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유적과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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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유적과 오층석탑

by 정산 돌구름 2021. 11. 16.

사적 제408, 익산 왕궁리유적과 오층석탑..


2021년 11월 14일,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유적과 오층석탑~

익산 미륵사지와 함께 최대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히는 왕궁리유적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오층석탑은 본래 목탑이었던 것이 현재의 석탑으로 바뀌었다.

익산 문화재 야행에 포함되어 수많은 유등들이 설치되어 있고 역시 주말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붐빈다.

밤이 아름답겠지만 왕궁리유적을 끝으로 익산을 떠나 군산으로 이동한다.

익산 왕궁리유적(王宮里 遺蹟)은 백제 후기 궁궐의 구조와 기능, 축조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용화산 남측 끝자락의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삼국사기』, 『관세음응험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전라도읍지』, 『금마지』 등에 마한 또는 백제 무왕, 보덕국 안승 또는 후백제 견훤의 왕궁이 있었다는 각기 다른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1989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후기 무왕(재위 600∼641) 때 조성된 궁성의 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정기간 궁으로 사용되다 백제 말~신라 초에 그 터에 탑, 부처를 모신 공간인 금당, 강당으로 구성된 사찰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을 둘러쌌던 직사각형 담장은 동서 약 230m, 남북 약 495m로 총 길이 1,454m에 달한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담장으로 잔존 부분의 최고 높이 1.2m, 폭 3m 내외이다.

내부 공간은 동서 방향으로 뻗은 축대를 쌓아 구획하였는데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된 구조이다.

전반부에 대형건물, 후반부에 후원·공방·대형 화장실 등이, 전반부와 후반부 경계에 정원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찰 유적은 전반부에서 발견되었다.

대형건물터는 정면 7칸(31m), 측면 4칸(15m) 크기로 왕이 정사를 보거나 의례·연회를 행할 때 사용한 정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후원은 유적 내 북동쪽 구릉에 있었다.

복잡하고 정교한 수리체계를 갖춘 후원으로 길이 485m, 폭 2.7~7.2m의 대형수로와 길고 짧은 6개의 곡수로, 4개의 집수시설을 갖추어 물의 저장·공급, 수량조절, 배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원은 조경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사각연못 형태로, 후원의 수리시설과 연결되어 있으며 후원 영역으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도 하였다.

대형 화장실 3곳 중 하나는 길이 10.8m, 폭 1.7m, 깊이 3.4m 크기였다.

공방은 궁에서 사용한 도구 등을 만들던 곳으로, 공방터에서는 금·동·유리 제품과 도가니·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수십 개의 건물터와 부엌터, 가마터, 배수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사찰터에는 국보 제1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으며, 금당터와 강당터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왕의 거처와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수부(首府)’라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수막새, 토기, 자기, 인장기와, 유리·금·철 제품, 등잔 등 약 1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관사(大官寺)와 유사한 사찰명인 대관궁사(大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관궁사(官宮寺) 등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도 출토되었다.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 7월 송산리고분군, 부소산성,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 공주·부여·익산 지역 7개 문화유산과 함께 ‘백제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1963년1월21일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1월1일 국보 제28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1965년부터 1966년에 보수를 위한 해체와 복원을 실시하였고 이때 흙 속에 묻혀 있던 돌로 만든 기단부가 발견되었다.

1층 옥개석 상면과 기단부 심초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를 수습하였다.

창건에 대한 문헌 기록이 없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건립 연대는 백제 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 시대 초까지 논란이 다양하다.

1989년부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본격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백제시대에 경영되었던 궁성이 폐기되자 궁성 터에 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한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사찰을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본래 목탑이었던 것이 현재의 석탑으로 바뀌었고 백제 멸망 이후에도 법등을 계속 이어 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산시 읍지 『금마지()』(1756)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 압승하기 위하여 궁터 앞에 10장 높이의 왕궁탑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지』(1656) 고적조에는 “옛 궁터에 오층석탑이 있는데 왕금탑()이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호남읍지』(1871)의 지도에는 간략한 그림도 그려 놓았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익산 왕궁리 유적 전반부의 동서석축1과 동서석축2 사이에 있다.

높이 8.5m이고 단층 기단부, 오층 탑신부, 그리고 노반()·복발()·앙화()와 부서진 보륜()이 남아 있는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네 귀퉁이에 팔각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심초석()[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가 되는 돌]을 두었으며 빈 공간은 흙과 잡석으로 메웠다.

얇은 옥개석과 추녀 끝의 반전이 경미하여 처마가 평평하게 보이는 백제계 석탑이다.

추녀 끝에는 풍경()을 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