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기행]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적 제408호 왕궁리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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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기행]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적 제408호 왕궁리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by 정산 돌구름 2018. 11. 3.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2018년 10월 31일(수), 전북여행 둘째날 두번째 일정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왕궁리유적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은 사적 제408(1998917)로 지정되었으며,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와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른다.

19897월부터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학술 발굴조사되었다.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유적으로

꼽히며,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 등으로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유적에는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하였다는 제석정사(帝釋精舍)터를 비롯해 그 안에 관궁사(官宮寺대궁사(大宮寺) 등의

절터와 대궁(大宮)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토성터 등이 있어 이곳이 왕도였거나 왕도와 직접 관련 있는 유적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76년 및 1977년도에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시행된 후, 1989년도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유구들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되는데, 첫째 백제 말경에 해당되는 유적, 둘째 통일신라 초기 유적(성벽), 셋째 통일신라

초기-말기 경에 해당하는 유적(사찰) 등이다.

발굴조사에 따른 실제 유적의 존재 시기와 성격은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

초창기 유적의 성격은 출토유물 등을 통해서 유적은 왕실이나 관부와 관련된 유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가장 늦은 시기의

유적은 사찰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마한과 관련한 설 및 후백제 견훤 도읍설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익산읍지등의 문헌들은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왕궁리유적전시관은 왕궁리5층석탑이 위치한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되어 2008년 개관한 전시관으로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소개하고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문화교육장으로 활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81223일 개관한 이 전시관은 매주 월요일과 11일 휴관한다.

관람시간은 09:00~18:00이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시관에서는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중요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왕궁리유적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백제기와를 직접 만져보면서 기와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목판찍기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백제 왕궁터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중 300여 점을 선정·전시하였는데,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토기 등과 함께 연화문 수막새, 각종 인장와와 토기류,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이 전시

되어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五層石塔)은 국보 제289(199711)로 지정된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높이 약 8.5m인 이 석탑은 마한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에서 남쪽으로 2정도 뻗은 산줄기 끝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받침돌은 돌을 쌓은 구조가 아니라, 목탑처럼 네 귀퉁이의 주춧돌 위에 각 변의 길이가 같지 않은 부등변(不等邊)8각 돌기둥을

높이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기 위해서 길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창방(昌枋)이나 평방(平枋)처럼 올려 놓은 모습이다.

평방 위에는 1층 몸돌을 놓았고, 아울러 받침돌의 덮개돌을 받치도록 구성하였다.

네 기둥의 중심인 가운데 부분에는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목탑의 기둥인 심주

(心柱)처럼 여러 단의 네모난 돌을 쌓아 올렸다.

8각 기둥과 네모난 돌 사이에는 막돌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시대에 만든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고, 부서진 덮개돌과

면석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파손된 면석의 각 면에는 2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보수 공사를 진행하던 중, 1층 지붕돌 가운데 부분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확인되었다.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1층 지붕돌의 돌은 백제시대에 주춧돌로 사용하였던 돌을 다시 이용한 듯 보이는데, 좌우에 ()’자형의

네모난 홈을 만들고서 뚜껑이 있는 금동 상자[有蓋金銅函]를 각각 안치한 상태였다.

오른쪽 금동함 안에는 금으로 만든 유개방합(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속에는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함께 연꽃 모양의

뚜껑을 갖춘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도 확인되었다.

왼쪽 금동함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서 2줄의 금띠로 묶인 금으로 만든 ‘금강경(金剛經)’

발견되었는데, 펴고 접을 수 있는 절첩식(折帖式) 금구(金具)로 연결된 상태였다.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舍利) 구멍은 ()’자형으로 조성되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처럼 생긴 광배(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

(靑銅如來立像)과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고, 북쪽 구멍에서는 향() 등이 발견되었지만, 서쪽 구멍의 것은 일찍이 도굴

당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塔身部)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1층 몸돌은 모서리 기둥을 조각한 기둥모양의 돌을 네 귀퉁이에 세우고

그 사이에 가운데 기둥을 새긴 면석을 끼워 세운 모습이다.

2층 몸돌은 각 면마다 1장의 돌을 세워 조립하였고, 3층 이상의 몸돌은 2장의 돌로 구성되어 각각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3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4장씩 모두 8장의 돌로 조립되었고, 45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2장씩 모두

4장의 돌로 구성되었다. 추녀는 얇고 밑면은 대체로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밑면 받침은 모두 3단이다.

네 귀퉁이는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이는데, 전각(轉角) 아래 부분에는 풍령(風鈴)을 달려고 만든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적은 편이며, 꼭대기에는 윗 몸돌을 받치기 위한 돌이 끼워져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부서진 보륜(寶輪) 1개 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1965년에 보수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붕돌의 모습이 백제계 석탑을 따르고 있고, 탑신부의 결구(結構) 수법이나 받침 표현

방식이 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고 하여,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보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받침돌의 구성 방식이나 사리장엄구의 양식 등이 확인한 뒤에는 후대까지 유행하였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 석탑의 양식을 더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심초석과 심주의 구조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의 받침돌 구조와 일치하는 점을 들어, 백제시대에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飜案)하는 과정에서 건립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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