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기행] 월악산 덕주사와 보물 제406호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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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기행] 월악산 덕주사와 보물 제406호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by 정산 돌구름 2018. 8. 14.


월악산 덕주사와 보물 제406호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2018년 8월 9일, 월악산 등산길에 만난 덕주사와 마애여래입상..


덕주사(周寺)는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진평왕 9년(58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輿)』의 충주목() 불우조()에는 “

之) 전해오는 말로는 덕주부인이 이 절을 세웠으므로 그렇게 이름했다고 한다.”라고 하여 창건과 관련된 또 다른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1632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西)』, 1799년에 지어진 『범우고()』, 역시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람고()』,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태고사사법()』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수습되는 석탑 기단 석재와 옥개석[지붕돌] 기와편 등 유물의 상한선이 고려 초기를 넘지 못하는 점을 볼 때

창건 시기는 고려 건국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 덕주사의 경영과 관련한 기록 「증지수좌관오묘지명()」을 보면  관오(1096~1158)의

원당으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스님도 이미 국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이에 보답코자 특별히 안성군에 바라밀사를 창건하여 낙성을 보았다.

이를 왕에게 아뢰자 임금께서 크게 가상하게 여겨 십육나한상을 보내어 법당에 봉안하였다. 이에 스님은 사와 원당인

충주 덕주사에 산승을 소집하여 항상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을 설치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덕주사가 증지수좌() 관오(奧)를 중심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이 베풀어졌던

원당()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 덕주사의 경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로 하 덕주사에서 발견된 「덕주사금구()」가 있다.

이곳에는 사력()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태화 6년 병인년 8월 21일에 상 덕주사 금구 하나를 만든다. 중량은 13근이다. 동량도인은 계안, 료한이다.

직장 송공후가 기록한다.[]”라고

하여 당시 덕주사에서 활약했던 승려와 불사에 참여하였던 지역의 유력한 인물 그리고 이미 1206년에 덕주사를 상 덕주사와

하 덕주사로 구별하고 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덕주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정혼()의 『진재집()』에 수록된 기록이 전해진다.

이곳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한훤관방방략()」에는 “덕주하사()를 승통소()로 하여 삼남()의

승군()을 번갈아 교대로 지키게 하며, 여기에 드는 비용은 삼남의 사찰마다 나누어 내도록 하며, 산의 북쪽에 있는 신륵사

()와 보광암()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 모시고, 두 절에 소속된 전답과 덕주하사()의 전답으로서 먼 곳에

있는 것을 가까운 곳에 있는 것과 서로 바꾸게 하여 번드는 군사로 하여금 경작하여 둔전()의 예처럼 하여 양곡을 마련하게

한다.”는 내용과 “덕주상사()를 수리하여 된장과 소금을 많이 예비하는 일을 남한산성()의 예와 같이 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00년대 후반까지 덕주사가 국가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기능을 갖춘 사원으로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덕주사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4기의 부도 가운데 그 행적이 비교적 상세한 것은 환적당() 의천(1603~1690)이다.

의천의 자는 지경(), 속성은 문씨()로 선산()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속리산 복천사()의 진정() 탁린()의 문하에 들어가 1618년(광해군 10)에 구족계를 받았다.

1631년에 금강산에 들어가 편양() 언기(1581~1644)의 법을 이어 받았다.
의천은 풍담() 의심(1592~1665)과 함께 언기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 이해되고 있다.

언기는 청허() 휴정(서산대사, 1301~1382)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 태고 보우로부터의 선맥() 계승을 주장하였다.

이로 볼때 조선시대 덕주사는 태고법통설()에 근거를 둔 언기 문하 승려들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전각은 6·25 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63년에 지암 권정철이 지금의 덕주사를 중창하였다.

이후 1970년에 박해찬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85년에 성주가 중건하였다.

당시 한수면 역리에 있던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이전하여 지금의 약사전에 봉안하였다.

1998년에는 청하 성일이 주석하면서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2007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원경이 주석하고 있다.

2009년 화재로 일부 전각이 불타 2011년 현재 복원 공사를 진행중이다.


보물 제406호(1964년 9월 3일)로 지정된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德周寺 磨崖如來立像)..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주사는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마애불은 남쪽 화강암 벽면 가득히 부조되었는데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마애불의 양어깨 위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 목조전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발()의 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비만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과장되게 표현되어 예배상으로서의 숭고미는 찾아볼 수 없다.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얼굴이

상체에 맞붙어 버렸으며, 삼도()는 가슴 위에 선각되어 있다.

비만한 신체 역시 인체의 조형적 특성이 무시된 채 괴체화()되었다.

통견()의 법의는 힘없이 늘어져 원호를 그리고 있다. 옷주름 역시 힘이 빠져 생동감을 잃었다.

U자형으로 늘어진 법의의 앞자락과 양 무릎 위에 표현된 동심타원형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의 형식이 도식화된 것이다.

왼쪽 팔목에 걸쳐 흘러내린 소맷자락도 무의미한 몇 가닥 음각선으로 주름져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양손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어 아미타불의 구품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법의 자락 밑으로는 평행하는 세로줄의 옷주름을 새긴 군의()가 표현되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다.

발 좌우에는 발을 감싸듯 너비가 넓은 앙련(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비만한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한 조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조형 수법은 불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제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