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기행] 곤재 정개청을 배향한 함평 자산서원(紫山書院)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함평기행] 곤재 정개청을 배향한 함평 자산서원(紫山書院)

by 정산 돌구름 2017. 4. 8.

곤재 정개청을 배향한 함평 자산서원(紫山書院)

 

2017년 4월 8일, 맑게 개인 토요일 아침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 전남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 493(곤재로 688)에 있는 자산서원을 찾았다.

 

자산서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鄭介淸)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鄭大淸)을 배향하고 있다.

정개청(鄭介淸)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하면서 1616년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7(효종8)에 서인의 집권으로 훼철되었다가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상소로 1677(숙종3)에 복원되었다.

1678년에 자산서원(紫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설(復說)을 되풀이하였다.

1680년에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관찰사 임규의(任奎毅)와 유경서(柳景瑞) 등의 상소에 따라

훼철되었다 나두하(羅斗夏김덕원(金德遠) 등 유생의 상소로 1689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정대청(鄭大淸)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뒤 이만성(李晩成)의 상소에 의하여 1702년 또다시 훼철되었다.

그 후 1752(영조 28)에 제동사(濟洞祠)라는 이름으로 중건되었다.

1762년 훼철되었으며, 1789년 다시 복설되었으나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하였고, 8·15해방 이후 1957년에 복설된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6(198761)로 지정된 정개청문집 <곤재 우득록(愚得綠)>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1942년 유림 및 후손들에 의하여 유허단향비(遺墟壇享碑)가 세워졌다.

정개청(15291590)은 고성인으로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이고 나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보성의 영주산사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절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의 잡학에 힘써 강구하여 스스로 곤재라 불렀다.

그 후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사암 박순과의 교류를 통해 학문의 너비와 깊이를 더하였다.

명종 20(1565)경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로 귀향하여 향리에서 후생들을 양성하였다.

41세에는 지금의 제동마을에 윤암정사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조 22(1589)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피체될 때 까지 20여년간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 문인들로는 나덕준·나덕윤 등의 나주 나씨일가와 나덕원·안중묵·최홍우·송제민·정식·유양·정인·윤제·정지성이 꼽히는데

이들은 후일 정개청의 신원이나 서원 건립(제동사=자산서원) 등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590년 기축옥사로 함경도 경원 아산보에 유배되었다가 병사하였다.

그의 문집 <우득록>은 호남 사림의 인맥과 동향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우득록>은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곤재 정개청의 문집으로 수차에 걸친 당화를 입으면서도 어렵게

보존된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