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소금강 강천산, 애기단풍이 아름다운 계곡길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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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아름다운 길

호남의 소금강 강천산, 애기단풍이 아름다운 계곡길을 따라 걷다..

by 정산 돌구름 2018. 11. 8.


호남의 소금강 강천산, 애기단풍이 아름다운 계곡길을 따라 걷다..



2018년 11월 6일(화), 맑고 포근한 날씨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하여 시야가 흐리다.

오후 시간에 강천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모든 주차장이 만차이고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가까스로 빈 주차공간을 찾아 주차를 하고 데크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매표소가 있는 상가지대이다.

주차료는 없지만 입장료는 1인 3,000원이다.

계곡을 따라가면 병풍폭포를 지나면서 단풍이 절정에 이루고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사찰 강천사를 둘러보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강천산의 상징인 출렁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를 지나 오르면 구장군폭포가 있는 강천산 성테마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선다.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강천산(剛泉山 583.7m)은 도처에 기봉이 솟아있고, 크고작은 수많은 바위사이로 폭포를 이루고있다.

강천산은 원래 광덕산(光德山)이었으나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강천사라는 유명 사찰이 있어 강천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 지리지나 문집 등에는 강천산 보다는 광덕산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다.

또한 풍수지리상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서 용천산(龍天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583.7m)은 호남정맥에서 동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으며, 강천산의 최고봉은 산성산(603m)이다.

산 전체를 말할 때는 강천산, 주봉(정상)은 왕자봉, 최고봉은 산성봉, 그리고 남쪽 끝자락의 광덕산은 광대봉이다.

또한 깊은 계곡과 계곡을 뒤덮은 울창한 숲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유서깊은 강천사와 삼인대, 강천사 5층석탑, 금성산성 등 유서깊은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도처에 비경이 숨겨져 있다.

강천산은 계절별로 봄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폭포와 계곡, 가을에는 애기단풍겨울에는

잔설로 덮인 현수교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또한 강천사, 광덕정, 흥화정이라는 정자와 순창 삼인대(三印臺 전북유형문화재 제27), 깎아지른 계곡에 만들어진 호남 제일의

구름다리인 현수교 등이 볼거리이다.

1980년 설치된 이 구름다리(강천산 현수교)는 길이 75m, 높이 50m, 폭 1m로 강천산의 명물이다.

2003년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풍폭포는 높이 40m의 자연 형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미와 웅장함이 살아 있다.

2005년에 2.5의 웰빙 산책로(맨발 산책로)가 조성되었으며, 2009년에는 삼림욕장이 조성되었다.

단풍나무가 많아 매년 11월 초순께 절정을 이루는데 애기단풍이 곱게 물들면 장관을 이루어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  21위이다.

또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강천계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조망이 좋은 점 등을 고려하여 산림청 100명산에 선정되어 있다.


강천사(剛泉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신라 진성여왕1년(887년)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혹은 조선 성종13년(1482년)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에 보면 신령(信靈)이 광덕산(廣德山)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초암을

짓고 지낸 것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나와 있다.

중숙왕3년(1316년) 덕현(德賢)이 5층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를 확장하였으며, 성종13년(1482년)에는 중조(中照)가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얻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이 절과 12개의 부속암자가 전소되었다.

선조 37년(1604년) 태능(太能)이 중창하여 강천사만은 이전의 면모를 갖추었다.

1855년 금용당(金容堂)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보광전(普光殿)·첨성각(瞻星閣)·칠성각의 당우들이 불타버렸다.

그후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을, 1977년 관음전을, 이듬해 보광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고, 1997년 첨성각을 헐고 복원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절에는 비구승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

(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에 따라 절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문화재는 대웅전 앞에 있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92호인 오층석탑과 금강문(金剛門),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인 삼인대

(三印臺) 등이 있으며, 오층석탑은 1316년(충숙왕 3) 덕현이 중창할 때 건립한 탑이다.

이 탑 북쪽 약 1m 지점에는 중대석(中臺石)과 보주(寶珠)만이 남아 있는 석등이다.

금강문은 1316년 덕현이 절 주위의 풍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으로 높이 8m, 너비 4m이다.

또한, 이 절에는 천년 묵은 지네가 인간으로 변신하려다가 법당에서 피우는 향내음이 너무 독해서 인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요괴가 되어 매일 밤 승려 한 사람씩을 죽였다는 전설과 거지, 승려, 그리고 돈에 얽힌 전설 등이 전해진다.


순창 삼인대(三印臺)는 1973년6월23일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강천사 앞 내를 건너 남쪽에 있는 정면 1칸의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碑)가 세워져 있다.

영조 20년(1744년) 4월에 세운 이 비는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이재 (李縡)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썼다.

연산군12년(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 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삼인대는 지난 1963·1977·1987·1991년에 보수(단청)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관리하고 있으며,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1994년 지역 향토인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강천산 성테마공원..

성테마공원에는 토우조형물 7점과 남.여 상징물 7점, 가족조형물 2점 등 총 16점의 조형물이 공원내 잔디광장에 세워졌다.

이곳 구장군폭포는 음양이 서려있는 재미있는 곳이다. 폭포 중간부분이 낙수와 풍화로 자연스럽게 여성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왼쪽에 수직으로 형성된 바위산은 남성형태를 닮아 자연스럽게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 환경오염, 각종 질병, 삶의 경쟁에 의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곳 신성한 성테마공원의 자연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자연의 음과 양의 기운을 받아 생활의 활력과

삷의 재충전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천년사랑 거북바위와 구장군폭포..

강천산 계곡 폭포아래 위치한 용소(龍沼)는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고 알려질 만큼 물이 맑고 깊다.

옛날 강천산 산골마을에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마음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청년은 그 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강천산의 깊은 산골을 돌아다녔다.

이런 정성이 하도 지극하였던지 어느날 청년은 폭포 정상에 산삼이 있는 꿈을 꾸게되었다..

다음날 산삼을 찾기위해 폭포 정상을 헤매다가 날이 지고 말았다. 산삼을 찾지못해 시름에 잠겨있던 청년은 저멀리 달빛아래

비친 산삼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그만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때마침 용소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가 청년을 발견하고 청년의 정성에 감동하여 산삼을 찾아주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는 그들에게 천년동안 폭포에서 거북이로 살게하고 천년이 되는 날 동트기 전 폭포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올려주리라 약속하였다.

마침내 천년이 되는 날, 두 거북은 폭포를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암거북을 먼저 정상에 올여놓은 숫거북이 정상으로 향하는 순간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숫거북을 공격하게 되었고, 숫거북은

호랑이와 다투다가 그만 동이 트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옥황상제는 이루지못한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지켜주고자 그들을 바위로 변하게 하였고, 이들의 사랑을 시기한

호랑이 또한 바위로 변하게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구장군폭포의 전설..

마한시대 혈맹으로 맺어진 아홉 명의 장수가 전장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천년사랑 거북바위를 기리며,

차라리 죽기 전에 한번 더 싸워보자는 비장한 결의로 마음을 다지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얻었다는 전설이 담긴 폭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