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43호, 서산 상왕산 개심사(開心寺)..
2018년 9월 2일 일요일, 해질녘 서산 개심사를 찾아서..
개심사(開心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백제 의자왕 14년(654년) 혜감(慧鑑)이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 하였다.
1350년(충숙왕 2년) 처능(處能)이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1475년(성종 6년)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 16년)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大雄殿)을 비롯, 충남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冥府殿), 충남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심검당(尋劍堂), 무량수각(無量壽閣)·안양루(安養樓)·팔상전(八相殿)·객실·요사채 등이 있다.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초기의
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명부전과 팔상전 등은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남북자오선(子午線)의 주축이 되는 일반적 가람배치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건축양식은 다포계(多包系)·주심포계(柱心包系)·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당우 가운데 대웅전은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한 건물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심검당은 그 남쪽으로 ㄴ자형의 다른 요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주심포계양식의 건물로서
그 형태가 단아하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무량수각은 자연석 초석 위에 원주의 기둥을 사용하였고, 포작(包作)은 익공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양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명부전은 무량수각 동편에 위치하며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風板)이 있는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명부전 내부에는 철불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도의 영험이 신통하다 하여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팔상전은 명부전 북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밖의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청동 향로가 있다.
이 절에서 개판된 장경으로는 1580년(선조 13년) 개판된 『도가논변모자리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과 1584년에 개판된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법화경』 등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 안양루를 에워싼 중정(中庭)은 사방 20여 미터 내외의 정방형으로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하며, 그 옆으로 명부전과 해우소·종각·산신각·연못이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보물 제143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개심사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654년(의자왕 14년)에 창건,
1484년(성종 15년)에 중창되었다. 구조는 다포(多包) 계통과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기법을 혼합한 절충식이다.
건물의 전후면에서 보면 처마 밑의 공포(栱包)는 다포집 계통이며 외부는 2출목(出目), 내부는 3출목으로 공간포(空間包)는 기둥
사이마다 2개씩 배치하였다.
외부 공포의 첨차 끝에 달린 쇠서는 2개의 앙설(仰舌)뿐이며, 건물의 옆면은 다포집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맞배지붕 형식으로
중앙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도록 하였다.
건축 내부에는 옥내주를 세우지 않고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에 걸쳤으며, 그 위로 지붕 밑의 가구재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종량 즉 마룻도리를 받친 대공(臺工)들은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며, 마루대공 좌우에 첨가된 소슬도 주심포집에서만
볼 수 있는 재료이다.
결국 이 건축은 옆면에 고주 2개를 세워서 처리하는 방법 및 옥개의 가구방식은 주심포집 계통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기본적인 구성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집 건물인 무위사(無爲寺) 극락전과 비슷하다.
1941년 해체·중수 공사를 하였을 때, 중앙 마룻도리를 받친 장여에서 “成化二十年甲辰六月二十日瑞山地象山開心重創…”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성화 20년은 조선 성종 15년(1484년)에 해당한다.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은 보물 제1619호(2009년10월20일)로 지정된 고려시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고려시대에 널리 성행했던 아미타신앙을 보여주는 예로서 현존하는 고려시대 목조불상 가운데 그 조성시기가 상당히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로 앉아 있고 어깨는 몸에 비해 좁고 둥글게 처졌으며 두 손으로는 설법인을 결하고 있다.
머리에는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계주(中髻珠)가 표현되어 있으며 머리와 육계(肉髻)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얼굴은 반듯한 이마와 반쯤 뜬 두 눈, 우뚝한 콧날과 뚜렷한 인중, 부드러운 입술, 살이 적당한 뺨 등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여주며, 불상의 눈동자에는 수정을 박아 넣었다.
아직까지 아미타불상의 복장(腹藏) 유물이 조사되지 않아 조성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불상의
바닥에 뚫려 있는 복장 구멍을 막은 봉함목의 안쪽에 지원(至元) 17년(1280년)의 개금묵서명이 있어 중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묵서명은 이미 지워져서 보이지 않거나 판독되지 않는 글자도 있으나, “지원십칠년경진십일월(至元十七年庚辰十一月)
십사일별립승재색(十四日別立僧齋色) 수보개심사당주(修補開心社堂主)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법회(法回) 김▣백□(金□白□)
내시시흥위위장사송(內侍試興威衛長史宋□) □□□내시별잡□박□(□□□內侍別雜□朴□)”로 읽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이 아미타불좌상이 충렬왕 6년인 1280년에 보수되었고 개심사 금당의 주존(主尊)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사(佛事)의 주체는 승재색(僧齋色)이라는 임시로 설치된 기관으로 경전의 간행, 사찰의 중수, 불상의 개금과 보수, 불교 재의
(齋儀) 등을 담당하던 관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개심사 아미타여래상의 보수를 담당하였던 인물은 내시(內侍)이자 중앙
군단 흥위위(興威衛)의 장사(長史)라는 직위를 가진 송씨(宋氏) 성(姓)의 인물과 그 휘하의 무관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심검당은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심검당의 건축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조선 성종실록에 1475년(성종 6년) 6월에 충청도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가야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어 개심사 건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1484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1914년 대웅전 건물을 해체 보수할 당시에 마루 도리 속에서 성종 15년(1484년)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심검당 건물도 이때에 같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심사의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 건물을 배치하였다. 심검당 건축양식은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 위에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계 양식이다.
가구(架構)는 5량이고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雲刻)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심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건물 전체 면적은 111.4㎡인데 심검당이 63.2㎡, 덧집이 48.2㎡이다.
개심사 전각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물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해탈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비끼어 보이는 건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이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과 부재로 삼아 조선 건축에서 보이는 자연미를 한껏 간직하고 있다.
툇마루가 붙어 있는 심검당의 공포는 주심포 구조로, 쇠서(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가 상당히 날카롭고 강직해 조선 초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 3중창했고 영조 때까지 6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되어 있으니 이 절집
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둥 사이의 길이와 기둥 높이의 비례가 3.5 대 1로 평활(平闊)한 구성을 보이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충청도 지역
가옥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청을 하지 않아 깊은 맛이 오히려 좋다.
심검당에 이어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살려 부재로 삼은 건축은 심검당의 부엌으로, 후대에 지어 이은 것이다.
개심사 심검당은 전남 승주 송광사(松廣寺)의 하사당(下舍堂), 경북 경산 환성사(環城寺)의 심검당과 함께 조선 초 요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들이다.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은 충남문화재자료 제194호(1984년5월17일)로 지정되었다.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1889년(고종 26년)에 죽포(竹圃) 김설제(金說濟)가 작성한 개심사중창수리기에 1646년(인조 24년)에 신축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측면 각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翼工系)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 위에 익공형 화반(花盤)을 얹고 화반 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종량(宗樑)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 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건물 안쪽은 천장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이 없어서 넓어 보이는 공간에 천불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十王像)을 모시고 있다.
개심사 범종각(梵鐘閣)은 장방형 연못의 돌다리를 건너 개심사 경내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다.
조형미가 뛰어난 2층 종루(鐘樓)로, 아래층은 콘크리트로 지었고, 위층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목조구조로 조성되었다.
자연 그대로의 휘어진 둥근 나무 기둥이 겹처마와 사모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난간이 둘러져 있다.
범종(梵鐘)은 위층에 매달려 있으며 범종 바로 아래쪽 바닥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을 통해 범종 소리가 지하세계의 중생에게도 울려 퍼지게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심사 안양루(安養樓)는 불교의 의식법구인 법고와 목어·운판이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대웅보전 맞은편에 있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세계’라는 뜻이다.
정면 5칸·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정이다.
안양루 정면에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譯)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개심사 무량수각(無量壽閣)은 대웅전의 전면 좌측에 자리하며, 심검당과 마주 보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총 18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이며, 창방 위로는 각 칸에 화반(花盤)을 놓아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공포(栱包)는 전면에만 두었는데
이익공(二翼工) 형식으로, 초익공(初翼工)은 앙서 위에 연화를 새기고 이익공은 수서 형태로 위아래에 연봉을 새겼다.
내부 천장은 반자 위에 종이 바름으로 하였다.
「개심사사적기(開心寺事蹟記)」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년)에 모든 전각을 중수하였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1981년 보수하였으며, 원래 전각의 이름이 무량수전이었는데 요사채로 쓰이면서 무량수각으로 바뀐 것 같다.
현재 요사채로 쓰이고 있으며, 큰 방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전면의 각 기둥에 『나옹집(懶翁集)』 답매씨서(答妹氏書)의 내용을 적은 주련이 걸려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과 관련된 전각은 보통 ‘전(殿)’자를 붙이는데, 개심사 무량수각은 ‘각(閣)’자를 붙인 점이 특징적이다.
기둥에 달린 주련에는 아미타불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염하면서 수행의 지표로 삼으면 아미타극락정토에 귀의하게 된다는
나옹선사의 글귀가 적혀 있다.
돌계단을 다 올라 흙길을 조금 걸으면 긴 직사각형의 개심사 연못이 나온다.
이 연못은 인공연못으로 상왕산의 모양이 코끼리의 형국이라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개심사가 있는 상왕산(象王山)의 이름 자체가 ’코끼리왕의 산’이란 뜻이니 코끼리와 무슨 관계가 있긴 한 것 같다.
연못 서쪽으로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연못 가운데로는 통나무다리가 하나 있어 빼어난 운치를 느끼게 한다.
연못을 지나면 범종각 뒤로 안양루가 있다.
개심사 오층석탑은 대웅전의 앞마당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심사를 중수한 1350년(충정왕 2)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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