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 100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주 부석사..
2019년 7월 28일(일), 7박8일 캠핑여행 7일차는 이른 아침 평창 육백마지기에서 영월로 향한다.
영월 10경 선돌을 보고 영주로 이동하여 먼저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에 이른다.
세찬 빗줄기가 오락가락한 날씨이다.
한국관광 100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주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국보 제18호(1962년12월20일)인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당나라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에 대하여 설법,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또, 고려 정종 때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년)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년)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다.
1746년(영조 22년)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浮石寺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
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
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
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5호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 일부가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한다.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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