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두륜산 대흥사 북미륵암과 진불암..
2021년 11월 21일, 해남 두륜산 산행에서 만난 북미륵암과 진불암..
북미륵암(北彌勒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부속 암자이다.
미륵암은 대흥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두 곳에 있으며, 편의상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암자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전혀 전하지 않지만 북미륵암은 영조 30년(1754년)에 영탁(永鐸)이 중수하였으며 이곳에서 유일(有一), 행인(幸仁), 혜장(惠藏)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북암은 용화전, 요사 등의 건물과 2기의 3층석탑으로 이루어졌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년 4월 중수하였으며, 1995년 4월 중수한 요사채는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ㄴ자형의 건물이다.
1995년 북암 요사채 해체 복원 공사를 하였고, 2005년 대흥사 북미륵암 용화당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용화전 뒤쪽 절반은 햇빛이 들어오는 보호각 형태로 고쳤다.
13세기에 진정국사 천책이 북암에 주석하고 천책의 발우가 18세기 후반까지 북암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의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북암은 1754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연담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북암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현재 국보 제308호로 지정된 대흥사 북 미륵암 마애여래좌상과 보물 제301호로 지정된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이 있다.
이 삼층석탑에서 건너다보이는 봉우리에 같은 형식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인 북미륵암동삼층석탑이 있는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서있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에서는 1970년에 3구의 금동불상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이 불상들은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북 미륵암과 대칭을 이루며 남미륵암이 두륜봉 아래에 있는데, 이곳에도 전실(前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는 선각(線刻)의 미륵불이 조각되어 있다.
북미륵이 양각임에 대하여 남미륵이 음각이라는 점에서 남북 음양 두 미륵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즉,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하였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제석천(帝釋天)의 화신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인데 음각과 양각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한다.
제석천이 두 미륵을 조성할 때 해가 빨리 넘어가므로 천동천녀(天童天女)가 해를 가지 못하게 매었다하여 만일암(挽日庵)이라는 암자가 생겼다고도 전한다.
남미륵암에는 현재 토굴(土窟)이 있어 수행하는 승려가 거주하며, 최근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납석(蠟石 곱돌)으로 만든 여래좌상 1기가 발견되어 봉안되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대흥사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 전기 불상으로 1963년1월21일 보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9월28일 국보 제308호로 승격되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북미륵암 용화전의 주존불로서 고려 초기 조성 당시 역사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 초기인 10~11세기에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 동삼층석탑을 함께 조성하였다.
마애여래좌상은 암자의 위쪽 자연 암벽을 최대한 활용하여 마애여래좌상[암벽 높이 8m, 좌상 높이 4.2m]을 조각하였다.
만일암 방향을 바라보는 남향으로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하며 이마 경계선 주변에 나발이 표현되었고, 나발 바로 위에 중앙계주공, 이마에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마련되었다.
움푹 팬 눈알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날이 선 콧등, 꽉 다문 입술 주변 주위로 이마부터 눈두덩을 거쳐 볼과 턱 아래의 살집에 이르기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하며 원만상에 근엄한 인상을 풍기며,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고, 귓바퀴의 골까지 자세히 묘사하였다.
목은 굵고 짧은 탓에 턱 아래에서 가슴까지 세가닥의 삼도를 표현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며 오른발을 왼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이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였으며, 어깨에는 양어깨를 다 덮은 두꺼운 통견의(通肩衣)를 걸쳤다.
옷 주름은 굵은 띠 주름의 평행단상밀집무늬이며 양팔과 다리 등에 표현되었고, 이때의 굵은 띠 주름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 계단식의 옷 주름 무늬가 퇴화한 듯하다.
평판적으로 처리된 가슴에도 주름이 잡힌 승각기[내의(內衣)]가 보이고, 옷 주름은 거의 같은 간격으로 선세김하였다.
오른팔과 옆구리부터 오른쪽 발바닥 아래까지의 표현 방식이 다른 부분보다 어색하고 정교하지 못하다.
왼쪽 어깨의 띠 매듭에는 가사를 묶는 띠가 달려 있으며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팔꿈치에 닿아 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으로 아무런 꾸밈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를 표현하였고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하단의 비천상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한쪽 다리를 꿇은 자세이고 얼굴은 본존의 상호를 쳐다본다.
한손은 무릎 위에 얹고 다른 한손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으며 연화좌에 앉아 있다.
상체는 고려시대 보살상에 크게 유행하였던 착의법인 천의 자락을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돌려 가슴 앞에서 묶어 내리는 보살 옷을 입었다.
하체는 상의(裳衣)[치마]를 입었다. 등 뒤로 휘날리는 천의 자락으로 보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을 표현한 것이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피어나는 연꽃]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고 생기 있게 피어오른 모습이다.
2005년 마애여래좌상의 앞 용화당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전각은 1554년 처음 설치되어 1777년까지 여섯번의 중수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목조전실 성격인 용화전 내의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과 같은 축대를 사
보물 제301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북미륵암 삼층석탑은 높이 4m로 고려 초기인 10~11세기경 조성된 3층 석조 불탑이다.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지만 각 부분의 양식은 매우 간략화되었다.
아래층 받침돌은 바닥돌 위에 4장의 긴 돌을 놓아 구성하였는데 각 면의 아래 부분과 면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덮개돌은 여러 장의 두꺼운 널돌로 덮었는데 가운데 부분에 둥글고 각진 굄을 두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마다 1장의 널돌을 돌렸으며, 겉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겼다.
덮개돌은 1장의 돌로 되었으며, 밑면에 부연(副椽)을 표현한 것은 여느 석탑과 같다.
윗면의 경사는 아래층 받침돌에서는 거의 무시되었지만 윗층 받침돌에는 약하게 나타났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1단의 탑신 굄이 있다.
1층 몸돌은 4장의 널돌을 놓아 변화를 주었지만, 그 윗층의 몸돌은 모두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인데 받침의 수는 윗층으로 갈수록 적어져 4단, 4단, 3단으로 변화를 주었고, 추녀 밑은 직선으로 얇은 편이고, 4곳의 전각(轉角)에는 약간의 반전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여 낙수면은 거의 직선에 가깝게 처리되었다가 내림마루인 우동(隅棟) 부분에서 느리게 반전을 나타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앙화(仰花) 모습의 돌만 있을 뿐, 나머지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세부 양식과 석재의 결구가 시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신라 석탑 양식을 착실히 따르고 있어 조성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대흥사의 산내암자인 진불암(眞佛庵)은 창건 시기 미상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인조 8년(1630년)에 수월극현(水月克玄) 대사와 덕호(德浩)가 중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 시기는 1630년보다 더 위로 올라간다.
숙종 19년(1693년)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하였고, 1709년 진불암 대종이 윤종백에 의해 주조된다.
영조 26년(1750년)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이 중수하였고, 1857년에도 중수하였다.
1866년 지장시왕도가 기연(錡衍), 승한(勝閒), 행운(幸云), 묘영(妙永) 등이 화사로 참여하여 제작되었다.
지장시왕도 화기의 본암질에 시오(始悟) 등 15명의 승려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도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영곡(靈谷), 영파(影波), 만화(萬化), 운담(雲潭), 아암(兒庵) 등의 13대 강사 등이 진불암에서 화엄강학을 열었고, 1972년 중수하였다.
응진당, 향적당,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응진당 앞에는 향적당과 요사채 1동이 배치되어 있고, 요사채 뒤로는 공양간이 건립되어 있다.
응진당 내부에는 불좌상 1구와 28구의 소조나한상(塑造羅漢像), 2구의 소조사자상(塑造使者像)이 모셔져 있다.
뒷벽에는 1964년에 조성된 삼세후불도와 칠성도, 독성도가 봉안되었고, 1972년 조성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 외에도 화기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여래도 1점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 불화는 낭월 고재석(1924~2005,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탱화장)이 그렸다.
그리고 1987년에 봉안된 범종과, 1972년의 진불암 중수 불사 당시의 시주자 이름이 적힌 현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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