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기행] 천년의 미소,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와 연기암(緣起庵)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구례기행] 천년의 미소,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와 연기암(緣起庵)

by 정산 돌구름 2021. 11. 3.

 

천년의 미소, 구례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와 연기암(緣起庵)


2021년 11월 2일, 노고단 산행길에 둘러본 화엄사와 연기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는 사적 제505호(2009년12월21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한다.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또,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연기조사께서 창건 후, 백제 법왕(599년)때 3천여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경덕왕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헌강왕(875년)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태조 26년(943년)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다.

문종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년)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다.

세종 6년(1426년)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다.

임진왜란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르렀다.

인조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였다.

숙종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

연기암(緣起庵)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989년 종원대선사가 연기암을 중창하였다.

2008년 만해스님이 높이 13m의 국내 최대의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였다.

연기조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그 맨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곳 연기암이었다.

그 후 화엄사를 창건하고 다시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로서 문수보살께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우신 분이다.

그리하여 멀리 타국으로 건너와 당시 크게 번영했던 국제도시 경주의 황룡사에서 경을 설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비몽사몽간에 한 모자를 만났는데 후덕해 보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온 귀여운 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본디 스님께서 제 앞에서 세운 願은 널리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십니까?"

연기스님이 놀라 다시 바라보니 두 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연기스님은 새 인연처를 찾게 되었는데 문득 지리산에 들게 되었다.

여기저기 아름다운 산천의 경계에 취해 앉아 있는데 멀리 바라보이는 지리산 봉우리들이 문득 한 부인의 모습처럼 보이는게 아닌가..

다시 잘 살펴보니 예전 비몽사몽간에 만났던 바로 그 모자 가운데 부인의 모습이었다.

연기는 그때서야 문득 느끼기를 '그래 이곳이 본디 성모산이라 하니 그 부인의 형상은 바로 이곳 지리산을 말함이었구나...'

결국 스님은 어머니를 모셔와 그 부인의 형상을 본 산등성이에 소암자를 짓고 처음으로 지리산에 자리잡았으니 바로 연기암이었다.

그 후 연기스님은 직접 친견했던 지리산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널리 화엄일승지도를 폈으니 그 아래 삼천제자가 있어 또한 가르침을 이어나감에 지리산은 화엄의 꽃이 활짝 편 연화장세계가 되었다.

이 암자를 복원할 때 쌍조문의 암막새와 연꽃문양의 숫막새 기타 청자편, 백자편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에서 특히 쌍오문(雙鳥紋)의 암막새는 남원 만복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유사하여 그 연대추정에 참고가 된다.

또 청자편과 백자편의 문양으로 보아 그 연대를 통일신라말 이상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니 대부분의 화엄사 소속암자들의 창건이 조선 후기인 18∼19세기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기암의 창건은 화엄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그 연대가 통일신라말 이전으로까지 올라가게 되는바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