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발칸 - 3.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오토차츠, 보스니아 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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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동유럽

동유럽 발칸 - 3.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오토차츠, 보스니아 네움

by 정산 돌구름 2023. 9. 8.

동유럽 발칸 - 3.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오토차츠, 보스니아 네움 


○ 동유럽 발칸 5개국 13일 여행(2023년 8월 24일 ~ 9월 5일) 

 - 5일차(8월 28일, 월) : 오토차츠 - 두브로브니크(플라차대로, 스르지산전망대, 성벽투어) - 보스니아 네움 Hotel  Adria Neum

 - 6일차(8월 29일, 화) : 네움 - 스플리트(리바거리, 구시가지) - 자다르(성 도나트 성당, 바다 오르간) - 오토차츠  Hotel Zvonimir

지상 최대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크로아티아(Croatia)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남부에 면한 달마티아 해안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7세기에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인 라구사(Ragusa) 공화국으로 시작하였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가 1991년 독립을 선포한 크로아티아에 속하게 되었다.

아열대습윤기후와 지중해성기후가 함께 나타나 연평균 기온은 16.4℃도이고, 1월 평균기온은 섭씨 10도, 8월 평균기온은 섭씨 25.8도로 온난하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되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경쟁한 아드리아 해안 유일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다.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1205~1358)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고 지협의 각 측에 2개의 항구가 세워졌다.

15∼16세기에 무역의 전성기를 맞았고 엄격한 사회 계급 체계를 유지하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 제도를 폐지(1416)하는 등 높은 의식을 보여주었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945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와 도시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다.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크로아티아 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달마티아 문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도시이다.

요새를 비롯하여 역사와 전통을 지닌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세계적인 관광도시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시의 큰 성당들 가운데 하나인 성 블라이세 성당(Church of St. Blaise)은 14세기에 건축되었다가 화재와 지진 등을 겪고 18세기에 지금의 바로크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두브로브니크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인 여름축제는 45일간 계속되는 문화행사로 공연과 콘서트, 놀이 등 다양한 행사로 구성되어 도시 전체가 함께 즐기는 오래된 전통이다.

2023년 8월 28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 
오토차츠에서 7시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르로아트아 남쪽 끝 두브로브니크로 향한다.

중간 휴게소에서 간단히 맥주 한잔에 카푸치노와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한댜.

고속도로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14시30분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하여 새로운 일정을 시작한다.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가는 길목의 풍경도 아름답다.

아일랜드 출신 문학가 버나드 쇼는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했고, 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1위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 바로 두브로브니크이다.
너무도 완벽히 보존된 중세의 모습 덕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전망대 미니밴 투어..

두브로브니크 성에서 미니밴을 타고 구불구불 스르지산전망대에 오른다.

스르지(Srđ)산은 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와 오랜지빛 마을,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뷰 포인트이다.

스르지산은 올라가는 방법은 케이블카, 버스, 차량 투어가 있다.

버스와 차량투어 버스는 스르지산을 올라갈 수 있는 최저가의 방법으로 필레 게이트에서 버스를 타면 스르지산 중턱의 마음 보산카까지 올라간다.

단돈 12쿠나면 스르지산 중턱까지 갈 수 있다.

차량투어는 스르지산을 한 바퀴 돌면서 중간중간 사진 스팟에 들려 스르지산을 보는 것인데 스르지산을 이쁘게 보고 싶다면 이 방법을 추천한다.

두브로브니크의 전경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3분이면 정상에 도착한다.

나폴레옹이 점령할 때 이곳에 요새를 만들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시 사용했다.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군도 이 요새를 이용했다.

현재는 전쟁 박물관으로 1991년 당시 있었던 내전의 재현 모습을 볼 수 있다.

케이블카 승강장 왼쪽으로 내려가면 큰 십자가가 있는데 91년도 당시 내전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 두브로브니크 성벽투어..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벽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요새에 속한다.
10세기에 건설되어 13~14세기까지 증축, 보완하여 현재 모습의 기초를 이루었다. 
도시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성벽의 총길이는 1,949m 이며 최고 높이 6m, 두께 1.5~3m로 성벽이 워낙 견고해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왔다.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와 중세시대 성벽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고의 관광지이며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산책길이다.
성벽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이 세운 웅장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14세기에 건설된 이 수도원은 당시 두브르니크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667년 대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어 그때의 화려함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포레스코 장식으로 꾸며진 천정이 아름답다.

1360년에 세원진 120개의 기둥이 있는 로마식 회랑이 있는데 두브르니크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의 중앙에는 성 프란시스의 조각상이 있는 분수가 있다.

유럽에서 세 번째 오래된 말라브라차 약국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짝반짝 하얀 대리석이 깔린 플라차 대로(Stradun)는 필레게이트부터 루자광장까지 약 280m로 두브로브니크의 메인 거리이다.

원래 물이 흐르는 바다의 공간이었으나 1667년 대지진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공간 안에 돌을 넣어 지금의 거리로 만들었다.

스트라둔 거리를 중심으로 양옆의 골목과 건물이 비슷하다.

당시 대지진 이후 빠른 복구가 요구되어 주변과 비슷한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두브로브니크 수호성인의 유물이 보관된 두브로브니크 대성당(Dubrovnik Cathedral)은 원래 12세기에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667년 대지진에 의해 파괴되자 1672년부터 1713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인 안드레아 불파리니와 파올로 안드레오티가 로마-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가운데 돔 모양의 지붕이 높이 솟아올라 있어 아름답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St. Blaise)의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성당 외부는 고급스러운 회색으로 되어 있고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내부는 밝고 바람이 잘 통하게 디자인했으며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장식으로 치장했고 벽화로 마감하였다.

주 제단은 금색의 플립티크 디자인으로 되어 있으며 티탄(Titan)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졌고 옆 보조제단은 보라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우아한 아케이드가 특징인 스폰자궁(Sponza Palace)은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의 스트라둔(Stradun) 거리 끝에 있다.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Ragusa Republic)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당시 드브로브니크에 지배적이었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čević)가 건설을 맡았다.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아한 아케이드, 기다란 고딕양식의 창문 등이 특징이다.

중앙홀은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 국립조폐국이 들어섰으며 그밖에도 은행·귀중품창고·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장식은 안드리지치(Andrijić) 형제가 담당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며 1667년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말에 라구사공화국 중앙문화센터로 바뀌었고, 현재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며 중앙홀은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두브로브니크의 랜드마크 시계탑은 스폰자궁전 옆에 나란히 서있는 35m 높이의 종탑으로 1444년에 세워졌다.

원형시계 아래로 네모난 두 개의 전자시계가 있는데 왼쪽에는 로마숫자로 표시된 시와 오른쪽에는 아라비아숫자의 분이 표시되어 있다.

스폰자궁전과 사이에 있는 문을 지나면 플라자거리가 이어진다.

렉터궁전(Rector’s Palace)은 크네쥐브궁전(Knez dvor)으로도 불리며, 중세시대 최고통치자의 집무실이었던 곳이다.

13세기 건설된 요새가 14세기 궁전으로 개축되었다가 화재로 파괴된 후 15세기 전반 후기 고딕양식이 가미된 르네상스양식으로 건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5세기 후반 화약고 폭발과 17세기 후반 지진으로 크게 손상된 옛 건물을 바로크양식을 가미해 재건한 것이다.

보스니아 유일의 해양도시네움(Neum)에 머물다.

두브르브니크 관광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숙소가 있는 인근 보스니아 네움으로 이동한다.

네움은 보스니아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세찬 빗줄기 속에 국경에서 입국 수속을 하고 국경을 넘어선다.

Hotel  Adria Neum은 4성급의 호텔인지라 시설은 물론 전망도 좋은 편이다.

밤이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 호텔식으로 식사를 하고 인근을 둘러본다.

아래로 아드리아해가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

날씨도 어제 세찬 빗줄기와는 달리 맑고 화창한 날씨이다. 

네움(Neum)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남부에 있는 도시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칸톤에 속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아드리아해 해안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이다.

네움은 비탈진 산, 해변, 많은 관광호텔이 있는 작은 도시이다.

내륙에는 풍부한 고고학적 유적이 있고 수백 년 된 올리브 숲이 우거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있다.

네움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북서쪽으로 60km 떨어져 있고 모스타르에서는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으며 철도역이 있는 크로아티아의 플로체와 메트코비치에서는 30km 떨어져 있다.

네움이 위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해안은 크로아티아의 남쪽 끝을 본토로부터의 고립영토로 만든다.

이는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의 결과이다.

네움에는 크로아티아와의 국경에 북서쪽의 클레크와 남동쪽의 자톤돌리 등 두 개의 국경검문소가 있다.

2023년 8월 29일,  아드리아해 연안 최대의 로만유적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Emperor Diocletian’s Palace)과 구시가지..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도시인 스플리트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라티우스가 만들어 황제의 도시라 불리기도한다.

스플리트 한복판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Emperor Diocletian’s Palace)은아드리아해 연안 최대의 로만유적이다.

이 궁전은 아드리아해 남쪽해안에 지어진 가장 귀중한 로마 건축의 예로서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9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성벽 안팎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신 유행의 부티크, 갤러리, 레스토랑, 바 등이 궁전의 오래된 아케이드 안에서 매일 장사를 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속주 달마티아의 군인이었으며, 후기 로마에서 가장 효율적인 통치를 펼쳤던 황제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59세 때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이후, 그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 살로나(현재의 솔린)에서 약 8㎞ 떨어진 아드리아의 햇살 가득한 땅에 300년경 은퇴 후 노년을 보내기 위해 궁전을 지었다.

그리스의 대리석과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가져다가 꾸밀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궁전은 동서남북 200m 남짓의 아담한 규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는 궁전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다.

3ha 넓이의 부지에 걸쳐 세워진 요새처럼 튼튼한 궁전은 반은 저택, 반은 군사 진영으로 높이 7m의 성벽을 둘러싸고 열여섯 채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동쪽과 서쪽 관문 사이에 놓인 길이 내부를 군사 구역과 황제 거주 구역으로 나누었다.

황제가 거주하던 구역에는 기념비적인 웅장한 안뜰, 팔각형의 능묘, 세 개의 사원이 있었으며 바다를 곧바로 바라보고 있는 남쪽 파사드와 인접하여 아케이드를 이룬 아파트먼트들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7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양배추를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

궁전은 6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으며 유라시아의 아바르족이 침입해 왔을 때도 그 공격을 버텨냈다.

살로나 시가 겪은 운명은 이보다 불운했다.

614년경 습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후 도시 거주민들은 궁전의 안전한 성벽 안으로 피난해 와서 정착했고 이때 스팔라토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도시가 현대의 스플리트가 되었다.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자들 아래에서 여러 대에 이어 내부를 개조하고 다시 지었으며(인구가 불어나면서 성벽 밖에도 건물을 짓게 되었다.) 오늘날의 궁전은 한눈에 보아도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로마적인 성벽 안에 뒤섞여 들어 있는 모습이다.

시가지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대성당, 종탑, 황제의 거처, 열주의 광장, 스핑크스, 주피터 신전 등이 있다.
바로 앞은 둥근기둥들이 늘어선 가로 35m, 세로 13m의 열주의 광장이며,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약 60m의 종탑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로마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뛰어나고 위엄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거주했던 구시가지는 궁전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다.
신하와 하인들이 거주하던 궁전 안 200여 개 집터는 그 잔재가 남아 상점,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신하와 하인들이 거주하던 궁전 안 200여 개 집터는 그 잔재가 남아 상점,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황제가 행사를 열었던 안뜰은 석회암 기둥이 가지런하게 도열된 채 여행자들의 쉼터와 이정표가 됐다.

동문은 재래시장과 연결되고 남문은 바다, 서문은 쇼핑가와 이어진지도, 북문을 나서면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다.

궁이 지어질 때만 해도 남쪽 문과 담벼락이 바다와 접한 요새 같은 형국이었지만 성벽 밖을 메운 뒤 바닷가 산책로가 조성됐다.

좁고 구불구불한 구시가를 조망하려면 황제의 묘였던 성 도미니우스(돔니우스) 대성당에 오른다.

숨 가쁜 계단 꼭대기에 서면 구시가의 붉은 지붕과 아드리아해의 탁 트인 푸른 바다가 나란히 늘어선다.

궁전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도 이곳에서는 구식 슬라이드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형성된 스플리트 라바(Riva)거리~

보스니아 네움에서 국경을 넘어 2시간 30분을 달려 다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 도착한다.

스플리트 라바거리, 구시가지,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을 둘러보고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스플리트를 떠난다.

스플리트 올드타운으로 향하면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형성된 라바거리는 바다 앞에 탁 트인 길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낸다.

라바 거리에서 라바는 이탈리아어로 뚝을 가리킨다.

라바는 바닷물이 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뚝이다.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휴양지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리바거리는 엽서와 관광사진에 등장하는 스플리트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길 한편에는 야자수가 줄지어 서있고, 다른 편에는 하얀 건물과 바닥, 야외 테라스가 어우러진 거리이다.

곳곳에 벤치가 있어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풍경을 즐기거나 거리 한쪽 끝에 있는 SPLIT 알파벳 조형물 앞에서 여행 인증샷을 날릴 수도 있다.

다른 한쪽 끝에는 시계탑이 자리잡고 있으며, 밤이 되면 아름답게 빛나는 분수를 볼 수 있다.

일자로 길게 뻗은 길가에 다양한 음식점과 노천카페들이 있어 해질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휴식을 즐길수 있다.

2월에 열리는 카니발과 5월 성 도미니우스 축제 등 시기별로 열리는 다양한 행사가 리바거리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로컬밴드의 신나는 공연부터 화려한 불꽃놀이 같은 다양한 이벤트를 아침부터 밤까지 즐길 수 있다.

눈부신 아드리아해를 품은 항구도시 스플리트(SPLIT)는 크로아티아 제2의 항구도시이자 달마티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달마티아 지역의 행정적, 경제적 중심지로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며, 관광지이자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아열대습윤기후와 지중해성 기후가 같이 나타나 여름은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난하고 습하다.

이곳은 305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하여 건설된 곳으로 그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건설한 궁전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시로 변모하였다.

예로부터 통상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였고, 목재·대리석의 교역지이기도 했다.

그후 많은 세력의 쟁탈지가 되었으나 1945년 이래 크로아티아에 속하게 되었다.

무역과 관광 산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어업과 올리브 재배, 와인 생산, 제지, 콘크리트 및 화학약품 생산 등 전통적인 산업도 지속되고 있다.

크로아티아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스플리트는 기후가 온난하고 역사적 건조물이 많아 관광도시로서 붐빈다.

관광의 중심은 1979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유적으로 로마시대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유명하다.

그밖에 로마시대의 대성당, 베네치아 고딕 스타일의 공회당, 고고학 박물관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크로아티아 해양박물관, 민속박물관 등이 있고,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박물관과 같은 이색적인 박물관도 만나볼 수 있다.

포구에는 한가롭게 배가 드나들고 헝가리에서 출발한 열차의 종착역이 되는 아득한 곳이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산책로에는 야자수들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밤이면 노천 바에 이방인들이 흥청대는 낭만의 항구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화, 언어가 다른 민족과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90년대 5년 동안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전쟁과 그 상흔은 도시에 자욱하게 쌓여 있다.

바다오르간이 있는 자다르 아드리아해안 ~

스플리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2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다오르간이 있는 자다르 해안에 도착한다.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바다오르간을 본다.

생각과는 달리 다만 해안 쉼터 계단에 있는 수멍에 불과하다.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북부의 항구도시 자다르(Zadar)는 로마제국 시대부터 문헌에 나오는 오래된 도시이다.

중세에는 슬라브의 상업·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달마티아의 주도(主都)로 사적이 많고 고고학박물관도 있다.

1920∼1940년은 이탈리아 영토였고,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어업·마라스키노술[酒] 양조업업 외에 담배, 주트, 유류 등의 산업이 성하다.

시가지는 이탈리아풍, 13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9세기의 특이한 원형교회가 있으며, 관광객이 많다.

자다르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파도가 들려주는 음악 바다오르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파도가 연주하는 악기다.
총 75m의 산책로에 바다쪽으로 작은 구멍을 만들어 계단식으로 설계했다.
35개 파이프관을 파도가 드나드는 순간 공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로 연주가 이뤄진다.
파도 소리가 파이프관을 따라 내는 소리가 마치 오르간과 같다 하여 바다오르간이라고 한다.

자다르 올드타운의 상징, 성 도나트 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푸른 아드리아해를 볼 수 있는 곳, 자다르는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해변 휴양도시이다.
성 도나트 성당, 고고학 박물관, 마리수도원, 나로드니 광장, 구시가의 시청사, 시계탑, 바다 오르간 등 크로아티아 여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때 세워진 자다르는 포룸과 바실리카, 신전, 극장, 시장 등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로마 시가지이다.

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기독교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4세기에는 포룸이 있던 자리에 주교의 궁전이 세워졌다.

9세기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다른 도시와 도서(島嶼)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달마티아'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다르를 비롯,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등의 해안 도시들이 서로마 교회의 관할 아래 남았다는 점이었다.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이념적 단층선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이 지방 건축가들이 보인 반응은 말 그대로 혁신이었다.

크로아티아 해안의 9세기 교회 건물들은 대부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들은 그 평면 설계나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다.

이들 사이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볼트와 앱스, 그리고 돔 등을 벽과 이어 붙여 인공적인 지지부나 이음매를 찾아볼 수 없이 하나로 이어진 표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 도나트 성당(Crkva Sv. Donata, Church of St. Donat)은 이러한 교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로툰다는 지름이 23m, 높이가 20m에 이르며, 세 개의 둥글린 앱스와 아치를 올린 출입구를 로마 양식의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

이 기둥들은 아케이드를 이룬 앰뷸러토리의 일부로, 1층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2층은 벽돌로 만든 벽이 지지하고 있으며, 원래의 돔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목제 지붕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성 도나트 성당은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6세기 건축물 성 비탈레 성당과도 유사하다.

아치는 역시 9세기에 세워진 아헨 대성당의 팔라티노 예배당을 연상시킨다.

자다르의 올드타운의 상징 성 도나트 성당은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지역에서 보기 드문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로 최초 11세기에 지어지고 15세기 증축, 19세기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당 내부에는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2개의 기둥이 있는데 실제 로마시대의 기둥이다.

이 성당은 자다르의 주교 도나트의 이름을 딴 성당으로 원래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성당을 발견한 사람들이 주교의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 주교의 이름을 따 도나트 성당이라 명했다.

성당이나 미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내부의 공간 속 울림이 좋아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오토차츠의 아침 풍경..

어제 빗길을 2시간 가량 달려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오토차츠 숙소 Hotel Zvonimir에 도착한다.

인구 5,000여명의 작은 도시에 있는 Hotel Zvonimir는 엘리베이터가 없지만 여종업원들이 커다란 케리어를 들어올려주는 친절함이 있는 호텔이다.

7시에 호텔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역시 호텔식으로 식사를 하고 인근 오토차츠 교회가 있는 시가지를 둘러본다.
오토차츠(Otocac)는 크로아티아 서부에 있는 도시로 리카지역의 북서쪽 가츠카강 유역의 벨레비트와 말라카펠라 사이에 위치한 카르스트평원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오토차츠는 초기 크로아티아의 교구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1100년 무렵의 유명한 바슈카평판의 글에 따르면 오토차츠의 성니콜라스교회는 크르크섬의 성루치예교회와 같은 교단에 속했다.

1300년부터 오토차츠는 프랑코판 가문의 영지에 속했으며, 지기스문드 프랑코판이 오토차츠에 교구를 세웠다.

방어를 위한 탑이 있었던 정착지는 가츠카강의 굽은 지점에 있었고 성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더 안전한 방어를 위한 르네상스식 성이 1619년에 지어졌으며, 1829년에 성이 허물어진 뒤에 일부만이 보존되었다.

1684년에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성삼위일체교구교회는 둥근 성소가 있는 큰 건물이었다.

종탑이 정문에서 올라가고 후기 바로크와 고전주의 가구를 들인 이 교회는 7개의 제단, 한 개의 설교단, 18세기의 세례반이 있다.

1746년부터 오토차츠에 크로아티아군사전선의 연대본부가 주둔하면서 단순하고 조화로운 2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1918년까지 오토차츠는 1867년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타협 후에 헝가리왕국의 크로아티라슬라보니아왕국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군주국에 속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오토차츠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리카크르바바주에 속했다.

동서 방향의 크랄리야즈보니미르거리가 시내의 대로이다.

이 거리에 서쪽으로부터 오토차츠시청, 오토차츠고등학교, 정교회인 성게오르기야위대한순교자교회, 크로아티아참전용사기념공원, 가츠카크로아티아기념공원, 성삼위일체가톨릭교회, 가츠카박물관 등이 있다.

옛 오토차츠성의 자취는 가츠카강 북쪽 나지막한 언덕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