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기행] 변산이 품은 아담한 사찰, 능가산 개암사(開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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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기행] 변산이 품은 아담한 사찰, 능가산 개암사(開巖寺)..

by 정산 돌구름 2018. 9. 12.


[변산기행] 변산이 품은 아담한 사찰, 능가산 개암사(開巖寺)..


 

2018년 9월 11일 요일, 맑은 날씨, 이른 아침 구시포의 아침풍경을 보고 아침식사 후 변산으로 떠난다.

변산이 품은 또 하나의 아담한 사찰, 개암사는 내소사와 함께 변산의 아름다운 절로 이름나 있다.

개암사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곳이기도 하다.


개암사(開巖寺)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로 634년(무왕 35년)묘련()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와 진()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문무왕 16년) (元曉)와 의상(義湘)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원감국사()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전(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청련각(), 남쪽에는 청허루(), 북쪽에는 팔상전(殿), 서쪽에는 응진당

()과 명부전(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년) 폐허가 된 것을 선탄()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 뒤, 1636년(인조 14년) 계호()가, 1658년 밀영()과 혜징()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년) 법천()

·찬견()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西)·석주암()·월정암()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정조 7) 승담(勝潭)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13년 화은()이 선당()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이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주류성()은 백제 유민들이 왕자 부여 풍()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1689년(숙종 5년)에 조성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동종()과 「중건사적기」가 있다.

현재는 보물 제292호인 대웅보전과 응진전, 월성대, 요사채로 단아한 정취를 자아내는 소박한 사찰이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가 있다면 개암사로 들어가는 길은 단풍나무가 지키고 있어 가을에 아름답다.


개암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1963년1월21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허튼층쌓기의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건물에 비하여 상당히 굵은 민흘림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다시 평방()을 놓고 공포를 짜올렸는데, 어간()에는 3구(),

양측 칸에는 2구씩의 공간포를 올린 다포양식이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삼출목으로 초제공·이제공·삼제공 모두에 놓이는 살미첨차(遮)의 끝은 섬약한 앙서(舌)로 되어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주두()로서 다포식주두들이 굽면이 사면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는 것과는 달리 주두 밑면을 둥그스름

하게 다듬고, 쇠서가 놓이는 자리와 양측 윗부분에 연꽃모양을 새겼다.

또다른 특징은 양측 귀공포와 측면공포의 소첨차·대첨차들이 모두 교두형()으로 되어 있으나 어간과 변간()의 공포

첨차들은 모두 밑면을 W자형으로 조각하여 정면의 위계성을 나타내었다는 점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어간 두 기둥선과 맞추어 두 개의 고주()를 세우고 여기에 불벽()을 만들었다.

천장은 종보 위부터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불단 위에는 정자각() 형태로 된 화려한 닫집을 따로 설치하였다.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은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크고 우리나라 전통적 목조각 수법을 적용해 제작되어

전통적 목조각 수법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특히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상호, 사실적이면서 수려한 화관과 의습표현, 아름다운 수인의 자태, 탄력적이며,

생동감 있는 조각기법으로 볼 때 예술의 가치가 뛰어나 문화재로 등록해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웅보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은 1658년(효종 9년)에 제작된 조각으로 추정되는 목조석가모니불좌상, 목조문수보살좌상, 목조

보현보살좌상 등 3점이다.

개암산 응진전(應眞殿)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179호(2000년3월31일)로 나한상 높이 87~96.5㎝이다.

나한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는 1677년(숙종 3년)7월1일 개암사 응진당에 봉안하기 위해 덕희()와 보윤()이 발원하고

화원 경탄(), 준계(), 법학(), 경삼()이 16나한상을 비롯하여 석가삼존상 및 권속을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16나한상은 일반적으로 영산전이나 응진전 등에 봉안되며, 본존 불상 왼쪽에 홀수 번호 나한상이 오른쪽에 짝수 번호 나한상이

벽면을 따라 배치된다. 개암사 응진전 16나한상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을 따르고 있다.

15구의 나한상은 1677년에 조성된 작품이지만, 1구는 근래에 새로 제작된 것이다.

높이가 87~96.5㎝의 중형으로 조선 후기 전형적인 나한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얼굴의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앉아있는 자세

등이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색난, 단응, 마일 등이 만든 나한상과 양식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나한상은 바위 위에 결가부좌하거나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 있고, 양손을 합장하거나 지물을 들고 있는 등 형태가 다양하다.

모두 민머리로 희고 긴 눈썹은 길게 늘어지고 이마에 잔주름이 표현된 노스님과 눈썹과 수염이 듬성듬성한 젊은 수행자의 모습의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결가부좌한 나한상은 경전, 염주, 사자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다만 한 다리를 세우고 양손으로 깍지를 낀 자세와 작대기로 코를 들어 올린 자세 및 싸움을 하듯 손매를 걷어 올린 자세 등은

다른 사찰의 나한상에서는 볼 수 없다.

장삼 위에 걸친 붉은 색의 가사를 끈으로 묶어 가슴부터 하반신까지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가사와 장삼의 옷깃에는 화려한 꽃문양이 묘사되었는데, 근래 들어 나한상에 색을 다시 칠해 오래된 느낌이 사라졌다.

한편 수화승으로 참여한 경탄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이다.

경탄이 수화승으로 만든 불상은 대구 달성 소재사 석조석가여래좌상(1673년), 부안 개암사 나한상(1677년) 등이다.

개암사 나한상 제작에 함께 참여한 준계, 법학, 경삼이 다른 불상을 제작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기년명() 나한상보다 인상 표현이나 자유로운 자세 등 미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개암사에 소장되어 있는 청림리 석불좌상(靑林里石佛坐像)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123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되어 있다.

파손되었던 목과 코를 시멘트로 복원하였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이 정교한 지장보살상()이다.

독립된 대형의 석불로서는 매우 드문 귀중한 유례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양손을 복부에 놓고 엄지를 곧게 펴서 맞대어 보주, 곧 여의주를 감싸 쥔 전형적인 두건 지장보살상이다.

두건은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두른 뒤 끈으로 묶지 않고 곧장 귀 뒤로 하여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두건 자락은 왼쪽 어깨에는 곧게 표현된 반면 오른쪽 어깨에서는 한 번 접혀져 물결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목 뒤에서는 단정한 타원형을 그린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복스런 모습이다. 그리고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작은 입을 살짝 다물어 동안()을 연상시킨다.

둥근 얼굴 모습과 어울려 신체 역시 예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둥근 맛이 강하다. 몸의 굴곡이 완연한 신체 조형과 적절한

신체 비례는 자칫 위축되기 쉬운 집보주상의 조형적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실적으로 조각한 오른발을 드러내며 가부좌한 너비가 넓은 하체와 몸 중앙에서 모은 수인과 조화롭게 구성된 양팔이다.

가사는 통견()이며 수직으로 넓게 트인 가슴 사이로 직선적으로 표현된 내의()의 끝 자락과 그 아래로 나비매듭으로

군의()를 묶은 허리띠 매듭이 단정하게 조각되었다.

상의 뒷면에는 양어깨 뒤로 넘긴 가사 자락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된 삼단 대좌이다.

상대와 하대석은 볼륨이 강한 복판() 연꽃이 조각된 팔각 연화좌이지만 중대석은 고려시대의 부도나 석등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고복형()인 점이 흥미롭다.

잘 알려져 있듯이 두건 지장은 서역의 투르판(Turfan)과 중국의 변경 지역( 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주로 발견되는 특이한

지장보살의 도상()이다.

그러나 회화가 아닌 조각으로서의 두건 지장보살상이 특히 전라북도 지역에 많이 유존하고 있는 사실(의 금동지장보살상

2구 및 약사전의 석조지장보살상 등)은 이 지역 특유의 신앙 형태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이 있었던 곳은 신청림사() 터로 알려진 곳이다.

주변에 기와 편이 흩어져 있으며 여기서 출토된 고려시대 동종 1구가 현재 내소사()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