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기행] 일명산(日明山) 연흥사(烟興寺)와 사기봉 마애불좌상..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영광기행] 일명산(日明山) 연흥사(烟興寺)와 사기봉 마애불좌상..

by 정산 돌구름 2017. 4. 8.

일명산 연흥사(烟興寺)와 사기봉 마애불좌상..


2017년 4월 8일 토요일, 군유산 등산길에 들러본 연흥사..

봄기운이 만연한 화창한 날씨에 군유산에서 상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우측에 연흥사가 보인다.

능선이 군계로써 북쪽은 영광군 군남면, 남쪽은 함평군 손불면에 속한다.

연흥사는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 890번지 위치하며, 용암저수지가 있는 용암리에서 계곡을 따라 포장된 소로를 따라 오른다.

일명산(서운산)의 중턱에 자리한 연흥사 앞쪽에는 군유산(403.3m)이 있고 서쪽에 일명산이 있어 산 속에 묻혀 있다.

 

연흥사(烟興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일명산(日明山)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전하는 사적기가 없어 확실한 창건내역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각진국사 복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12701355)는 고려 후기에 수선사(修禪社 송광사)16국사 가운데 제13세 국사이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67(현종 8)에 부운(浮雲)스님이 화주가 되어 중창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창을 하였다고 하며, 최초의 기록은 18세기의 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등에 나타난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석탑으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고려 초에 사찰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목조불상과 불상의 복장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묘법연화경으로 보아 연흥사는 17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창되었다고 본다.

연흥사에는 목조삼존불상을 비롯해 이 불상의 복장물에서 발견된 영광 연흥사 소장 묘법연화경(靈光烟興寺所藏妙法蓮華經

전남유형문화재 제175)과 고려시대의 석탑재와 마애불(磨崖佛),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등이 있다.

목조삼세여래좌상은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상으로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목조삼존불상은 대웅전에 삼존불이 모두 각각의 좌대 위에 앉아 있는데, 가운데 본존이 좌우의 협시불보다 조금 크다.

 

 

 

연흥사 대웅전..

최근에 불사를 마친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인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목조삼존불과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연흥사 목조삼세여래좌상(木造三世如來坐像)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8(2002713)로 지정되었으며, 요사인 효정당(曉靜堂)에 있다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모두 각각의 좌대 위에 앉아 있는데 중앙 본존불이 좌우 협시불보다 조금 크며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인 <묘법연화경>1517세기에 출판된 연대로 보아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매우 안정되고 삼매경에 빠진 듯한 고요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에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에는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 , 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가슴 사이로는 자형 띠주름이 보이는데, 연꽃무늬로 장식되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무릎을 덮은 옷자락은 양쪽으로 부채살 모양이 표현되었고, 앉은 자세는 오른발이 왼발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를 취하고 있다.

좌측의 약사여래좌상은 머리 모양, 얼굴의 분위기, 앉은 자세, 옷무늬의 세부적인 기법 등이 석가여래좌상과 같은 양식이다.

다만 다른 것은 앞가슴에 나타난 자형의 띠주름이다.

손모양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 위로 세워 역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우측의 아미타여래좌상은 석가여래좌상 및 약사여래좌상과 세부적인 표현기법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손모양만이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우측의 신중탱과 범종..

 

좌측의 칠성탱..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삼성각과 활짝 핀 목련꽃..

 

연흥사 삼성각은 1902년 지어진 건물로 대웅전을 짓기 전까지 주불전이었다고 한다..

 

안에는 칠성탱을 중심으로 우측의 독성탱, 좌측의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성(聖)은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독수성()이라 불린 나반존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나반존자도()라는 독성탱화()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염주(念珠)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칠성(七星)은 수명장수신()으로 일컫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된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대웅전 앞의 동백과 배롱나무...

 

수령 500년의 넘은 키 작은 배롱나무와 동백꽃이다..

 

 

 

 

대웅전 앞의 3층석탑..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높이가 230cm, 상층기단면석의 너비 94cm, 1층 탑신의 너비 50cm, 1층 옥개석 너비 83cm이다.

대부분 유실되어 1층까지만 남아있었는데 최근 대웅전 앞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남아 있는 석재를 이용하여 한층 더 올렸다..

 

기단은 2중 기단으로 하층의 면석 2매가 유실되었고, .하 갑석은 몇 군데 깨져 있다.

지대석은 4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다.

하층 면석은 2매만 남아 있는데 우주와 탱주는 모각하지 않고 안상 3구를 전면에 시문하여 특이하다.

하층갑석은 1매의 판석을 만들었으며 서쪽부분이 많이 깨졌다.

상층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있다.

1층 탑신석은 1매이며, 우주와 탱주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툼한 편으로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고, 층급받침은 4단이며, 우동마루의 합각은 예리하다..

 

원래의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으나 1층까지의 비례로 보아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선방..

 

요사인 효정당(曉靜堂)..

 

 

최근에 조성된 범종각..

 

 

보제루(普濟樓)..

만세루(萬歲樓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

 

 

소발, 온화한 얼굴에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미소가 희미하게 보인다

어깨는 좁고 두광, 삼도를 표현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결가부좌한 여래상이다..

 

문화유적 총람에는 ‘함평군 손불면 북성리 사기봉 정상’에 위치한다고 명기했다.

해발 357m의 사기봉 정상에 2구의 마애불이 있다.

군유산의 지봉인 사기봉은 북성리 사기 마을에서 약 1시간 정도 오르는 거리이다.

이 마애불은 15×5m 정도의 자연 암반의 편평한 면에 동쪽과 남쪽면을 이용하여 새겨 놓았다.

사기봉의 마애불은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기 마을 인근에 있는 옛 옥선사에 속한 미륵암에서 조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마애불의 위치는 오히려 현 영광에 속한 연흥사에 가까운 곳이며,

또 연흥사에 고려 초기에 속한 삼층탑재가 있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같은 마애불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