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제일의 동천, 거창 수승대(搜勝臺)와 구연서원(龜淵書院)..
2018년 10월 17일(수), 맑은 날씨에 거창 함양 수승대의 가을 풍경..
거창 수승대(搜勝臺)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로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넓은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이다.
이곳은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와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명승 제53호(2008년12월26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관계로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愁送臺)
라 불렸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승대에는 거북바위를 비롯해 요수정(樂水亭)과 관수루(觀水樓)가 아름다운 계류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변에는 구연서원과 원각사 등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수승대의 하부에는 보가 설치되어 하천의 일정 구간이 못으로 형성되어 있다.
수승대에는 그 명칭이 유래된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관련하여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화답시가 전한다.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거북바위에 새겨진 글 중에서 누구의 장수지대(藏修之臺), 장구지소(杖屨之所)라 한 것은 그가 이 동천의 주인임을 명확히
표시하고자 한 각자라고 한다.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국민관광지인 수승대의 경내에 있는 구연서원(龜淵書院)은 요수 신권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요수(樂水) 신권(愼權 1501~1573)은 석천 임득번의 제자로 임득번의 아들인 갈천 임훈과 함께 지역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들은 남명 조식(1501~1572)과 동시대의 사람들로 남명과 함께 영남학파 중 경상 우도 학파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요수 신권은 학문적 성격과 생활 자세에서 영남지역 사림의 초기 학문과 사상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연서원은 1540년(중종 35년)에 신권이 서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1694년(숙종 20년)에 사림에서 ‘구연서원(龜淵書院)’으로 개칭하여 요수 신권(愼權)과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을 제향하였다.
1808년(순조 8년)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를 추향(追享)했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강당은 1945년 실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음해인 1946년에 원형대로 재축한 것이다.
건물은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 사당,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관수루와 강당, 그리고 사당인 구연사(龜淵祠)를 직렬 배치하여 담장을 둘렀다.
관리사는 강당의 우측에 배치하여 쪽문을 통해 출입하고 있다.
뜰에는 구연서원 사적비가 있고 요수 신권을 기려서 세운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 그리고 황고 신선생 사적비 등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양측면에 각각 1칸씩의 방을 들인 구성이다.
공포는 직절익공의 소로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를 다섯 개 쓴 5량가이다.
사당은 1988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며 겹처마에 박공지붕 형식이다.
문루인 관수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중층의 누각으로 상부는 모두 개방하였고,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상부구조는 도리를 다섯 개 쓴 5량가이다.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 사당,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원의 형식을 갖춘 배치를 보여 주고 있다.
동재와 서재가 생략되었으나 그 자리를 비석들이 대신하고 있다.
1945년 실화로 강당이 전소되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원형 복구하였고 그 형식은 조선시대 건축기범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수루(觀水樓)는 이 구연서원의 문루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2005년1월13일)로 지정되었다.
거창신(愼)씨 요수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으며, 구연서원의 정문에 해당되는 건축물이다.
이 문루는 구연서원 건립 후 반세기 가량 지난 1740년(영조 16년)에 문인 화가로 유명한 조영석(趙榮祏)이 안음현감을 역임할 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구연서원이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 이 건물도 영향을 받았고, 이후 다시
구연서원 건물이 중수될 때 이 문루도 함께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중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ㄷ자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8개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다.
누의 정면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달았으나, 나머지 방향의 공간들은 모두 개방시킨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위층 밑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사방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러 안전에도 대비하였다.
일반 누정 건축물의 경우 보편적인 기법으로 기둥들을 대부분 쪽 곧은 재목을 사용하는데, 이 누정은 건축 자체가 자연암반을
활용하면서 하부 기둥으로 구부러진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하는 기법을 적용하였다.
이는 자연과 조화를 제일차적 목적으로 한 듯하고, 때문에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 모양의 커다란 자연바위 대(臺)이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또 수많은 현인들과 은사들이 찾았던 대라 하여 모현대(慕賢臺)라고도 불렀다.
수승대는 옛날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처음에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1543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거창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搜勝)’으로 고친다고 이른 4율시에서 비롯됐다.
바위둘레에는 이황의 옛 글이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요수 신권(愼權)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정자, 요수정(樂水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해 격조 높은 정자건물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승대 계곡은 수량도 풍부하지만 주변은 솔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는 휘감겨 오르는 몸의 곡선과 비늘로 갈라진 껍질이 꿈틀거리는 한 무리의 용들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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