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기행] 사적 제316호,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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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기행] 사적 제316호,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by 정산 돌구름 2018. 9. 5.


사적 제316,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2018년 9월 2일 일요일, 서산 아라메길에서 만난 사적 제316호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시대 절터로 사적 제316(1987718)로 지정되었다.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2886로 일대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상왕산(象王山 307.1m) 서남쪽 계곡 보원마을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石槽 보물 제102), 당간지주(보물 제103), 오층석탑(보물 제104),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어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1968년 절터에서 높이 9.5의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과 높이 7.5의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충남 서산 보원사지의 금당 터 앞에 있는 오층석탑(五層石塔)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104(1963121)로 지정되었다.

이중기단 위에 오층탑신을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지만 부분적으로 통일신라 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이중으로 조성하였는데 하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새기고

두 개의 면석에는 각기 사자상(獅子像)을 돋을새김 하였다.

하대 갑석 상면에는 낮게 형성된 호형·각형의 2단 굄대가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에는 우주 및 탱주를 모각하고, 탱주를 중심으로 그 좌우엔 각각 2구씩, 8구의 팔부중상(八部衆像)이 돋을새김 하였다.

상대 갑석은 평평하며 면에는 매우 얕은 갑석 부연을 표시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굄대를 각출하지 않고 넓은 1단의 판석을 끼워 탑신부의 옥신을 받치고 있어 고려시대 굄석삽입양식을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탑신부에서 몸돌(옥신석)1층만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으나 나머지 층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모서리마다 우주를 조각하였다.

1층 몸돌에는 문짝 모양(門扉形)을 새겼다.

1·2층 지붕돌(옥개석)은 여러 장의 돌로 조성하였으나 3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의 층급 받침은 각기 4단씩 조각되었으며, 꼭대기에는 얕은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얇고 넓게 퍼져서 백제 탑 양식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받침부는 고려시대 식이다. 낙수면은 완만한

곡선을 보이고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뚜렷하여 전제적으로 경쾌하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 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고, 그 위로 노반의 무게 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간(刹竿)이 솟아 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환되는 과정의 탑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팔부중상을 새긴 것이 특징적이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름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서산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절터에는 5층석탑 외에,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12년 계획으로 보원사지 오층석탑 일대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서산 보원사지의 초창기 건축이나 석탑의 건립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탑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았을 때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사찰의 주 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산 보원사지의 창건

연대와 탑의 건립 시기는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1968년과 2003년에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번의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8년 해체 복원 당시 사리 내갑(內匣외갑·사리병·납석소탑(蠟石小塔) 등이 출토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石槽)는 보물 제102(1963121)로 지정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의류가 생겨나고 균열이 나서 2005년 지의류를 제거하고 균열 부분을 접합하여 보수하였다.

보원사지 석조(石槽)는 보원사가 가장 융성하였던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찰에서 물을 담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2거리의 보원사지 내에 자리한다.

서산 보원사지 사역의 초입에 있는 당간 지주(幢竿支柱)에서 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위치한다.

하나의 큰 화강암을 파내어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석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현존하는 석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물로서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길이 3.5m, 너비 90, 높이 65의 장방형으로 내부에는 물을 담을 수 있도록 파내었고, 배수를 위한 8정도의 구멍이 장축의

한쪽 부분에 치우쳐 뚫려 있다.

바닥 면은 얕은 경사를 두어 배수구로 물을 빼도록 고안되었고, 땅속에 묻혀 있는 부분에는 거칠게 정을 쪼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는 조각 수법이 간결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유물로 통일 신라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중에서 가장 큰 유물이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103(1963121)로, 높이 4.2m70정도 폭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그 바깥면에는 가운데 2조의 단면 호형(弧形) 돌선을 세로로 양각하고 양측 주연(周緣)

따라 넓은 종대를 양각하였다. 앞면과 뒷면에도 면의 주연에 종대를 양각하였는데 전체 형태가 상당히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지주의 형태는 4면에 넓은 홈을 얕게 파서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지주 상단부 바깥 끝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거대한 크기에도

부드럽게 보이도록 조각하였다.

간주를 받치는 간대(竿臺)는 지주의 치석 부분보다 1단을 올려 방형의 대좌(臺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원좌(圓座)를 양각시켰다.

원좌는 얕은 2단으로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면의 간주를 받치는 자리를 깊이 15정도로 파서 끼워 고정하도록 되어

있는데, 다른 것과 비교할 때 깊이가 깊은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간대를 옆에서 보면 윗면에서 20정도 아래까지 치석이 되어 턱을 이루고 있는데 원래의 기단부는 치석된 아랫부분에 끼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주의 마주 보는 안쪽에는 방형의 홈을 중앙에 팠고, 그 아래에는 대석 상면에서 60위쪽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원사지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의 기단부가 없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단부 아래로 묻혔던 덜 가공된 지주 부분이 솟아 드러나 화강암으로 새로이 보강하였다.

보원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내로 들어가는 진입 공간에 배치되었는데, 경내는 작은 개울을 건너 들어가도록 하였다.

사찰의 진입 공간과 중심 공간이 물로 나누어져 있어 마치 사바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개울이 구분하고 있는 듯하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에 배치되어 경계나 위상을 표시하는 기능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를 당간(幢竿)

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고 한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각면을 고르게 다듬었을 뿐 아니라, 정연하고 세련된 치석 수법을 보인다.

또한 지주부는 너비와 폭이 전체 높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아 날렵한 인상을 주고 있다.

기단이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정연한 결구 수법으로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발달된 형태와 정연하고 장식적인 양식 수법을 보이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에는 보원사(普願寺)에 서있던 당간지주와 관련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을 중정(中庭)에 세우고 범패(梵旆)를 그 위에 걸어 두니, 바람에 흔들리고 태양에 빛나며 휘날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당간 지주가 지금과 같이 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화려한 장엄물들이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인국사(法印國師)가 하산하면서 그 일행이 보원사에 도착하자 번개(幡蓋)가 구름처럼 날렸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가 세워지기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은 보물 제105(1963121)로 고려시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의 유골을 모신 승탑으로

높이 4.7m이다. 탄문(坦文 900975)이 입적한 975(광종 26)과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가 건립된 978

(경종 3)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탑비와 함께 부도전(浮屠殿)에 자리하고 있다.

승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의 단면이 8각으로,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따르고 있다.

바닥돌은 4장의 널돌로 이루어졌는데, 윗면은 별다른 시설이 없이 아래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아래받침돌은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성되었다. 아랫단은 옆면의 각 면마다 1구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는데, 안상 안에는 각각

모습을 달리한 사자상(獅子像)1구씩 돋을새김되어 있다.

윗단의 윗부분에는 1줄의 띠를 둘러 덮개돌 모양을 새겼고, 아래부분에도 역시 1줄의 띠가 굽을 이루며 둘러져 있다.

다른 돌로 조성된 윗단은 아래부분에 굽을 돌려 굄대를 두었고, 옆면에는 구름 무늬와 용 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용머리의 부리부리한 눈과 코, , 그리고 몸통의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8각의 모서리에는 귀꽃 장식이 서있는 모양

으로 자리하고 있다. 윗면에는 각지고 둥글면서 다시 각진 3단의 굄이 마련되어 가운데받침돌을 받고 있다.

하나의 돌로 조성된 가운데 받침돌은 높직한 간주(竿柱) 모양인데, 8각의 각 면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윗받침돌 역시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맨 아래부분에는 가운데받침돌의 굄과 대칭이 되도록 3단의 낮은 받침을 새겨 놓았고,

그 바깥쪽으로는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8각의 옆면에 빙 둘러 새겨져 있다.

맨 윗부분은 1줄의 띠를 둘러 덮개돌 모양을 만들고서 그 위로 높직한 굄대를두었는데, 8각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와 함께 동자주를 잇는 난간을 새겼고, 그 사이에는 꽃 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굄대의 맨 윗부분에도 1줄의 띠를 돌려 덮개돌 모양으로 조각하고서 낮은 2단의 굄을 새겨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몸돌은 가운데받침돌처럼 제법 높은 편이다.

각 면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8면 전체에는 문비(門扉), 사천왕상, 서 있는 인물상 등이 돋을새김되었다.

지붕돌은 크고 넓으면서 두꺼운 편인데, 추녀에 이르면 점차 얇아진다.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그 바깥쪽으로는 목조 건물의 지붕을 모방하듯이 서까래를 조각해 놓았다.

윗면인 낙수면의 경사는 꼭대기부분만 급할 뿐,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완만해졌다.

기왓골의 표시는 없지만 각 모서리의 합각(合角) 머리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굵으면서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전각(轉角)에는 서 있는 모양의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지붕돌의 맨 윗부분에는 1장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를 8면에 돌려 새겼고, 그 위에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올렸다. 상륜부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복발에도 역시 하나의 꽃잎이 아래로 놓인

복련의 큼직한 연꽃 무늬 8개가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은 각각의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가운데받침돌이 지나치게 높고 몸돌마저 높아서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잃은 듯하지만, 지붕돌 각 모서리의 귀꽃과 반전 등으로

둔중함은 면하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 몸돌의 조각 수법은 우수하지만 부분적으로 약화된 경향도 나타나 있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는 보물 제106(1963121)로 지정되었으며, 보원사지 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비면의 왼쪽 하단에 약간 탈락된 부분이 있지만 보존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다.

978(경종 3) 건립되었으며 전체높이 450, 비신높이 240, 너비 116.5, 두께 29이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거비로 이수와 귀부의 조각은 대체로 장쾌한 수법이다.

이수의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법인국사 탄문(坦文)은 신라말·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 왕은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한림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사천대박사 한윤(韓允)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비문을 쓴 뒤 김승렴(金承廉)

글씨를 새겼다.

비신에는 폭 2.3의 세로 행간을 치고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구양순류 해서로 필력과 짜임새가 구양순을 재현시킨 듯하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탄문(900~975)은 자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씨(高氏), 광주(廣州) 고봉(高熢) 사람이다.

15세 때 장의산사(莊義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고려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신명순성왕태후가 임신하였을 때 축수하여 광종이 태어났다.

968(광종 19)에 왕사로 책봉되고 975년에 국사로 봉해짐으로써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호불 군주이며 개혁 군주였던 광종의

종교적·사상적 배후 역할을 담당하였다.

탄문은 서산 보원사의 중창에 기여하였으며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 사상을 융합하려고 힘썼다.

서산 보원사가 화엄 10찰의 하나로 꼽힌 것은 탄문의 영향력과 관계가 깊은데, 이에 관련하여 975년 탄문이 보원사에 돌아올 때

교종과 선종 승려 1,000여 명이 그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탄문은 보원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이에 보원사에 탄문의 승탑(부도)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이 조성되고 그 옆에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가 건립되었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법인국사의 입적 3년 뒤인 978(경종 3)이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는 전체적으로 대형의 대석(臺石) 위에 거북 모양의 비좌를 놓고 이수를 갖춘 비신을 세운 형태이다.

국사의 비인만큼 통일신라시대의 발달된 조각 예술이 반영되어 귀부와 이수 모두 예술적 섬세함을 보여 준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비문 내용은 법인국사 탄문의 출가 과정, 태조와 광종 등 역대 고려 임금들과의 특별한 인연, 보원사와

관계 등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국사를 칭송하는 비명(碑銘)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