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기념물 제75호,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터..
2019년 5월 14일(화), 충남 캠핑여행길에 찾아간 만해 항용운 생가터..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번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생가터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879년에 태어난 곳이다.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복원된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 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과 조릿대가 자란다.
방안에는 만해의 영정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쓸쓸히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생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卍海寺)라는 사당이 있다.
생가터는 충청남도 기념물제75호(1989년12월24일)로 지정되어 있다.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만해(萬海·卍海),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이다.
1879년8월29일 이곳에서 출생한 한용운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년)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
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6월 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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