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17호 우암 송시열 유적, 만동묘와 화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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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17호 우암 송시열 유적, 만동묘와 화양서원..

by 정산 돌구름 2019. 6. 26.

사적 제417호 우암 송시열 유적, 만동묘와 화양서원..


 

2019620(금), 충북으로 떠난 캠핑여행, 화양구곡에서 찾은 우암 송시열 우적...

화양구곡 주차장에서 화양구곡을 따라 오르면 제2곡을 지나 3곡인 읍궁암과 마주하고 있다.

 

* 사적 제417호, 우암 송시열 유적..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8길 19에 위치한 사적 제417호인 우암 송시열유적은 화양동계곡 안에 있는 화양서원터와 만동묘터를

중심으로 암서재, 읍궁암, 애각서적, 묘소와 신도비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로 구성되었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근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유지가 잘 남아있다.

이 외에도 화양동에는 충효절의 비례부통 등 많은 애각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시열의 북벌 애국사상과 민족자존정신이 깃든

유적의 성격과 조선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왜곡된 사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충북기념물 25호, 만동묘(萬東廟)..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자 이 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에게 이곳에 묘우()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 20결()을 주었다.
1809년(순조 9년)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년)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 등은 서울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년)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95년(숙종 21년)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이곳의 서원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데다가,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비례부동()’ 4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

)’이라 각자()하여 존명대의()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건립 당시부터 첩설()이라는 소론()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한 적이 있고, 사액을 받을 때도 예조에서 첩설서원이라

하여 방계()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허용되었다.

사액은 1696년 대사성 이여()가 경연에 입시한 틈을 타서 사액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다.

숙종 말년 노론 집권시기에는 국가에서 유례없이 20결()의 토지와 많은 노비를 지급받았으나 반면 경종 때 소론집권하에서는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하여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가서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

()가 때로는 관령()을 능가할 정도였고, 이를 거부하는 수령에게는 통문()을 보내어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또 춘추 향사 때의 유생 공궤( 음식을 드리는 것)를 빙자하여 복주호()와 복주촌()을 운영, 양민을 피역()

시키면서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백성은 사형()을 가하는 등의 민폐를 심하게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폐습이 노론정권이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지자, 1858년(철종 9년) 영의정 김좌근()의 주청에 의하여

복주촌은 영구히 폐지되었고, 지방관에 대한 징구()도 심한 통제를 받았다.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한 서원·사우()의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 이면에도 실은 만동묘( 명나라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조선시대 당시 청주 화양동에 있었음)와 함께 화양동서원의 폐단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71년(고종 8년)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었고, 묘정에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깨져 현재는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또는 화양동주(), 시호는 문정()이다.

1633년(인조 11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君,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西)에

속한 그는 공서파(西)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계획을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인물로

지목받아 청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충주목사()·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57년(효종 8년) 정유봉사()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양보를 이끌어 내었다.

1658년(효종 9년)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으로 북벌계획을 담당하였으나 이는 명목상 추진하였을 뿐

실질적인 북벌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하자 북벌계획은 곧바로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기년설(: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좌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년)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다.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하였다.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으로 유배, 그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

()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