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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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by 정산 돌구름 2021. 11. 16.

사적 제150,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2021년 11월 14일,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와 석탑~

미륵사지는 마한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는 금마면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백제 최대의 사찰지이다.

백제 무왕 2년(601년)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도 유명하다.

17세기경에 폐사된 뒤 서탑 및 당간지주 등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사역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한 것을 최근 들어 복원하였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얼마전에 개장한 국립익산박물관도 볼거리가 많다.

주말을 맞아 몰려든 인파속에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떠난다.

미륵사(彌勒寺)는 익산시 금마면에 있었던 백제 무왕 당시 창건한 사찰로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절로는 최대의 규모이다.

백제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하였을 때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였다.

2013년부터 시작된 보수정비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절에는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입각하여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化公主)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성덕왕 18년(719년) 9월 금마군의 미륵사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는 미륵사의 탑에 벼락이 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태종 7년(1407년)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資福寺刹)을 정할 때 충북 청주의 보경사(菩慶寺), 전북 임실의 진구사(珍丘寺) 등의 여러 사찰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이 때까지는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가 있으며,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2년 절터 주변에 흩어진 옛 석재들을 일부 재사용하여 동탑(東塔)을 복원하였다.

국보 제11호(1962년12월20일)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지의 3원(三院)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거의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에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 족집게 1점,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40년)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탑은 동북쪽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탑신은 동북측으로 6층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가구식 기단이다.

하층기단의 지대석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갑석을 놓았다. 동면 좌우측 갑석 모서리에는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2구의 신장이 배치되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높은데 여러 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로 갑석을 덮은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을 수매의 돌로 짜 맞추어 마치 목조건축의 결구를 연상시킨다.

초층 탑신은 초석을 놓고 민흘림이 뚜렷한 기둥으로 각 면 3칸을 나누었는데, 목조건축과 같이 그 내부를 벽체처럼 구성하였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고막이석과 하인방을 놓았고 기둥과 기둥 상부에는 창방(昌防)과 평방(平枋)을 두었다.

초층 탑신 중앙에는 사방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었는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기둥으로 심주를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도 구조에 있어 1층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처마는 비교적 얇은 편이며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모서리에는 상하로 원공이 있어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로는 3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5층부터는 4단으로 늘어난다.

옥개석의 상단에는 1층과 2층은 1단, 3층부터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의 ‘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益山彌勒寺址幢竿支柱)는 보물 제236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운 상태로 고정하기 좌우로 세운 지주이다.

당이란 사원의 마당이나 문 앞에 꽃는 기당(旗幢)의 하나로 기도나 법회 등 사원의 공식적 행사가 개최될 때 당간 꼭대기에 당을 매달았다.

통일신라 직후에 등장하여 여러 종류의 당간지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국 사찰에서 가람 구성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1기가 아닌 2기의 당간지주가 동서 방향으로 세워져, 서쪽 당간지주는 서원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부터 64m 남쪽에 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의 높이는 각각 3.95m이며 2기의 간격은 89m로 지주의 안쪽 면에는 장식이 없다.

당간지주의 앞쪽과 뒤쪽 그리고 바깥쪽 일부분에는 폭 약 12㎝의 윤곽 띠를 표현하였으며,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깎았다.

또 외면 중앙부에는 5㎝ 폭의 돌기 띠 1조를 양각하였고, 지주 정상부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내려가며 원호를 그여 원호 가운데에는 1단의 굴곡이 있다.

서쪽 당간지주는 편평한 사각형의 돌로 지대석을 깔고 위에 기단을 설치한 구조로 기단부는 2매의 장대석으로 조립하였다.

면석부에는 앞뒷면에 각 세 곳, 옆면에 각 두 곳의 안상을 장식하였는데 통일신라의 전형적 조각 기법이며, 기단 위에는 받침을 마련하여 양쪽의 지주와 당간을 받쳤다.

간대의 크기는 가로 46.5㎝, 세로 68㎝, 높이는 21.8㎝로 앞면과 뒷면을 3단으로 구분하고 마치 연꽃잎을 표현하려는 듯 세로 방향으로 다섯 번의 굴곡을 주었다.

간대의 윗면 중앙부에는 원좌(圓座) 대신 지름 18㎝의 원공(圓孔)을 파서 당간을 끼울 수 있도록 하였고, 지주석 아랫부분에서 83㎝, 143㎝ 높이에는 깊이 11㎝인 구멍이 파여 있다.

동쪽 당간지주의 지대석과 기단부 일부는 파괴되었고, 기단 남쪽 지하에서 팔각(八角)의 간주석편이 2점이 출토되었다.

국립박물관에도 이미 수습한 팔각 간주석 조각 6점이 소장되어 있다. 간주석 조각을 원래 형태로 복원하면 기둥의 높이는 약 11m 이상이 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남북국 시대에 추가로 건설된 사역 남쪽 남회랑지 안에 서탑과 동탑의 남북 축선에 맞추어 당간지주 2기가 있다.

서탑 및 동탑과의 거리는 약 65m이다. 미륵사지 가람으로 진입하는 중원 중문의 앞쪽을 중심축으로 삼았을 때 동서 대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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