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기행] 한국 33관음성지, 천년고찰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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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기행] 한국 33관음성지, 천년고찰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by 정산 돌구름 2018. 9. 22.


[고창기행] 한국 33관음성지, 천년고찰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2018년 9월 20일 목요일, 잔뜩 흐린 날씨, 선운산 등산 후 찾은 선운사의 풍경..


선운사(禪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로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조계종 2대 본사이다.

선운사 사적기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24년(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폐사가 되어 1기(基)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고려 공민왕3년(1354년)에 효정선사(孝正禪師)가 중수하였다.

성종3년(1472년)부터 10여 년 간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광해군 5년(1613년)에는 무장(茂長)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 등 승려와 함께 재건을 도모하여, 3년에 걸쳐

대웅전, 만세루(萬歲樓), 영산전(靈山殿), 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이 절은 불교학자 긍선(亘璇)이 처음 입산수도한 절이기도 하다.

긍선은 불교의 기본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왕성해지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던 선종에서도 선리(禪理)를 근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조선 후기에 조사선(祖師禪)의 본연사상을 임제삼구(臨濟三句)에 입각하여 해결해 보려고

시도한 불교학자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이 있고,

대웅보전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영산전 목조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약사불상, 삼존불좌상, 보살입상, 아미타삼존상, 십육나한상,

판관상, 녹사상(使), 사자상(使), 십대왕상, 동자상, 호법신장상(像, ), 팔상전석가불좌상 등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영산전·관음전·팔상전·명부전·만세루()·산신각·천왕문·대방·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번째는 신라의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선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조선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천왕문'이라는 편액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만 현재 문은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최근 사역을 정비하면서 앞쪽으로 이건되었다.

아래층에는 중앙에 통로를 내고 좌우 협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여 천왕문의 성격을 가지게 했다..


사천왕 중 동쪽을 수호하는 이는 지국천왕()이다.

그는 안민()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에 있는 천궁()에서 살고 있다.

16선신()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쪽을 방어하는 신은 수미산 중턱 백은타()에 살고 있는 광목천왕()이다.

그는 흔히 잡어()·비호보()·악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과 비사사() 등이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달리 비사문천왕()이라고도 한다.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는 전북유형문화재 제53호(1974년9월27일)로 지정된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수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규모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면의 어칸(御間 중앙칸)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했다

중앙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보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만세루 앞 배롱나무..



선운사 영산전(靈山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해 있다.

이 전각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고 1713년에 단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어칸은 육각형의 대석에 원형으로 다듬어진 초석을 사용한 데 비해 측면 쪽으로 그 다음 것은, 아래는 자연석 초석이나 상단을

원형으로 쇠시리한 것을 사용하였고, 제일 바깥쪽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쇠서를 내밀지 않고 초각으로 말아 올린 물익공 형식에 가까운 형태로 처리하였으며, 상단에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고

화각첨차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중앙 3칸에 불단을 형성하되 어칸의 경우 후벽면까지 붙여 불단을 조성함으로써 반 ‘아(亞)’자형의 불단 평면이 되도록 하였다.

후벽면까지 넓혀진 중앙 불단에는 석가삼존상을 봉안하고, 좌우측에는 ‘ㄱ’자형으로 형성된 불단에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평천장과 빗천장을 조합한 형식이며, 중앙 어칸의 후면 고주를 가로질러 운궁형 닫집을 설치하고 빗천장 받침목에 연화 초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부 벽면에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나한(羅漢) 등의 벽화와 삼존상 뒷벽에 금강역사를 그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1973년6월23일)인 목조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한 삼존불로 모두 단향목(檀香木)으로 제작한 목불이다.

주존의 높이는 300cm이고, 협시보살은 240c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근년에 어느 비구가 이 삼존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다가 이곳에서 화광(火光)이 발하여 달려온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화를

면했다는 염험이 전해온다..


선운사 영산전 조성시의 「시주록()」에 “도광() 원년에 기존의 2층 각황전(殿)이 무너지자 1층으로 고쳐 짓고,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미륵()과 갈라()보살을 보처로 안치하고, 이를 영산전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 삼존불은 법화경의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한 석가여래삼존불로 1821년(순조 2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는 촘촘한 나발(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껍질처럼 틀어 말린 모양)에 육계(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의 윤곽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를 갖추었다.

방형( 네모반듯한 모양)의 얼굴은 직선적인 눈과 콧날 등에서 마치 칼로 빚은 듯 목석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 겹의 삼도()가 새겨진 원통형의 목도 얼굴과 상체를 어색하게 연결하고 있을 뿐이다.

신체는 네모진 벽돌을 그냥 쌓아 올린 듯 전혀 유기적으로 조화되지 못한 둔중한 형태이다.

통견()으로 걸친 법의()의 옷주름도 칼로 빚은 듯 평면적이고 획일화되어 전혀 개성을 찾을 수 없다.

넓게 트인 가슴을 가로지르는 군의() 상단도 세 줄의 직선으로 단순화되었다.

넓은 목깃과 복부의 옷깃 아래로 여며 넣은 소맷자락도 평면적이다.

장지와 약지를 어색하게 구부린 양손은 손목이 짧고 지나치게 작아 신체와 부조화를 이룬다.

가부좌()한 양다리는 추상적인 물결형의 옷주름에 쌓여 전혀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획일적인 얼굴 형태와 딱딱한 표정, 몸의 굴곡이 무시된 방형의 둔중한 신체, 직선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평판 같은 옷주름 등

이 삼존불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팔상전(八相殿)..

영산전과 명부전 사이에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뒤편으로 한단 높이 기단을 쌓은 곳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이익공 형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1706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조선후기의 건물로서, 196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내부의 불단은 'ㄷ'자형으로 간략하지만 닫집은 2개의 기둥을 세우고 천룡조각을 한 화려한 형식이다.

불단 중앙은 근래 조성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후면벽에는 1901년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팔상탱을 봉안하였다.


팔상전 팔상탱(八相殿 八相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을 팔상탱이라고 하는데 선운사의 팔상탱은 관하종인(觀河宗仁) 등이 1901년에

조성한 것과 근래에 조성한 것이 혼재되어 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은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도솔천궁(兜率天宮)에서 흰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부인의 몸에 입태(入胎)

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은 마야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태자를 낳는 장면이고,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은 성장한 싯달타 태자가

성밖의 사문(四門)으로 나가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을,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태자가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장면이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은 태자가 출가한 후 10년

동안 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을,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태자가 보리수 아래에서 마왕의 공격을 막고 항복받는 장면이다.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은 깨달음을 얻은 세존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은 세존이

45년간의 중생 교화를 마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조사전(祖師殿)

정면5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2010년4월13일 석전 영호대종사 열반 16주기를 맞아 역대 조사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낙성식을

가졌다..




창건주인 검단스님을 비롯하여 의운, 설파, 백파, 경담, 환응, 석전스님 등 7분의 진영이 봉안되었다..




산신당 (山神堂)..

영산전 뒤편에 길게 설치된 기단 위 팔상전의 옆에 위치한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일반적 산신각과 달리 선운사의 창건주인 검단선사와 참당사의 창건주인 의운스님을 함께 그린 진영이 중앙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 산신당의 주인인 산신을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정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불단은 전면과 측면의 벽체에 붙여 ‘ㄷ'자 형태로 구성하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명부시왕을 봉안하였다.

천장은 노출천장 을 하였으나 지장보살이 봉안된 윗부분에만 빗천장을 설치하고 운룡문을 그려 닫집을 대신하였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향우측에 도명존자와 좌측에는 무독귀왕이 서있다.

그 옆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1,3,5,7,9대왕을, 좌측에는 2,4,6,8대왕을 배치하였다.

지장보살좌상(138cm)은 스님처럼 민머리로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소모양을 하고 있다.

방형의 체구에 상체가 긴 편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죄의 경중을 가려 죽은 날로부터 49일까지 7일 단위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또 100일째 되는 날, 소상과 대상을 당할 때마다 시왕들에게 차례로 선악업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제1대왕 진광왕(王, )은 2월1일 탄생하였으며, 도산()지옥을 관장한다.

경오·신미·임신·계유·갑술·을해생을 맡으며, 죽은 날로부터 처음 7일간을 심판한다. 죄인에게 칼이 선 다리를 건너게 한다.

제2대왕 초강왕(王, )은 3월 1일 탄생하였으며, 확탕()지옥을 관장한다.

무자·기축·경인·신묘·임진·계사생을 맡으며, 대해 밑 정남쪽 옥리석화 대지옥에 살고 있다. 죄인을 끓는 물에 담근다.

제3대왕 송제왕(王, 薩)은 2월 28일 탄생, 한빙()지옥을 관장하며, 임오·계미·갑신·을유·병술·정해생을 맡은다.

대해 밑 동남쪽 옥리석하 흑구대지옥에 산다. 죄인을 얼음 속에 가둔다.

제4대왕 오관왕(王, )은 1월 8일 탄생, 검수()지옥을 관장하며, 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생을 맡는다.

다섯 가지 형벌을 주는 역할을 하며, 사후 47일이 지나 지옥에 가면 죄의 경중을 저울질해 죄인의 몸을 칼로 벤다.

제5대왕 염라왕(王, 薩)은 3월 8일 탄생, 발설()지옥을 관장하며, 경자·신축·임인·계유·갑신·을사생을 맡는다.

지옥의 주신으로 죄인의 혀를 집게로 뺀다.

제6대왕 변성왕(王, )은 2월 27일 탄생, 독사()지옥을 관장하며, 병자·정축·무인·기묘·경진·신사생을 맡는다.

독사지옥의 왕으로 죄인의 몸을 독사로 감는다.

제7대왕 태산왕(王, )은 3월 2일 탄생하였으며, 거해()지옥을 관장한다.

갑오·을미·병신·정유·무술·기해생을 맡으며, 죄인이 다시 태어날 곳을 정해준다. 죄인의 뼈를 톱으로 켠다.

제8대왕 평등왕(王, )은 4월 1일 탄생하였으며, 철상()지옥을 관장한다.

병오·정미·무신·기유·경술·신해생을 맡으며, 죽은 사람의 죄와 복을 공평하게 판단한다. 죄인을 뜨거운 쇠판에 올려놓는다.

제9대왕 도시왕(王, )은 4월 7일 탄생하였으며, 풍도()지옥을 관장한다.

임자·계축·갑인·을유·병진·정사생을 맡으며, 사자의 1주기를 맡는다. 죄인을 바람길에 앉힌다.
제10대왕 오도전륜왕(王, )은 4월 27일 탄생하였으며, 흑암()지옥을 관장한다.

무오·기미·경신·신유·임술·계해생을 맡으며, 사자의 3년을 맡는다. 죄인을 암흑 속에 가둔다..


『시왕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지만 세속적인 권선징악()의 요소가 짙기 때문에 선찰()에서도

시왕을 모시는 경우가 있다. 

보통 명부전 또는 지장전에 그 조상()을 모시고, 또 욕계()의 6천()과 4선천()의 왕들을 일컫기도 한다..



1963년1월21일 보물 제290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다.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 비천, 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목조(木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년)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

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잡고 있다.

흙으로 빚은 소조삼세불로 노사나불이다.

1634년(인조12년)에 법정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 비교적 균형잡힌 모습이다.


대웅전 삼존불(三尊佛)..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의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고 삼신불 사이에는 근 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선운사 대웅보전 삼신삼세불 벽화는 1840년(헌종 6년) 화승인 원담()과 내원(), 익찬(), 도순() 등이 제작한

것으로 토벽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세로 465cm, 가로 320cm의 흙벽에 회칠을 하고 채색하였다.

「비로자나불 벽화」,「아미타불 벽화」,「약사불 벽화」등 세 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신불인 비로차나불()과

삼세불()인 아미타불(), 약사불()을 결합한 삼신삼세불화()의 형식을 보여 준다.

1476년(성종 7)에 제작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함께 조선 시대 후불 벽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선운사 대웅보전 삼불벽화, 또는 선운사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벽화로도 불린다.

이 후불벽화는 존상(尊像)으로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불ㆍ약사여래불ㆍ아미타불의 뒷벽에 각각 그려져 있는 것으로,

중앙은 비로자나불회, 우측은 약사불회, 좌측은 아미타불회도를 나타내었다.

비로자나불회도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벽화들은 1840년 현세에 수복을 누리고 내세에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조성한

것으로, 성찬(性贊)의 화주로 익찬(益讚)ㆍ내원(乃圓) 등 11명의 화원이 그린 것이다.


대웅보전 삼불회 벽화와 관련된 자료로 선운사사적인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을 들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1839년 큰 비로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져 1840년 봄과 여름에 보수 및 단청을 했으며 화주는 성찬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1840년 여름에 있었던 단청불사와, 대웅보전 후불벽화의 화기에 적힌 화주 성찬과 일치한다.

비로자나불회도는 세 폭의 벽화 중 중앙 그림으로 거대한 화면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상단에 사천왕이 배치되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가진 비로자나불은 소용돌이 모양의 나발(螺髮)에 쌍꺼풀진 눈, 내려온 눈썹이 특징적이다.

색조는 적색ㆍ녹색ㆍ흰색이 주조색이며,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다.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상단에 2보살과 4제자가 배치되었다.

약사삼존도 비로자나삼존과 같이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아미타불회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2보살과 2제자, 팔부중 가운데 2위가 배치되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녹색 계열과 흰색 등이 많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푸른 느낌이 많이 돈다..












6층석탑(六層石塔)...

전북 유형문화재 제29호인 6층석탑은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에 위치한다.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방형의 축대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탑의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양식을 지녔고, 5단의 옥개층급을 지니는 등 부분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탑을

연상케 하는 고려 초기의 작으로 추정된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했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괘불대(掛佛臺)..

대웅보전 앞에 있는 2쌍의 괘불대는 괘불을 내어 걸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현재 마모되기는 했으나,

옹정육년(雍正六年, 1728년)과 가경삼년(嘉慶三年, 1798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요사채를 관음전으로 사용하다가 이를 허물고 1990년 지금의 자리에 신축하였다.

지금의 관음전은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공포는 이 익공 형식으로 쇠서에 연화를 달고 보머리 앞에 봉황두를 두는 등 장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내부는 가운데 부분을 평반자로, 전후면의 퇴칸에는 빗반자를 두었는데 중앙의 우물반자는 2줄로 두고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빗반자에는 화문을 두고 대들보에는 좌우측에 청용과 황룡을 그려 장식하였다..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에 십일면천수천안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선운사 사적기에 1474년 관음전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중창을 하면서 1705년에도 관음전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부속전각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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