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기행] 사적 제145호,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고창읍성(高敞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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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기행] 사적 제145호,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고창읍성(高敞邑城)..

by 정산 돌구름 2011. 12. 9.
사적 제145호,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창읍성(高敞邑城)..

 

 

○ 탐방일 : 2011. 11. 13 (일)

○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

고창읍성(高敞邑城) 소개 

 사적 제145호(1965년4월1일)로 지정된 고창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1453년(단종1)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이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버렸고 현재 북문 공북루, 서문 진서루, 동문 등양루와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풍화루, 내아, 관청, 향청, 서청, 장청, 옥사 등 일부만 복원되었다.

 무병장수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고창읍성이라는 원래의 이름보다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성이다.

모양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시대 이 지방의 이름이 모량부리로 불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데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만들어져 졌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성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종 이전에 만들어졌으로 추측된다..

 

답성놀이상..

 

북문인 공북문(拱北門)이 읍성의 정문이다.

공북루란 임금이 계신 북쪽에 두 손을 모으고 경배한다는 누각이란 의미로서 전국 대부분의 관아 북문의 명칭이다..

 

옥(獄)..

 

감옥을 재현하였다..

 

답성()놀이...

윤달이 드는 해를 윤년이라 하는데 윤년의 윤달에 부녀자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산성의 능선을 따라 밟으며 열을 지어 도는 풍속이다.

성돌기, 성밟기라고도 하는데, 윤달의 답성놀이는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공통점이며,

부녀자들이 윤달 든 해에 행렬을 지어 산성을 도는 보편화된 세시풍속이다..

 

답성놀이는 윤달에서도 엿셋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초엿세날, 열엿셋날, 스무엿셋날을 답성일로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678년에 현감 이항()은 고창 모양성()을 개축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으며,

순조 3년(1803년) 고창읍에 읍치풍수의 석조물을 조성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다.

답성놀이는 개성 천마산성(城), 고창 모양성(고창읍성), 남원의 교룡산성을 비롯하여 영광지역에서도 전해오는 풍속이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현재 고창읍을 두르고 서 있는데 그 길이가 1,700m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는 4~6m이다...

 

동문인 등양루(登陽樓)..

 

 

동문을 지나 서문으로 향하면 소나무숲이 정겹다..

 

성황사(城隍祠)...

성황신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왔으며, 지금도 매년 중양절(음력 9월9일) 모양성제 날에 제를 올린다..

 

이 건물은 예전의 성황사가 있었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서문..

 

서문은 진서루(鎭西樓).. 이 문 앞은 광활한 공터로 옛날에 화살터도 있었고 무술연마장이있었다고 한다..

 

 

 

 

 

 

대나무숲을 지나 내려서면..

 

고창객사(高敞客舍)..

 

조선시대 각 고을에 객사라는 관아가 있었는데, 중앙의 정당(正堂)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牟陽之館)의 모양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이 성을 모양성이라고 불러왔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1991년 복원하였다..

 

 

 

 

 

 

고창동헌(高敞東軒)..

 

조선시대 목(牧), 도호부(都護部), 군(郡), 현(縣)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守令)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한다..

 

건물 정면에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平近堂)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 동헌이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 자료조사하여 1988년 복원하였다..

 

고창내아(高敞內衙)..

 

동헌은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흔히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고,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장청(將廳)..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과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 병방(兵房), 군교(軍校)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 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 자료조사하여 2000년 복원하였다..

 

풍화루(豊和樓)..

 

고창읍성 연못옆에 세운 2층 누각으로 문헌에서는 성내에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풍화루는 1989년, 연못은 1990년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