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33관음성지 제9호, 고창 도솔산 선운사, 그리고 동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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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3관음성지 제9호, 고창 도솔산 선운사, 그리고 동백숲..

by 정산 돌구름 2016. 3. 27.
한국 제33관음성지 제9호, 고창 도솔산 선운사, 그리고 동백숲..

 

2016년3월26일, 4년여만에 다시 찾은 고창 선운사..

전라북도 서남쪽 끝에 있는 고창은 선운사와 모양성,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이다.

서쪽으로는 70㎞를 넘는 긴 해안선을 끌며 서해와 닿아 있고, 동남쪽은 영산기맥의 서쪽 기슭에 놓인 산지성 지역인데,

전라남도와 맞닿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생활권은 전주보다는 광주에 가깝다.
또한, 고창은 군 단위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고창의 명산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의 뜻으로

선운산이나 도솔산이나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뜻이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의 본사로 사적기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24(577)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하였으며,

그후 폐사가 되어 1()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공민왕3(1354)에 효정선사(孝正禪師)가 중수하였다.

1472(성종3)부터 10여년간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5(1613)에는 무장(茂長)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 등 승려와 함께 재건을 도모,

3년에 걸쳐 대웅전·만세루(萬歲樓영산전(靈山殿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이 절은 불교의 기본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왕성해지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던 선종(禪宗)에서도 선리(禪理)

근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조선 후기에, 조사선(祖師禪)의 본연사상을 임제삼구(臨濟三句)에 입각하여 해결해

보려고 시도한 불교학자 긍선(亘璇)이 처음 입산수도한 절이기도 하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대웅전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운사 주변 동백군락지는 국내 제일을 자랑한다.

1967211일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나무숲은 선운사로 가는 길목에서 선운사 뒤까지 폭 30m정도로 이어진다.

평균 높이 6m, 수관지름 8m 정도이고 큰 것은 밑부분 지름이 80cm이고, 가슴높이 줄기의 지름이 30cm 정도이다.

 

 

선운사 천왕문(天王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조선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천왕문(天王門)'이라는 편액이 있다.

2층의 형태로 상층에는 범종을 두었고, 하층부에는 중앙에 통로를 두고 좌우 협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만 현재의 문은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최근 사역을 정비하면서 앞쪽으로 이건되었다..

 

사천왕은 우주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방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다.

지국천왕()은 수미산 동쪽을 수호하는 신으로 황금타에 있는 천궁에 살며, 선한 자에게는 상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은 허리를 짚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국토를 지켜주는 신이라고 해서 지국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건달바와 부난다라는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건달이라는 말은 건달바에서 나온 말이다.

광목천왕()은 수미산 서쪽의 백은타에 살고 있으며 눈을 부릅뜬 채 입을 크게 벌려 큰 소리와 웅변으로 온갖 악귀를 물리친다.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왼손에는 보탑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죄인에게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며, 멀리 두루두루

볼 수 있다고 해서 광목이란 이름이 붙었다. 용과 비사사가 그의 부하이며, 비사사는 살과 피를 빨아먹는 귀신이다.

건달바는 육체가 죽은 뒤 다른 육신을 받아서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고 사는 음악의 신이다.

 

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 유리타에 사는 신이다.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하여 증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른손에는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

부단나와 아귀인 패러다를 부하로 거느린다. 부단나는 달걀처럼 길쭉하게 생긴 귀신으로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고 한다.

다문천왕()은 부처의 설법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해서 다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미산 북쪽 수정타에 사는데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으며,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힌두신화에 나오는 쿠베라는 신이었다고 하며, 불교에 귀의한 후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천왕이 되었다고한다.

나찰과 야차가 그의 부하이며, 야차는 숲에 사는 무서운 귀신이지만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만세루(萬歲樓)는 전북유형문화재 제53호(1974. 9. 27)로 지정된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규모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어칸(御間 중앙칸)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했다. 

 

 

중앙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보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목조삼존불상과 함께 전북 유형문화재 제28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은  대웅보전 좌측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고 1713년에 단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어칸은 육각형의 대석에 원형으로 다듬어진 초석을 사용한 데 비해 측면 쪽으로

그 다음 것은, 아래는 자연석 초석이나 상단을 원형으로 쇠시리한 것을 사용하였고, 제일 바깥쪽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쇠서를 내밀지 않고 초각으로 말아 올린 물익공 형식에 가까운 형태로 처리하였으며, 상단에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고

화각첨차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내부는 중앙 3칸에 불단을 형성하되 어칸의 경우 후벽면까지 붙여 불단을 조성함으로써 반 ‘아(亞)’자형의 불단 평면이 되도록 하였다.

후벽면까지 넓혀진 중앙 불단에는 석가삼존상을 봉안하고, 좌우측에는 ‘ㄱ’자형으로 형성된 불단에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평천장과 빗천장을 조합한 형식이며, 중앙 어칸의 후면 고주를 가로질러 운궁형 닫집을 설치하고 빗천장 받침목에 연화 초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부 벽면에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나한(羅漢) 등의 벽화와 삼존상 뒷벽에 금강역사를 그렸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28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된 목조삼존불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한

삼존불로 모두 단향목(檀香木)으로 제작한 목불인데 주존의 높이는 300cm이고, 협시보살은 240c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근년 어느 비구가 이 삼존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다 이곳에서 화광이 발하여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화를 면했다는 염험이 전해온다.

선운사 영산전 조성시의 <시주록()>에 “도광() 원년에 기존의 2층 각황전(殿)이 무너지자 1층으로 고쳐 짓고,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미륵()과 갈라()보살을 보처로 안치하고, 이를 영산전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여,

이 삼존불은 법화경에 나오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 보살이 협시한 석가여래삼존불로 1821년(순조 2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신당 (山神堂)은 영산전 뒤편에 길게 설치된 기단 위 팔상전의 옆에 위치한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일반적 산신각과 달리 선운사의 창건주인 검단선사와 참당사의 창건주인 의운스님을 함께 그린 진영이 중앙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 산신당의 주인인 산신을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八相殿)은 영산전과 명부전 사이에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뒤편으로 한단 높이 기단을 쌓은 곳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이익공 형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1706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조선후기의 건물로서, 196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내부의 불단은 'ㄷ'자형으로 간략하지만 닫집은 2개의 기둥을 세우고 천룡조각을 한 화려한 형식이다.

불단 중앙에는 근래에 조성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후면벽에는 1901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팔상탱을 봉안하였다..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을 팔상탱(八相幀)이라고 한다.

선운사의 팔상탱은 관하종인(觀河宗仁) 등이 1901년에 조성한 것과 근래에 조성한 것이 혼재되어 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은 호명보살이 도솔천궁에서 흰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부인의 몸에 입태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은 마야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태자를 낳는 장면이고,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은 성장한 싯달타 태자가 성밖의 사문(四門)으로 나가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태자가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은 태자가 출가한 후 10년 동안 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태자가 보리수 아래에서 마왕의 공격을 막고 항복받는 장면,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은 깨달음을 얻은 세존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고 있는 장면,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은 세존이 45년간의 중생 교화를 마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정면5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2010년4월13일 석전 영호대종사 열반 16주기를 맞아 역대 조사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낙성식을 가졌다..

 

창건주인 검단스님을 비롯하여 의운, 설파, 백파, 경담, 환응, 석전스님 등 7분의 진영이 봉안되었다..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정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불단은 전면과 측면의 벽체에 붙여 ‘ㄷ'자 형태로 구성하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명부시왕을 봉안하였다.

천장은 노출천장 을 하였으나 지장보살이 봉안된 윗부분에만 빗천장을 설치하고 운룡문을 그려 닫집을 대신하였다..

 

내부 탁자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향우측에 도명존자, 우측에 무독귀왕과 의자에 앉아 있는 시왕(十王)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138cm)은 스님처럼 민머리로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소모양을 하고 있다.

방형의 체구에 상체가 긴 편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물 제290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2쌍의 괘불대(掛佛臺)는 괘불을 내어 걸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현재 마모되기는 했으나,

옹정육년(雍正六年, 1728년)과 가경삼년(嘉慶三年, 1798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목조(木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년)에 조성한 것으로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ㆍ약사회상도가 자리잡고 있다.

흙으로 빚은 소조삼세불로 노사나불은 1634년(인조12년)에 법정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 비교적 균형잡힌 모습이다.

후불벽화로는 1688년에 조성된 약사회상도가 걸려있다.

아미타불화와 같이 간단한 구도로 연화좌 위에 앉아 결 가부좌를 하고 설법인을 결하며, 양쪽에는 붉은 연꽃가지를 든 일광보살과 하얀 연꽃가지를 든 월광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채색은 녹색과 적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전체적으로 차가운 푸른색조를 띠고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29호인 6층석탑(六層石塔)은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에 위치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방형의 축대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5단의 옥개층급을 지니는 등 부분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탑을 연상케 하는 고려 초의 작으로 추정된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했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관음전(觀音殿)은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요사채를 관음전으로 사용하다가 이를 허물고 1990년 지금의 자리에 신축하였다.

지금의 관음전은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공포는 이 익공 형식으로 쇠서에 연화를 달고 보머리 앞에 봉황두를 두는 등 장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내부는 가운데 부분을 평반자로, 전후면의 퇴칸에는 빗반자를 두었는데 중앙의 우물반자는 2줄로 두고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빗반자에는 화문을 두고 대들보에는 좌우측에 청용과 황룡을 그려 장식하였다.

선운사사적기에 1474년 관음전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중창을 하면서 1705년에도 관음전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부속전각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전 불에는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에 십일면천수천안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전북유형문화재 제31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된 이 범종은 전체 높이 129㎝, 종신() 높이 103㎝, 구경() 93㎝, 견경() 56㎝,

종 입구 가장자리 두께 7㎝, 무게 650근이다.

종의 중간 부분에 있는 종기()로 보아 1818년(순조 18년)에 다시 주조된 것이다.

종신은 3부분으로 융권()하고, 길이 19㎝의 구연상()에 돌대() 2부분이 있다.

종기가 있는 주위는 3부분으로 융권하고, 유곽() 4개를 주출()하여 유곽 사이에는 높이 약 22㎝의 보살입상이 양각되었다.

유곽과 보살입상 윗부분에는 작은 원이 8개가 있으며, 원 안에는 ‘’자가 1자씩 양각되었다.
용뉴에는 용 2마리가 주조되었고, 용의 몸통에 여러 개의 청동 조각으로 비늘 모양을 장식하여 외관상으로 실감나게 하였다.

용추에는 머리부분이 바깥을 향한 용머리 2개가 투각되었다.

종의 음관()은 없지만 종의 공명()을 위해 종신 맨 윗부분에 둥근 구멍 1개를 뚫었다

 

 

 

 

 

1967211일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나무숲..

선운사로 가는 길 오른쪽 경사면 아래 사찰 경계가 시작되는 동백호텔 뒤부터 선운사 뒤까지 폭 30m 정도로 이어진다.

평균 높이 6m, 수관지름 8m 정도이고 큰 것은 밑부분 지름이 80cm이고, 가슴높이 줄기의 지름이 30cm 정도이다..

 

동백나무는상록활엽교목으로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 또는 넓고 긴 타원형인데 톱니가 있으며 두껍고 광택이 있다.

꽃은 1개씩 가지끝 또는 잎겨드랑이에 나고 붉은색으로 핀다.

관상용으로 심고 열매는 기름을 짜 머릿기름, 등유, 식용유로 사용하였다..

 

꽃잎이 수평으로 활짝 퍼지는 것을 뜰동백이라 하며 많은 종이 있다.

흰 꽃이 피는 것을 흰동백, 어린가지와 잎 뒷면의 맥 위 및 씨방에 털이 많이 나있는 것을 애기동백이라 하며,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한다.

고창군을 비롯하여 해남군, 완도군, 강진군, 여수시, 광양시, 거제시, 대청도, 남해안 지역과 제주도에서 자란다.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 동백(), 춘백()으로 부른다.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은 577년 백제 위덕왕 때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조성된 것이며,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성종 때 동백기름을 짜고 산불을 막을 목적으로 심은 인공림이다.

화마()가 절에 미치는 것을 방어할 수 있게 사찰 경계에 띠 모양으로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