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기행] 전북 문화재자료 제105호, 정읍 신잠비(申潛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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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기행] 전북 문화재자료 제105호, 정읍 신잠비(申潛碑)..

by 정산 돌구름 2019. 1. 16.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정읍 피향정, 그리고 함벽루(涵碧樓)와 태인향교..


 

2019113(), 전북 정읍으로 떠난 여행, 호남제일정자 피향정과 신잠비..

 

정읍 피향정(披香亭)은 보물 제289(1963121)로 정면 5,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라 헌안왕(857860) 때 최치원(崔致遠)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재임 중 세웠다고 전하나 정확한 초창연대는 알 수 없다.

피향이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는 의미로 본래 이 누정의 상하(上下)에는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

두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누정 주위에 가득차므로 이를 뜻하여 피향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주변이 많이 변형되어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마치 평지 위에 누정이 건립된 것처럼 보인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하고, 현종 때 박숭고(朴崇古)가 확장 중건하였으며,

 

1716(숙종 42)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에 교섭하여 정부의 보조로 재목을 변산(邊山)에서 베어다가 현재의

규모로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1882년에 또 한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6·25전쟁 후에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1957년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원상으로 환원되었다.

최근에는 1972년 주변의 신축공사가 있었고, 1974년 단청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우물마루로 된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약 1.42m 높이의 28개 화강암 기초 위에 놓여진 누마루 형태를 하고 있다.

막돌초석을 놓고 이 위에 짧은 돌로 만든 두리기둥을 세웠다.

부분적으로 단주형(短柱形) 초석을 놓아 이 위에 나무로 된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얹은 뒤, 쇠서 하나를 내밀어 초익공(初翼工)식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7(七樑)으로 내부에는 고주(高柱)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첨차(檐遮)로 된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고, 다시

이 위에 초각(草刻)된 대공을 얹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우물마루 사방에는 계자(鷄子)난간을 둘렀으며, 마루로 오르기 위하여 전후의 어간에서는 난간을 끊어 그 앞에 돌계단을 놓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 주류를 이루나 양쪽 협간(夾間) 사이에는 귀틀을 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창호는 가설되지 않아

사방이 모두 트이게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이 누정을 거쳐간 시인 묵객들의 시가를 기록한 편액이 걸려 있다.

그 반대편의 어간 창방 위에는 湖南第一亭(호남제일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정자의 하나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피향정 앞에는 하연지제인 태창제라는 연못이 있고, 7~8월이면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하다고 한다.

또 연못에는 함벽루이라는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함벽루(涵碧樓)1918년 김우섭(金禹燮) 14인이 발의하여 목조 2층 누각(樓閣)으로 건립했던 사정(射亭; 활터)이었다.

태산군 궁사들의 궁도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전국 단위 궁도대회도 개최하였다.

그 후 건물이 쇠락하자 1971년 지방인사들이 정면 5칸의 목조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중건하였고, 사정으로서 기능도 상실되었다.

건물 전면에 걸린 함벽루(涵碧樓)’라는 현판 글씨는 한말의 서예가인 김돈희(金敦熙)가 쓴 것이다.

함벽루는 연()이 가득 심어진 하연지(下蓮地)에 둘러싸여 있으며, 함벽루 동쪽의 돌다리를 건너면 피향정(彼香亭)이 있다.

예전에는 피향정 동북쪽에 상연지(下蓮地)도 있었는데 상연지는 매립되고 현재 하연지만 남게 되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5(197642)로 지정된 태인향교(泰仁鄕校)..

1421(세종 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태인면 서쪽 3리 지점에 창건되었다.

1510(중종 5)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대성전, 정면 5, 측면 3칸의 명륜당, 정면 4, 측면 2칸의 만화루(萬化樓장수재

(莊修齋양사재(養士齋사마재(司馬齋고직사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건물 중 만화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1,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敎) 1인과 장의(掌議) 수명이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