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기행] 공산성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事蹟碑)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공주기행] 공산성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事蹟碑)

by 정산 돌구름 2018. 1. 25.

공주 공산성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事蹟碑)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서쪽에 위치한 정자로 충남도문화재자료 제49(1984517) 로 지정되었다.

1624년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이곳 공주까지 내려와 공산성에 피신하고 있었다.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했던 쌍수(雙樹 두그루 나무)에 기대어 이괄의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느티나무 두그루에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벼슬을 명하고

이곳을 쌍수산성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734(영조 10)에 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처음 정자를 지었을 때 당시의 이름은 삼가정(三架亭)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으며, 1903(광무 7)에 다시 정자를 세웠는데 그때 이후 쌍수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

정자 앞에 느티나무 1그루와 말채나무 1그루가 서 있지만 어느 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가 이곳에 머물렀을 당시의 사적을 기록한 비인 ‘쌍수정 사적비’도 남아 있다.

 

<쌍수정사적비(雙樹亭事蹟碑)>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35(197618)1708(숙종 34) 관찰사 이선부(李善溥)가 세운 비석이다.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과 왕의 주필지지(駐畢之地 왕이 잠시 머문 곳)로서의

공산성에 대한 찬양, 그리고 성의 수축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을 받치는 귀부(龜趺)와 비신, 그리고 꼭대기에 큰 보주(寶珠)를 올려놓은 옥개석 모양의 비개(碑蓋)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귀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귀부의 높이는 0.75m이며, 비신의 높이는 1.76m, 너비 0.8m, 두께 0.6m로서 전체 높이는 3.65m이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쓴 것이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 왕궁지 백제연못>

 

 

 

 

 

 

 

<쌍수정사적비와 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