(文贊)이 법당을 지었다.

다음해에는 문감(文鑑)이 소상(塑像)을 이룩하고 사주 이영생(李英生)이 시왕상(十王像)을 조각하였다.

또, 1686년에는 김상운(金尙雲)이 누각을 지었고, 다음해 지찰(智察)이 팔상전과 팔상탱화를 조성하였으며, 천왕문과 요사채를 이룩하였다.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의 10여 곳의 암자 가운데 한 곳으로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전한다.

1721년(경종 원년) 봄에는 지찰(智察) 등이 세운 팔상전을 용추사의 옛터로 옮기고, 1725년(영조 원년)에는 서언(瑞彦)이 용추암을 만들었다.

1734년(영조 10년)에는 실화로 인하여 대웅전과 소상(小像), 서상실(西上室)·향각(香閣) 등이 타버렸다.

호경(護敬)을 중심으로 두인(斗仁)·영우(靈祐)·삼준(三俊)·광연(廣衍) 등이 합심하여 같은 해에 불탄 전각을 모두 중건하였다.

또, 『법화경』 등 100여 권을 찍어 두개의 목함 속에 잘 장식하여 보관하였다.

용추암을 포함한 장수사는 일제강점기까지 일정한 사세를 유지하다가 6·25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때문에 1953년경에는 안의면 당본리의 봉황대에 잠시 별원을 건립하여 활동하였다.

얼마 후인 1959년에 최욱성 등이 이무기 전설이 전하여 오는 용추폭포 위쪽에 중창 불사를 진행하였다.

산내암자로는 동쪽에 도솔암, 서쪽에 백련암이 있고, 북쪽으로는 용추암·서흥암·원적암·견성암·영악암·보제암·천진암·무주암 등의 유허지가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1972년2월12일)로 지정된 용추사 일주문은 숙종 28년(1702년) 호남(湖南) 사혜(社慧)가 세웠다고 전한다.

현판에는 ‘덕유산장수사조계문(德裕山長水寺曹溪門)’이라 새겨져 있다.

건물의 간격은 4.1m,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으로 정면에 공간포(空間包) 5구, 측면에 3구가 놓여 있고 정면과 측면의 공포 간격은 같다.

살미첨차의 끝은 가늘고 긴 앙서형으로 밑으로 내려온 경사는 완만하며 끝부분은 45도로 잘려 있다.

첨차는 공안(工眼)이 없고 끝부분은 수직으로 잘렸으며 아랫부분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원형에 가깝고, 내부 살미첨차는 운공형(雲工形)으로 연봉장식을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장연(長椽)이 짧고 부연이 길다. 추녀도 사래에 비하여 짧으며 끝부분에는 복련화문이 새겨져 있다.

기둥은 높이 3m, 지름 120㎝ 정도로 매우 굵고 배흘림이 강하하며, 본 기둥에 버팀기둥을 앞뒤로 세워서 창방(昌枋)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포를 높이 짜올렸다.

자연석으로 된 덤벙주초에 결구 형태가 견실하고 치목수법과 장식성이 뛰어나 일주문으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큰 규모를 갖추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80호(2002년10월24일 )로 지정된 용추사 명부전 지장시왕상은 복장기를 통해 1694년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모두 13구의 불상이 있는데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상이, 그 좌우로 시왕상이 5구씩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민머리에 석장을 들고 있는 도명존자가 서있고, 오른쪽에는 머리에 관을 쓰고 문관의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무독귀왕이 있다.

양옆으로는 죽은 사람의 죄업을 심판하는 10명의 왕이 머리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다.

중앙의 지장보살상은 높이가 1.6m로 결가부좌 하고 넓은 어깨에 비해 무릎은 좁으며, 목이 매우 짧고 얼굴은 앞으로 내밀고 앉아 있다.

네모난 얼굴에 이마가 좁고, 눈은 양옆으로 가늘고 길게 표현되어 있으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전체적으로 근엄한 모습이다.

민머리에 귀는 얼굴에 붙어 어깨까지 내려오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얕게 표현되어 있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는데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편삼을 입고 편삼 위에 오른쪽 어깨에만 걸친 편단우견의 대의를 걸쳤으며, 가슴 앞에는 꽃잎 모양으로 주름을 잡은 군의가 있다.

군의 아래로 U자형으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으며, 양 무릎 사이에 부채꼴 모양으로 표현된 군의 자락이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의 왼쪽에 있는 도명존자는 민머리에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왼손에는 동그란 봉이 달린 석장을 들고 있다.

가늘고 길게 표현된 눈에 작은 입술, 굳게 다문 표정에서 지장보살과 함께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지며, 대각선으로 가사(袈裟)와 장삼을 걸치고 있다.

오른쪽에는 용머리로 장식된 화려한 관을 쓰고 있는 무독귀왕이 있다.

화려한 원유관(遠遊冠)에는 용머리로 장식된 금비녀가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있는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으나 옷자락에 덮여 손은 보이지 않는다.

가슴 부위에서부터 장식된 수(綬)가 발목까지 내려온다.

지장삼존의 좌우로는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이 등받이와 팔걸이, 족대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보고있다.

지장보살의 왼쪽으로는 제1대왕(진광대왕), 제3대왕(송제대왕), 제5대왕(염라대왕), 제7대왕(태산대왕), 제9대왕(도시대왕)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제2대왕(초강대왕), 제4대왕(오관대왕), 제6대왕(변성대왕), 제8대왕(평등대왕), 제10대왕(오도전륜대왕)이 있다.

무독귀왕처럼 관복 형태의 포를 걸치고 있으며, 머리에는 원유관을 쓴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전제적으로 근엄한 표정이나 원유관의 장식을 꽃·동물·원추형으로 하는 등 세부적인 차이가 있고, 제3·7대왕은 웃고 있다.

손에 든 장식을 달리 하기도 하는데 제1·2·5대왕은 손에 홀(笏)을 들고 있고, 제3·6대왕은 경서(經書)를 들고 있다.

제8대왕은 수염을 만지고, 제4대왕은 코끼리를 밟고 있으며, 제7·8대왕은 왼쪽 다리를 내린 채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있고, 제9·10대왕은 한쪽 발을 살짝 들고 있다.

이밖에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79호(2002년10월24일)로 지정된 건륭18년 천룡도, 경남도 문화재자료 326호(2002년10월24일)로 지정된 무학대사 진영, 용추사 각연대사 진영, 청허대사 진영, 송운대사 진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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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물소리까지 시원한 용추계곡에 머물다~

무더운 날씨지만 그래도 계곡은 시원하다.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황석산 등 고산으로 둘러싸인 용추계곡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리기도 한다.

용추계곡 입구에는 돈암 정지영(鄭芝榮)의 후손들이 1806년 세운 심원정(尋源亭)이 있는데, 심진동이라 불리던 용추계곡을 제대로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원한 계곡 물속에 몸을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다.

계곡욕을 하고 삼겹살에 소맥 한잔,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어둠이 내리니 물소리만 들려올 뿐 고요함이 감돈다.
여행 3일차, 오늘밤도 시원한 용추계곡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