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산방산(山房山) 산방굴사와 용머리해안..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제주여행

제주 서귀포 산방산(山房山) 산방굴사와 용머리해안..

by 정산 돌구름 2016. 12. 6.

제주 서귀포 산방산의 산방굴사()와 용머리해안..

 

12월3일, 2일차 일정은 새별오름을 내려선 후

산방산 인근 식당에서 푸짐한 해물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산방산으로 향한다.

 

산방산(山房山, 395m)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 있는 전형적인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그 형태가 특이하다.

산방(山房)’은 산수의 굴을 뜻하는 것으로 산의 남측면 150m쯤에 해식동굴이 있어서 산방산이라 한다.

다른 화산과는 달리 정상에 분화구가 없고 마치 돔 모양으로 풍화된 조면암주를 포개어 세워놓은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주상절리에 따른 침식 흔적 외에도 200m가 넘는 높은 지역에서도 풍화작용을 받은 타포니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다.

산방산 암벽식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로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육박나무, 돈나무, 가마귀

쪽나무 등의 해안에서 사는 식물들과 지네발란, 풍란, 석곡, 섬회양목 등의 암벽에서 사는 식물들이 있다.

학술적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산방산 암벽식물지대 247,935가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되었다.

산방산은 신생대 제3기에 화산회층 및 화산사층을 뚫고 해중에서부터 분출하면서 주변 지역과 함께 서서히 융기하여 현재와

같은 산 모양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산방산은 현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한라산의 한 봉우리가 쓰러져서

여기에 서 있다고 한다. 산의 남쪽에 큰 돌구멍이 있는데, 물이 돌 위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져서 샘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중이 굴 가운데 집을 짓고 살아서 그의 이름을 굴암(窟庵)이라 하였다고 실려 있다.

남서산록 약200m 지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의 해식동굴인 산방굴은 길이 10m, 너비 5m, 높이 5m쯤 되는 동굴이다.

산방굴(山房窟)100여 평쯤 되는 동굴 안에 부처를 모시고 있어 산방굴사라고도 칭한다.

이 굴은 고려의 고승 혜일(蕙日)이 거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산방굴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에 대정고을로 유배를 왔던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아왔다고만 알려져 있다.

굴의 천장에서는 약수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 물은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인 산방덕이 흘리는 슬픈 사랑의 눈물이라고 한다.

산방덕(山房德)에 대한 전설은 이렇다.

옛날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얌전하였으며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산방산에서 태어났으므로 자신을 산방덕(山房德)이라고 불렀다. 부자인 고승(高升)과 더불어 함께 살았는데, 관장(官長)

탐이 나서 산방덕을 빼앗으려 했다. 관장은 고승이 분수에 지나친 재산을 모았다는 핑계로 집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산방산에 들어가 돌이 되고 말았다. 동천(洞泉)의 과수원이 그가 살던 옛터(遺墟)라고 한다.

지금도 산방굴사에서 산방덕이는 못다 한 사랑을 아쉬워하며 지금껏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산방산이 생기게 된 연유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힘이 유독 세고 활을 잘 쏘는 사냥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꾼이 아무리 봐도 짐승은 커녕 새 한 마리도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데,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로 날아가 건너편의 바위에 앉았다.

사냥꾼이 재빨리 활시위를 당겼는데, 새는 맞지 않고 조금 옆에 떨어진 바위로 푸드득 하고 날아가 앉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다시 한 번 활을 당겼는데도 맞지 않았다.

화가 치민 사냥꾼이 세 번째 활시위를 당겼는데, 그 화살이 새를 놓치고 날아가 낮잠에 빠져 있는 하느님의 배를 맞혔다.

화가 잔뜩 난 하느님은 벌떡 일어나면서 사냥꾼이 서 있는 한라산 정상을 발로 걷어차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라산 정상 부분이 잘려나가 산방산이 되었고, 한라산 정상은 움푹 파인 후 백록담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증보탐라지에는 또 다른 내용이 실려져 있다.

산방굴은 산방산 중턱에 있다. 세속에 전해지기는 한라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무너져 이곳으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산 중턱에는 동굴이 있는데, 높이가 여러 길이고 넓이는 수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돌벽은 벗겨 떨어져 문지방 같은 것이 세 겹이고, 물은 동굴 위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져 샘이 되는데, 맛이 매우 맑고 차다.

두 번째 문안에는 높이 올라가 서 있는 하나의 기둥이 직선으로 곧게 올라가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높이 솟아 굴 문을 반이나

막아 버렸다. 승려가 그 가운데 방을 만들고 2기의 부처를 공양하고서는 이름을 굴암이라 하였다.

남쪽 산기슭은 바다 속으로 달려 들어가 그 머리를 들어 올렸다는 연유로 칭하기를 용두라 한다. 양쪽 가장자리가 홀연히 깎여

한가운데 큰 바위가 염주처럼 두 곳으로 나누어 사이가 떨어진 방이거나 혹은 함정으로 빠지는 문과 같다.

가는 곳마다 앉을 만해서 집 건물이 정교하게 지어진 형태 같다. 산의 한쪽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바다와 접하면서 천연적인

땅굴이 있다. 과거에는 사찰이 있었던 곳과 겸하여 경치가 기이하므로 이를 영주십이경의 하나, 산방굴사(山房窟寺)라 한다.

용머리 해안은 화산회층이 해식을 받아 특이한 경관을 이루고, 하멜의 표류기념탑과 함께 새로운 관광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