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사찰, 광려산 광산사(匡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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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사찰, 광려산 광산사(匡山寺)..

by 정산 돌구름 2023. 6. 16.

고즈넉한 사찰, 광려산 광산사(匡山寺)..


2023년 6월 16일, 광려산 산행길에 찾은 광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5년(665년) 원효와 중국 승려 은신이 함께 창건했다고 하지만 근거를 알 수 없으며 이후의 연혁 또한 알려지지 않는다.

1481년(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사찰이 존재한다고 언급되고 있어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지만 그 후의 자세한 연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연혁은 현재 광산사에 남아 있는 현판과 상량문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1852년(철종 3년) 승려 율암치흡(栗庵致洽)이 찬술한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48년(헌종 14년) 박계준(朴啓駿)이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52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소조불상(塑造佛像)을 봉안하였으며, 이때 극락전을 상법당(上法堂), 대웅전을 대법당(大法堂)이라 칭했다’고 한다.

1872년(고종 9년) 율암치흡이 찬한 「광산사 중건기」에는 ‘1869년 승려 용호(龍湖)를 중심으로 모연(募捐)을 시작하여 이듬해 극락전을 중창하고 아울러 삼존상(三尊像)을 봉안했다’고 한다.

1887년(고종 24년) 승려 법전(法典)이 찬한 「극락전 창건문」에는 ‘1870년(고종 7년)을 전후하여 사찰이 매우 쇠락해졌는데 창건문을 짓던 그해 봄 승려 대성(大成)이 모연하여 극락전을 짓고 단청을 했다’고 한다.
한편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대웅전을 중건하는데 상량문을 구한말의 애국지사인 장지연(張志淵)이 찬술했다.

그 「광산사 중수 상량문」에 의하면 1742년(영조 18년) 승려 빙연(氷演)에 의해, 그리고 1805년(순조 5년) 승려 승흡(勝洽)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으로 인해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

1960년대에 승려 대순이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명맥이 이어지다가, 1982년에 승려 영우가 선원과 요사를 신축하였다.

1999년에 승려 공우(空宇)에 의해 현재의 극락전이 건립된 후 점차 전각을 보완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특히 광려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아 다진 평평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광산사는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선원과 요사가 마주보고 있다. 선원의 한쪽에는 3층 석탑이 있다.

현재 극락전 좌우에는 독성각과 산신각이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 입구에는 대문의 역할을 하는 해탈문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 삼존상(阿彌陀三尊像)이 봉안되어 있다.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좌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시고 있다.

삼존상의 본존인 아미타 불상과 좌협시의 관세음보살상은 현대에 새롭게 만든 것이고,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상이 2006년4월6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 보살상의 전체 높이는 약 136.8㎝인데 등이 완만하게 굽은 자세로 고개는 앞을 향해 약간 숙인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수인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으로 오른손은 가슴 위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서 하나의 연꽃봉오리 가지를 들고 있으며 첫째 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네모지며 이마가 좁고 눈은 옆으로 길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법의는 변형 통견이며 대의 속에 편삼을 입고 있으며 뒷면에도 대의와 편삼의 표현이 뚜렷하다.

전체적으로 이 보살상은 신체의 비례가 잘 맞고 자세가 안정감을 주어, 조선 후기 보살상의 조각 양식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져 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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