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기행]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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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기행]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 관음사..

by 정산 돌구름 2014. 11. 10.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 관음사(觀音寺)..

 

○ 탐방일 : 2014년 11월 9일

○ 소재지 :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2

○ 관음사(觀音寺) 소개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1984년2월29일)로 지정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백제 분서왕 3년(300년) 처녀 성덕(聖德)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312년(비류왕 9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뒤 성공스님이 성덕의 상을 만들려다가 생각을 바꿔 관음상을 모시고 성덕산 관음사라 했다고 전한다.

  관음사는 조선 이전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성덕산 관음사를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는 “전라남도 옥과 성덕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람고>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고사사법>에는 “곡성군 화면 성덕산에 있고 대본산 송광사의 말사”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는 1374년(공민왕 23년)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 5중창을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큰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던 원통전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신희, 담원, 담정 세 스님만은 끝까지 절을 지켰으먀, 1604년(선조 37년) 5년에 걸쳐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 1612년에도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년)과 1718년(숙종 44년)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으며,

  수각루인 금랑각을 지었다.

  1832년(순조 32년)에 큰 홍수로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있는 건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그렇게 오래 방치하다가 1936년 청운스님이 중건하였는데 그 내용이 금랑각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수기는 근대의 고승인 한영 정호(1870~1948)스님이 잠시 머물면서 당시 주지인 수용스님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1912년 영담화상이 전체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모두 불탔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된다하여 토벌군의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제273호)과 금동관음보살상(제274호)이 소실되었다.

  1954년 주지 박창훈(朴昌薰)이 부근의 대은암(大隱庵) 건물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1982년에는 지장전, 서원당, 금강문을 복원하였으며, 지금도 의욕적인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입구인 금랑각과 금강문을 들어서면 그 앞에는 아무런 법당이 없고, 좌우에 극락전과 원통전이 있다.

  극락전 앞에는 3동의 요사가 있고, 원통전 앞에는 요사채와 종루가 있다. 원통전 향 우편에 백인당이라는 요사가 1동 더 있다.

  부도는 입구의 숲속에 위치한다.

<성덕산관음사사적>에 의하면, 옛날 충청도 대흥 땅에 장님 원량(元良)이 살았다.

그에게 홍장(洪莊)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마을 어귀를 지나다가 승려 성공(性空)을 만났는데, 그가 장님 원량에게 큰절을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간밤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오늘 마을에서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대화주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원량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설명하였으나 승려는 한사코 시주할 것을 청하였다.

부녀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데, 저녁 무렵 진나라 사신이 찾아왔다.

사신이 말하기를, 진나라 혜제(惠帝)가 새 황후 될 분이 동국(東國)에 있을 것이니 가보라고 하여 배를 타고 포구에 이르렀는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집으로 인도되었다고 하였다.

부녀는 진나라 사신의 예물을 받았으며, 그 예물을 성공에게 시주하여 절을 짓도록 하였다.

창건 후, 성공은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모시고 절 이름을 성덕산 관음사라 하였다.

 

 

금랑각(錦浪閣).. 

 

성덕산 관음사(聖德山 觀音寺)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숭정기원후경신년6월일서(崇禎紀元後庚申年六月日書)라는 낙관이 있는데, 숭정기원후경신년은 약330년 전인 1680년이다..

 

금랑각 현판..

 

금랑각을 들어서면 단청도 하지 않은 허스름한 건물인 금강문(金剛門)..

왼쪽에는 아금강(나라금강연), 오른쪽에는 훔금강(밀적금강)이 서있다.

아는 범어의 첫글자이고, 훔은 범어의 끝글자로,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입을 벌리고 있어 아금강이라고 하며, 코끼리의 백만배나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밀적금강((密迹金剛)은 입을 다물고 있어 훔금강이라고 하며,

야차신의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績)을 모두 듣겠다고 서원하였으므로 밀적(密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에는 1998년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극락전(極樂殿)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1900년경 건립되었다.. 

 

내외부의 벽화는 사찰의 전통적인 소재 외에도 매화나 동백꽃도 그려져 있고, 주련도 한글로 쓰여져 있다.

  극락전의 아미타불 보름달 같은 얼굴

  한량없는 지혜의 빛 온 허공을 비추나니

  누구든지 일념으로 그이름을 부르오면

  무량공덕 원만하게 한순간에 이루리라...

 

현판과 주련은 한국서예가협회 고문인 담헌 전명옥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만 봉안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로,

정토 사상의 발달과 함께 한국·일본·중국 및 서역까지 퍼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삼국통일시대부터 화엄종·법상종 등 여러 종파에서 섬겼으며,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가장 많이 조형화되었다..

 

 

 

원통전(圓通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54년 주지 박창훈(朴昌薰)스님이 인근의 대은암 건물을 옮겨와서 지은 것이다.

현판은 서예가 용곡 조기동씨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있고..

 

아래쪽 유리상자 안에는 두상의 일부만 남은 소조불상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락산(補陀落山)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보타락산은 팔각형의 산으로, 산에서 자라는 꽃과 흐르는 물은 빛과 향기를 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1970경에 봉안한 관음좌상,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탱, 신중탱, 산신탱 등의 불화가 봉안되어 있다.

 

 

내부에는 연꽃, 매화, 소나무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원통전 옛터.. 6.25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원통전 자리에는 텅 비어있고, 앞에는 괘불지주만 서있다..

 

요사채..

 

원통전 앞 연못의 어람관음(魚籃觀音)..

 

어람관음(魚籃觀音)은 원통전 앞에 세워져 있는 높이 95cm의 석조조각상이다.

어람관음신앙은 중국 송대 이후 널리 유행하였다..

 

왼손에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있는데, 앞에서는 머리부분만 보이고 꼬리는 등 뒤에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결구공만 남아있다.

조각의 기법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투박 단순하며, 민예적요소가 강한 수법들로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람관음은 나찰, 독룡, 악귀의 해를 제거해 주는 보살로서, 모습은 물고기 위에 서서 오른손 위에 왼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