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기행]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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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기행]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by 정산 돌구름 2018. 3. 18.

도선국사가 창건한 영암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2018년 3월 17일, 월출산 산행을 마치고 둘러본 월출산 도갑사..

 

도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1456(세조 2년)과 1457(세조 3)에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뒤 1473(성종 4)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776(영조 52)에 다시 중수하였다.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 암자가 12, 승려가 730명에 이르는 큰 절이었으나 6·25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불탔다.

부속암자로 상동암(上東庵하동암·남암(南庵서부도암(西浮屠庵동부도암·미륵암(彌勒庵비전암(碑殿庵봉선암(鳳仙庵

대적암(大寂癌상견암(上見庵중견암·하견암 등이 있었다.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점차 옛 전각에 대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명부전·미륵전·국사전·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도갑사 일원은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79(1984229)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은 1473(성종 4)에 중건하였으며, 좌우에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현존하고 있는 건물 중 보기 드문 옛 건축물이다.

, 미륵전 안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도갑사소장 동자상이 있다.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과 뒤에는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5층석탑 및 3층석탑 등 고려시대의 석탑 2기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도선·수미의 비가 있다.

이 중 도선·수미비는 비문에 의하면 1636(인조 14)에 건립을 시작하여 1653(효종 4)에 완성한 것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하여 주목을 끈다.

또한,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된 수미왕사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석조(石槽)가 있다.

이밖에 대웅보전, 명부전, 팔각석등대석,석제, 구유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도선 및 수미대사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주위에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九井峰)9개 우물,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슬퍼한 제자들이 왕인이 공부하던 동굴입구에 새겼다는

왕인박사상 등이 있다.

 

 

월출산 도갑사 입구의 팽나무 보호수..

수령 500년을 넘긴 당산나무이다..

 

 

 

도갑사 전각 배치도..

 

도갑사 일주문, 전면은 월출산 도갑사..

 

뒷면에는 ‘국중제일선종대찰(國中第一禪宗大刹)’ 현판과 ‘덕헤문(德海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도갑사 매표소..

 

국보 제50(19621220)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解脫門)..

1960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신미·수미 두스님의 발원으로 조선성종 4년(1473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정면 3, 옆면 2,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이다.

석조기단(石造基壇) 위에 선 규모가 작은 문으로, 중앙 칸은 통로로 되어 있다..

 

구조는 약한 배흘림을 지닌 둥근기둥 위에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栱包)를 올렸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올렸다.

보 끝은 외목(外目)도리를 받고, 대들보의 양단(兩端) 근처에 마루보 끝을 받치는 포대공(包臺工)의 첨차(檐遮)가 바로

우미량(牛眉樑)이 되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둥 위의 대들보에서 받아 이것이 주심(柱心)도리를 받친다.

마루보 중앙에는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으며, 마루도리 앞뒤에서 약한 반곡(反曲)을 지닌 소슬합장

(合掌)이 역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이 문의 특이한 점은 공포가 구조적으로는 고출목 같으나 형태는 출목으로 보이고, 또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지탱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된 점이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이, 또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유구(遺構)로서

흥미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좌우 전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안치하였다.

보통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있다.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고 한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다.

이는 이들이 단순히 힘센 이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통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어 소리를 내는 모습을 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다.

흔히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하는데,

이때의 는 범어의 첫째 글자이고, ‘은 끝 글자이다.

그리고 상의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어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 등을 취하기도 한다..

 

도갑사 목조 문수·보현동자상(木造 文殊·普賢童子像)..

뒤쪽 좌우 칸에 2구의 목조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보물 제1134(1992728)로 지정되었다.

해탈문의 뒤쪽 좌우 칸에 봉안되어 있으며,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다.

이들 동자상을 봉안한 해탈문은 1473(성종4)에 건립되었으며, 동자상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문수(騎獅文殊)동자상은 높이 178cm, 목재에 채색하였으며, 동자가 사자 등에 앉은 모습이다.

사자는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반듯하게 선 자세이며, 동자상은 사자의 몸통 한쪽 등에만 두 다리를 나란히 모아서 앉았다.

동자는 쌍계머리에 머리를 묶은 치레가 화려하고 이목구비도 원만하며,

옷차림도 화려한데 상의는 앞가슴이 U자형으로 크게 터졌고 소맷부리는 넓은 편이다..

 

기상보현(騎像普賢)동자장은 높이 178cm, 목재에 채색하였으며, 크기와 얼굴 모습 등 문수동자상과 거의 같다.

다만, 옷차림에서 약간 차이가 있으나 문수동자상보다는 덜 화려한 편이다.

두 동자상은 매우 드문 기사(騎獅기상(騎像)의 독특한 도상(圖像)으로 목조상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해탈문의 후면 현판..

 

 

우측의 범종각..

 

해탈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광제루(廣濟樓)..

2012년10월13일 현판제막식을 가졌다.. 

 

 

대웅전 앞 도갑사 오층석탑(五層石塔)..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1(198761)로 지정되었다가 2005613일 보물 제1433호로 승격되었다..

 

이 석탑은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었고 상륜부(相輪部)에 노반(露盤)이 있고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얹었다.

탑의 기단부 지대석은 지하에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단층 기단인 듯하다.

기단 면석은 4개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귀기둥과 지주 1주씩을 모각하였으며, 2개의 판석으로 된 기단 갑석은 두꺼운 편이다.

밑면은 부연 없이 수평으로 처리하였고, 윗면은 중앙에 오르면서 가벼운 경사를 이루고 1단의 원호(圓弧) 괴임대를 나타냈다.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꾸몄는데, 기단부에서처럼 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엇물림으로 짰다.

탑신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높이를 줄였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서서히 체감되었다.

1층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매우 두꺼운 편이며, 낙수면의 물매도 급한 편이고 전각(轉角)도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의 밑면은 5단의 층급 받침을 갖추고 있으나 간격이 매우 좁고, 옥개석 상면 중앙에 역시 1단의 탑신괴임대를 갖추었다.

2층부터는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고 층급받침은 4층부터 점차 축소되고 있다.

탑의 조성 양식으로 보아 지역적 특색을 살린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갑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원래 조선시대 건축물로 1974924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9771020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한국전쟁에도 소실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였으나 1977년 참배객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전소되었다.

바로 중창불사를 하여 1981년 복원하였으나 추녀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2004년 복원불사를 시작하였다.

4년간의 공사로 2009년 지금의 건물을 완공하였다.

기존의 1층 건물에서 고증에 따라 2층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조선초기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면 5칸에 측면 4, 바닥 면적이 250인 이 대웅보전은 외부 중층에 내부 통층, 온칸몰림 방식으로 팔작지붕을 얹었고

홍송으로 삼존불을 조성했다.

대웅보전 복원을 위해 전남도와 영암군에서 약24억원을 지원하였고, 낙성식과 함께 삼존불 점안법회를 봉행하였다..

 

 

대웅보전의 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홍송으로 된 삼존불의 높이는 약 4m에 달하며, 후불탱화도 홍송으로 만들었는데 높이가 6m에 이른다.

2009년 4월 11일, 대웅보전 낙성 및 삼존불 점안식을 거행하였다.

 

국사전(國師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모시고 있다.

도선국사 진영(眞影)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76(1990125)로 지정된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의 초상화이다.

광양 옥룡사의 징성혜등탑비(澄聖慧燈塔碑)의 비문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영암 출신이라 한다.

그리고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하여 846년 동리산 태안사의 혜철을 찾아가 크게 깨우쳤다.

그 후 광양 옥룡사에 머물렀으며, 이름을 널리 떨쳐 헌강왕이 초청하여 법문을 들을 정도였다.

태안사에서 72세로 입적하니 왕이 그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사전(寺傳)에 의하면 도선국사의 초상화는 1256(세조 2)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의 발원에 의하여 제작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이 작품은 후에 이모(移模)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형식은 오른쪽을 향하여 3/4분면의 모습을 취하고 왼손에 주장자(拄杖子 선사들이 좌선할 때나 설법할 때에 가지는

지팡이)를 들고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승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도선국사는 녹색의 가사를 입고 겉에 붉은 장삼을 걸치고 앞을 향해 조용히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스님의 모습은 세필로 온화한 승려의 분위기를 잘 전해 주고 있다.

오른쪽 어깨 위에는 가사 자락을 묶은 금구 장식이 묘사되었으며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 의자의 발걸이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의자를 잡고 있는 오른쪽 손이 매우 어색하게 처리되어 형식화된 면을 보여 준다.

의자 밑에는 화문석의 돗자리 문양이 묘사되었다.

이처럼 초상화나 진영에 화문석의 문양이 묘사되는 것은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 많이 사용되던 수법이다.

이 진영은 도갑사에 함께 전해 오는 수미왕사 진영(전남도유형문화재 제177)과 인물 표현, 구도, 기법 등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탕색은 옅은 황색으로 처리하고 녹색과 적색 및 고동색 등이 간단하게 설채(設彩)되었다.

의자 등판의 잔잔한 꽃무늬와 화문석의 잔잔한 문양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화면의 왼쪽(향우)에는 적색의 화기(畵記)란을 만들어 도선국사진영(道詵國師眞影)’이라고 명기하였다.

제작 연대는 1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심검당(尋劍堂),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검(劍)은 마지막 무명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사찰 내에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는 적묵당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순수한 수행처이므로 외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미소당(微笑堂)은 승방(僧房)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층석탑과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불교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토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죽은 자가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지옥왕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소상(小祥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를 모시게 된다.

이 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게 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빌려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 녹사(錄事) 2,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높이 89.3cm, 무릎 폭 70cm 규모로 너무 작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규모이다.

얼굴은 방형으로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슴부터 배까지 영락장식을 표현하였다..

 

지장보살 좌우에 시립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또한 조선후기에 목조로 조성한 것으로

무독귀왕은 높이가 135.8cm, 어깨폭이 30.1cm이고, 도명존자는 높이 108.8cm, 어깨폭 34.4cm이다.

목조 시왕상도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높이가 150~160cm, 어깨폭이 30~38cm 규모이다.

귀왕, 판관, 동자, 인왕상도 같은 시기에 목조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갑사 천불전(千佛殿)..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화재로 대웅보전이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1981년 복원하여

대웅보전으로 사용하다가 새롭게 대웅보전을 지어 지금은 천불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불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존불을 모셨다..

 

천불전(千佛殿)은 삼천불전(三千佛殿), 만불전(萬佛殿)이라고도 한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삼신불과 삼세불·천불·삼천불 등 다불(多佛)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는데 본래 천불에는 과거천불·현재천불·미래천불이 있다.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過去 莊嚴劫千佛), 현재 현겁천불(現在賢劫千佛), 미래 성수겁천불(未來星宿劫千佛 )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천불을 모신다.

현겁(賢劫)은 불교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

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과거칠불을 포함한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산신각(山神閣)..

 

산신탱이 모셔져 있다..

 

삼층석탑과 대웅보전..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중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갖춘 탑으로 전체높이 약265cm이다.

기단부는 여러 매의 장대석을 깔아 지대석을 삼았고 그 위에 이중 기단을 올렸다.

하층기단은 1매석으로 조성했는데, 중석의 각 면에 3구씩 안산을 새겼고, 갑석은 마모가 심하다.

옥개석은 3개 층 모두 전각부가 거의 파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급받침은 1,2층은 3단이고 3층은 관찰이 어렵다.

상륜부에는 중간에 돋울대를 돌린 노반과 보륜으로 보이는 부재가 남아있다..

 

용화문을 지나 들어서면 미륵전..

 

미륵전(彌勒殿)은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도 한다.

 

미륵전에는 미륵불이나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을 모시는데 한국에서는 미륵불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이는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내세 신앙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협시불로는 법화림보살(法花林菩薩)과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 또는 묘향보살(妙香菩薩)과 법륜보살(法輪菩薩)을 세운다.

후불탱화로는 흔히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는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 용화세계·도솔천 광경을 묘사한 미륵탱화를 모신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89(1963121)로 지정된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긴 석재에 조각한 불상으로 사각 대좌 위에 안치되었으며 마손이 적어서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 덩어리의 석재를 배 모양으로 다듬고, 다시 불좌상을 새겼다.

광배와 불상이 한 덩어리이며, 대좌는 또 다른 석재를 깎아서 만들었다.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조각으로는 상당히 고부조이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螺髮)을 붙인 불상의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를 높게 표현했다.

신라 하대의 불상에서 육계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만들어진 것과 대조를 이룬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눈썹이 깊고,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귀 쪽으로 길게 파였다.

콧날이 뚜렷하면서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은 신체에 비해 이목구비의 인상을 강해 보이게 한다.

얼굴에 비하여 신체는 입체감이 없고, 허리가 긴 상체는 평면적으로 처리되었으며, 가슴과 배의 구분이 없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 폭이 넓고 안정감이 있으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팔은 길고, 편안하게 다리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며, 특히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신체는 균형 잡힌 비례를 보여주고 있으나, 세부는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옷을 걸쳐 입은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이다.

옷은 투박하고 간략하게 표현되었고, 기계적이고 뻣뻣한 몇 가닥의 옷 주름이 얕은 선각으로 새겨졌다.

그나마 배 아래로는 더욱 소략하고 성의 없이 처리되어 가슴 윗부분을 중심으로 만든 조각임을 알 수 있다.

갸름한 타원형의 광배 둘레에는 매우 낮은 부조로 불꽃무늬를 나타내고,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제일 윗부분에 세 구의 작은 부처(化佛)를 조각했다. 반면 대좌는 아무런 장식도 새기지 않은 소박한 것이다..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사각의 낮은 대좌는 고려 전기 조각에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은 항마촉지인의 불상이지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투박하고 소략한 세부묘사,

높이 솟은 육계, 좁고 길쭉한 배 모양의 광배는 고려 초기 석불의 특징이다.

3m에 이르는 대형의 석상이라는 점과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사각형의 대좌 역시 고려 전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도갑사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

 

도선국사와 도갑사를 중창한 조선시대 수미왕사를 추모하는 비로써 보물 제1395(2004126)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비의 뒷면에 새긴 음기(陰記)에 따르면,

건립 동기는 옛날의 비가 마모되어 글자를 알 수 없자 승 옥습(玉習)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발원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건립연대는 1636(인조 14)에 시작하여 1653(효종 4)에 완성하였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가 구비된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17이며,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있다.

머리는 용두가 아닌 거북의 머리 모양이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위에서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어 있고

앞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내었다.

 

귀갑문은 일반적인 6각 문이 아닌 평행 음각선으로 5각에 가까운 갑문을 표현하였으며, 등부분에는 하엽(荷葉 연꽃잎)으로

비좌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조선 1471년에 건립된 원각사비(보물 제3) 등에서 보이는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형식이다.

앞뒷발에는 고기의 비늘과 같은 문양을 새겼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전후 면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고 측면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하고 있는 두 마리 용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되었다.

이수는 한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하단에는 2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로는 구름이 뒤덮힌 가운데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서로 반대방향을 보고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크게 전면의 비문과 후면의 음기로 구분되는데 전면의 비문은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각각 다른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로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제액을

만들었으며, 당시 형조판서인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비의 좌측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이 비문은 총 16714(자경 45)이며, 비제(碑題)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

守眉大禪師碑銘幷序)”이다.

전면 우측의 비문은 총 10512(자경 23)로서 비면 상하를 모두 채운 것이 아니고 비면 중간에서 시작하였다.

찬자는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인 이경석(李景奭)이며, 글씨는 홍문관 제학 오준(吳竣)이 썼다.

좌면의 비문과 음기의 찬자는 각각 홍문관 부수찬 이수인(李壽仁), 홍문관 교리 정두경(鄭斗卿)이다..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국사와 수미선사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선사에 대해서는 천순(天順) 원년(1457)에 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수미선사의 비(王師妙覺和尙碑)20년 전인 1633(인조 1)에 새로 만들어 대웅전 남쪽에 세웠다.

이 비는 이만한 거대한 규모의 비를 만드는 데 18년이 소요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조선 후기 서예와 조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도갑사 부도전(浮屠田), 도선수미비 옆에 있다..

 

대부분이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종형과 팔각원당형이 있는데 그 수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11기의 부도 가운데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은 영백당(靈栢堂)과 서령당(西嶺堂), 무인당(無因堂)의 부도 뿐이다..

 

서령당(西嶺堂)부도..

당호가 새겨진 서령당(西嶺堂) 부도는 종형에 옥개석을 얹은 전체 높이가 약 155cm, 탑신 폭은 약 71cm이다.

대석은 뭉툭한 방형으로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해 원형으로 호형 1단을 괴임을 조식하였다.

탑신은 전체적으로 윗부분이 아래보다 더 넓은 형태이며, 중앙에 서령당(西嶺堂)이라는 당호가 크고 깊게 음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낮고 뭉툭한 상륜부와 함께 조성하였는데 몰매는 약하며 8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상륜부는 얼핏 연꽃문양인 것 같으며, 보주는 조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백당(靈栢堂) 부도는 전체 높이 약206cm, 탑신 폭 약58.8cm로 조선 후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높은 대좌위에 항아리 모양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와 하나의 돌로 조성한 옥개석을 얹었다.

대좌와 탑신, 옥개석의 재질이 모두 다른 것으로 보인다.

방형의 대좌는 위로 올라갈수록 폭을 줄여가며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 단의 높이가 제법 된다.

얼핏 보면 석탑 옥개석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탑신석은 전체적으로 윗부분이 넓은 항아리형인데 하단과 상단을 각각 구획하여 더 넓게 조성한 특이한 모습이다.

하단은 탑신 일체형 괴임, 상단은 옥개석 받침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상당히 높은 편이다.

4각으로 조성한 옥개석 낙수면의 물매는 약한 편이고, 우동은 뚜렷하다.

처마선은 전각부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미미하게 들려있다.

옥개석 일체형인 상륜부는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맨 위의 연꽃봉우리를 연꽃잎이 감싼 모양을 형상화 하였다..

 

무인당(無因堂)의 부도는 소략하고 무성의해 보이는 대석, 돌기둥 모양의 탑신, 좁은 폭의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가 약 164.4cm, 탑신 폭 약 35.2cm로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