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대종사의 생가, 산청 겁외사(劫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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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대종사의 생가, 산청 겁외사(劫外寺)

by 정산 돌구름 2020. 12. 2.

성철 대종사의 생가, 산청 겁외사(劫外寺)


2020년 11월 27일, 경남여행 둘째날,. 남사예담촌에서 바로 옆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겁외사에 이른다.

겁외사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성철스님 생가터에 세운 사찰로  2001년 3월 30일 창건 회향법회를 열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이자 20여년간 성철스님을 시봉했던 원택스님이 창건하였으며, 2008년부터 주지를 맡고 있다.

전국에 있는 15곳의 성철스님 문도사찰(門徒寺刹) 중 한 곳으로 정기법회는 달마다 음력 3일 오전에 열린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 밖의 절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성철스님에 의해 지어졌다.

스님은 만년의 몇 해 동안 겨울철이면 백련암을 떠나 부산의 거처에 주석하였고, 그곳을 겁외사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그로부터 사명(寺名)을 딴 것이다.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기둥 18개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누각이 있다. 누각 정면에는 지리산겁외사(智異山劫外寺)라는 현판이, 뒷면에는 벽해루(碧海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 즐겨 얘기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라는 문구로부터 지은 것이라 한다. 누각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중앙에 성철스님의 입상을 비롯하여 커다란 염주·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동상 왼편에 자리 잡고 있다.

내부 불단에 비로자나부처를 모셨고,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려낸 성철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외벽 벽화에는 스님의 출가·수행·설법·다비식 장면 등을 묘사하였다. 대웅전 외의 건물로는 종무소·선방·요사 등이 있다.

성철스님 동상 뒤편으로 2000년 10월 복원한 스님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 이영주라는 속명으로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곳으로, 모든 건물은 새로 건립된 것이다. 혜근문(惠根門)이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선친의 호를 따서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이름붙인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齊), 왼쪽에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 있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할 때의 방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가사·장삼·고무신·지팡이·친필자료·안경·필기구 등 스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성철(性徹)스님은 1912년4월5일(음 2월19일)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다.

본관은 합천(陜川), 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로 아버지는 상언(尙彦)이며, 어머니는 진주(晉州) 강씨(姜氏)이다.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행하는 등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하였으며 돈오사상(頓悟思想)과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설파하였다.

성철은 열 살 무렵부터 유서(儒書)를 읽고 각종 경서를 독파하였다. 1930년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소년기에 이르자 동서양의 철학·문학·논리학 저서를 탐독하였다. 1935년경 영가(永嘉)의 「신심명증도가(信心銘證道歌)」를 읽고 지리산의 대원사(大願寺)에 가서 거사로서 수행하다가 출가하였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혜일(慧日)을 은사로 모시고 수계·득도한 뒤, 10년간 금강산의 마하연사, 수덕사의 정혜선원, 천성산의 내원사, 통도사의 백련암 등에서 안거를 지냈다. 1940년 29세 되던 해에 동화사 금당에서 동안거 중 견성하고, 1941년부터 1963년까지 송광사, 파계사 성전암, 봉암사, 묘관음사, 문수암 천제굴 등에서 수십 회 안거를 지냈다.

1965년 문경 김룡사(金龍寺) 하안거 때는 첫 대중법문으로 『육조단경』, 『금강경』, 「증도가」 및 중도이론을 설법하였다. 1966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가 주석하였고, 1967년에는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다.

방장 취임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하였는데, 이것은 불교의 중심 사상인 중도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1981년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추대식에 참여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하였다.

성철은 평소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권하였다. 성철 자신도 청빈하게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고 작은 암자에서 살았다.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병고를 앓다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참선과 묵상으로 이어진 스님의 삶은 해방 이후 왜색으로 물들었던 불교와 사찰의 모습을 선풍운동으로 바로잡았고, 조계종의 종정으로 돈오점수 사상을 내세워 불교계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불교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었던 개혁가였고 사상가였으며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한국사회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다.

수없이 손질하여 누더기를 보는 듯한 승복 두루마기나 이면지를 모아 만든 메모장은 스님의 검소한 생활을 느끼게 하고 속명인 ‘이영주’라는 이름으로 묶인 젊은 날의 도서목록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였던 한 인간의 뜨거운 젊은 시절을 상상하게 한다.

겁외사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관광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