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에서 여객선타고 개도 사람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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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아름다운 길

여수에서 여객선타고 개도 사람길을 걷다..

by 정산 돌구름 2018. 12. 28.


여수에서 여객선타고 개도 사람길을 걷다..



2018년 12월 24일(월), 따스한 남쪽나라 여수로 떠난 4박5일 캠핑여행길 셋째날은 개도 사림길을 걷는다.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아침 950분 배를 타고 1시간여를 달려 개도 화산항에 도착한다.

해안선을 따라 300m가량을 가면 개도 사람길’ 1코스 초입이 나타나고 사람길 1코스가 시작되는 데크길을 따라 오른다.

잠시 후 화산전망대에 이르면 건너편으로 제도가 바라보이고 그 너머로 백야도 백호산이 우뚝 솟아있다.

부드러운 길을 따라가면 다시 여석전망대를 지난다. 전망대보다는 바로 아래 갯바위에서의 조망이 좋다.

한참 후 여석마을 벅수가 이쓴곳을 지나 내려서면 도로에 이르고 백야도에서 오는 선착장인 여석항 삼거리를 지난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산책로 도로를 따라 올라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한참 동안 도로길이 이어진다.

우측으로 모전선착장이 바라보이고 모전마을을 지나면 역시 우측으로 모전몽돌해수욕장이 바라보인다.

계속되는 도로를 따라가면 교회 십자가가 우뚝 선 호령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앞에 조그만 포구의 해수욕장에 이른다.

이곳 호령포구까지가 1코스이다. 1코스는 도로가 많아 불편하지만 2코스를 생각하면 불편도 사치이다.

2코스는 완전한 산행길로써 초입부터 산길이 이어져 해안선 바로 위를 따라 이어진다.

조망은 좋지만 해발 180m 까지 올랐다가 내려서며, 조망이 트이며 해안선을 따라 개도상수원지까지 이어간다.

3코스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해안선을 따라 솔머리산으로 이어가지만 시간상 여유기 없어 정목으로 올라서 선착장으로 향한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아직 1시간이 넘게 뱃시간이 남아있다.

선착장 인근의 화산횟집으로 들어가 개도막걸리를 마신다.

뼈꼬시 한접시를 할려고 하였으나 회뜨는 사람이 여수를 나가 곤란하다고 하여 개도막걸리 2병만 마신다.

배 도착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가니 썰물이라 선착장에 배를 댈 수가 없어서 300m가량 떨어진 선착장에 배가 도착한다.

매표소에서 급히 차를 대어주어 간신히 435분 마지막 배를 탈 수가 있었다.

1시간여를 달려 여수항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린다.

 

여수에서 남쪽으로 약 21.5떨어진 섬, 개도(蓋島)는 여수에서 돌산도, 금오도에 이어 세번째로 큰 섬이다.

개도 마름모꼴로 한 바퀴 도는 형태의 평범한 육산이지만 짙푸른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을 보면서 걷는 매력적인 섬이다.

북쪽에 여수반도, 북동쪽에 돌산도, 남동쪽에 금오도, 서쪽에 고흥반도가 위치해 있다.

주위에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뜻에서 덮을 개()를 써서 개도(蓋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개도에 있는 화개산의 모양이 솥뚜껑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이동예가 난을 피하여 처음 섬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여수·여천향토지에 의하면 개도의 봉화산과 천제산 모양이 개 귀처럼 보이므로 개섬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한자화되면서

개도(蓋島)가 된 것이라 한다.

한편, 도서지에 의하면 주위의 작은 섬들을 거느린다는 뜻으로 덮을 개()’를 써서 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최고점은 남쪽의 봉화산(334.9m)이며, 그밖에도 200m 내외의 산들이 솟아 있고, 해안선은 동쪽과 서쪽이 돌출되어 있다.

그밖에 곳곳이 깊게 만입되어 드나듦이 심하다.

북쪽 일부 간석지를 제외하면 암석 해안이 대부분이고 남쪽은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취락은 북쪽의 화산마을을 중심으로 신흥·서사미 마을에 모여 있으며,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보리··고구마·마늘 등이 생산된다.

연안 일대에서는 서대기·양태·멸치··문어 등이 잡히며, ·미역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나 있으며, 곳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남국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다.

개도출장소·우체국·보건소·경찰출장소 등의 관공서와 교육기관으로 중학교 1개교,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청석포해수욕장과 낚시터가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개도 역시 고려 말 이후 공도(空島)정책으로 사람들의 거주가 금지됐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동예라는 사람이 난을 피해 들어와

첫 주민이 됐다고 전해진다.

그 후 경주 정씨, 김해 김씨, 남평 문씨, 전주 이씨, 경주 이씨 등이 뒤따라 입도하면서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도는 면적 8.76, 해안선 길이 25.5이며, 월항, 신흥, 화산, 모전, 여석, 호령 등 자연마을에 1,000여 명이 살아간다.

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은 화산마을로 큰 동네 혹은 대동마을로도 불렸다.

여석마을은 숫돌이 많이 난다해서 숫돌 여()를 써서 여석(礪石)마을이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인 1927년부터 도자기나 타일 원료인 납석광산이 개발됐고 1995년까지 채굴이 돼 외국으로 수출됐다.

음력 33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며, 월항 용바구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섬 전체에 크고 작은 선착장이 15개소 정도 있으며, 교통은 여수항에서 화신해운 소속 정기여객선인 한려페리호가 하루 세차례,

태평양해운 소속 백조호가 하루 두차례, 백야도에서 대형 카페리3호가 하루 3회 왕복 운항되고 있다.

개도의 풍속 중 가장 특별한 것은 지금은 사라진 천제로써 봉화산 옆의 천제봉이 바로 그 천제를 지내던 곳이다.

하늘신(天神)에게 제()를 올리는 개도의 천제는 음력 31일 자시에 지내고, 당산제는 32일 오후 5시께 지냈는데 천제단을

상당이라고도 한다. 당제는 하당인 마을의 천제당에서 지냈다.

예전에는 당집 안에 동(銅)으로 만든 말 두마리가 모셔져 있었는데 1980년대 도난당하였다고 한다.

동마(銅馬)상이 사라진 뒤에는 천룡주신지위(天龍主神之位)’라는 위패를 놓고 용왕신(龍王神)을 모셨다.

천제와 당제를 모시는 제관은 당주라 했는데, 음력 2월에 마을총회에서 생기복덕을 보아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결정했다.

당주는 3일 전에 모든 제물을 준비해 기우집으로 올라가 치성을 드리면서 준비해 천제와 당제를 모셨다.

지금은 천제도 당제도 명맥이 끊겼다.

, 개도에는 아기장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김()씨 성을 가진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찬란한 둥근 해가 입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조그마한 날개깃이 있었다.

아이가 돐쯤 됐을 때 부부가 밭에서 일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집에 와보니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 처마 밑으로 옮겨져 있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의심스러운 마음에 부부는 흐린 날, 곡식을 마당에 널어놓고 숨어서 지켜봤다.

역시나 비가 내리자 아이가 걸어 나와 곡식과 멍석 등을 옮겨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김씨 부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면서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장수라 여겼다.

그런데 사실이 알려지면 역적으로 몰려 가족 모두가 몰살될 것이 두려웠다.

결국 부부는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배에 태워 먼 바다로 나간 뒤 발목에다 큰 돌을 묶어 바다에 던졌다.

하지만 아이는 바다 위로 솟구쳐 나와 오른손으로 뱃전을 붙잡았는데 깜짝 놀란 아비가 도끼로 아이의 오른 손목을 잘라 버렸다.

아이는 왼손으로 뱃전을 붙잡으면서 오른손이 없는 장수가 무슨 뜻을 이룰수 있겠는가?”라고 소리치며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바다에선 폭풍우가 일면서 청룡 한 마리가 금오도 함구미 쪽으로 날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용바위(용바구)라 부르는 바위 위에는 죽은 아이의 영혼이 가지고 놀았다는 담뱃대, 숟가락, 젓가락을 놓았던

자국이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개도에 전해지는 또 하나의 전설은 지극 정성으로 백마 돌보던 복녀의 전설이다.

개도 화산마을에는 400년 고목, 정자나무가 있는데 마녀목으로 불리는 느티나무이다.

말과 소녀의 애틋한 사연이 깃든 나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개도 목장의 말들은 자주 원인 모를 질병에 걸려 죽거나 잘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기르던 사육사들은 개도 천제봉 제단에 철마상과 목마상을 모시고 제를 드렸다.

병마로부터 말을 보호해주고 무탈하게 잘 자라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했다.

이 말 사육사 중 이돌수에게 무남독녀 외딸 복녀가 있었다.

14, 어린 복녀는 아버지를 도와 말들을 관리하고 제를 드리는 데도 정성을 다해 말들은 병들지 않고 잘 자라났다.

말들 중에 검은 점박이 백마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말이 유독 복녀를 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점박이 백마가 바위에 부딪혀 앞다리를 다쳐 뼈에 금이 갔는지 절룩이며 풀도 먹지 않았다.

이돌수는 차도가 없어 보이자 감목관에게 보고하고 폐마, 즉 말을 죽이려 하였다.

복녀는 폐마를 반대하며 자신이 치료해 살리겠다고 울며 아비에게 애원했다.

아비는 다리가 생명인 말이 다리를 다쳤으니 나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문책을 당할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딸의 간청을 모질게 뿌리칠 수 없어 열흘간 말미를 주기로 했다.

복녀는 왕대나무의 속을 파 부목으로 만들어 백마의 다리를 고정시키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백마는 3일이 지나자 풀을 먹기 시작하며 눈물을 흘려 복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복녀는 백마와 함께 자면서 약이 되는 풀을 먹였고, 1주일째 부목을 풀었고 열흘이 되자 백마의 부상은 씻은 듯이 나았다.

백마는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졌고 복녀는 백마의 목을 안고 울었다.

그 후 백마는 더욱 복녀를 따르며 좋아했고 둘은 정이 깊어졌다.

한달 후 장군이 탈 말을 고르려 감목관이 섬으로 왔다. 그런데 점박이 백마와 진갈색 말이 뽑혔다.

이돌수와 복녀가 울며 간청해도 감목관은 매정하게 백마를 몰고 가버렸다.

복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 병이 났고, 병은 나날이 깊어져 갔다.

그렇게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복녀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겨우 몸을 추스르고 목장의 마구간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 그토록 그리던 점박이 백마가 안장을 찬 채 상처투성이로 서 있었다.

복녀 부녀는 백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런데 아비가 말 먹일 풀을 뜯으러 갔다 돌아와 보니 복녀와 백마 둘 다 죽어 있었다.

차출돼 갔던 백마는 진중을 탈출한 뒤 여러 달 동안 산 넘고 강과 들을 건너고 다시 바다를 헤엄쳐 개도까지 왔다.

그 사이 상처가 나고 피로가 쌓여 목장에 돌아왔을 때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백마와 복녀는 기쁨에 겨워 떨어질 줄 모르다가 끝내 부둥켜안고 지쳐 쓰러져 숨을 거두어버렸다.

아비 이돌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빈터에 백마와 딸을 나란히 장사 지낸 뒤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마녀목이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