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1년 11월 19일
○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
○ 만복사지 소개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린산(麒麟山)을 북쪽에 두고 남쪽은 넓은 평야를 앞에 둔 동산에 있다.
<용성지(龍城誌)>에 따르면 통일신라 후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현존하는 유구는 고려 문종 이후의 것이며,
1979~1985년 전북대학박물관 조사팀이 발굴 조사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1탑 3금당식(金堂式)으로, 본탑을 중심으로 북 ·동 ·서에 각각 금당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강당 ·중문이 있다.
이런 배치는 특히 고구려의 1탑 3금당식과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데, 즉 서쪽 금당터가 북 ·동 금당터보다 규모가 크다.
특히 이 절터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된 동탑서전(東塔西殿) 가람배치와 조선시대의 1탑 3금당 가람배치가 중복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만복사에 대한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상 기록과도 일치되어 가람배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만복사지 5층석탑(보물 제30호)과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만복사지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43호), 만복사지
불상좌대(보물 제31호), 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인형(石人形)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만복사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다.
만복사지 사적비...
만복사지 석인상(石人像)...
고려 문종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만복사의 터인 만복사지(萬福寺址)에 있는 석인상(石人像)이다.
만복사지 보호철책 바로 옆의 국도변에 머리 부분만 지상에 노출된 채 묻혀 있다가 2009년8월 발굴되어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졌다.
전체 높이는 5.5m이지만 지상에 드러나는 부분은 3.7m이고, 나머지 1.8m는 지하에 묻히게 되어 있다.
길쭉한 직사각형 돌기둥을 조각하여 조성하였는데 절의 당간지주(幢竿支柱)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상으로 인왕상(금강역사상)으로 보이는데 머리 부분에 큼직한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귀가 길고 안구가 돌출되어 있다...
보물 제32호, 만복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의 왼쪽 언덕 아래 세워져 있는데 원위치로 추정되며 원래 상태대로 두 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표면에는 조각이 없으며,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사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다가 외면과 접하는 모를 죽여
그 부분만을 둥글게 하였다.
높이 3m,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 세군데에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간구를 마련하여 간을 시설하였다.
중·하부는 모두 원공(圓孔)으로, 중부는 상부의 간구에서 1m쯤 내려와 있는데 서쪽 지주는 외면까지 관통되었으며,
하부는 하단 가까이에 구멍을 뚫어서 중간부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아래부분이 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고, 간대(竿臺)나 기단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인상은 주지 않는다. 이 곳 절터에 남아 있는 여러 점의 석조물들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이 당간지주 역시 각 부의 양식이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석등대석(石燈臺石)..
이 대석은 목탑지 중앙에서 12.1m 남쪽지점 즉 중문지와 목탑지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다.
1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동서 120cm 남북 115cm 아래 부분을 정방향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일변 43cm 크기의 팔각을 돌출 구회하고
각변에 복엽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면 가운데에는 간주를 끼우기 위해 직경 20cm의 구명을 파놓았다.
연화문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만복사 창건 당시부터 이곳에 위치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萬福寺址五層石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이는 높이 약 5.5m의 4층 석탑이다. 옥신석(屋身石) 밑에 받침돌을 깐 것은
고려시대의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神福寺址塔)이나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弘濟洞塔) 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屋蓋石)의 층급받침은 얕게 2단으로 되고 기단부는 간단한 지대석으로 변했다.
둔하면서도 백제탑의 여운을 남기는 옥개석의 긴 처마가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만복사지 석불입상(石佛立像)...
높이 2m의 석불입상으로 1963년1월21일 보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옛 만복사 터에 있는 소발(素髮)에 육계(肉몲)는 접시 같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살이 쪄 있으나 비만하지 않은 풍려(風麗)한 인상이다...
눈은 바로 떴고, 코는 원만하며, 알맞게 묘사된 입은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얼굴과 함께 자연주의 작풍을 풍긴다.
특히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과 몸의 굴곡, 유창하게 구사한 옷주름의 선들은 부드럽고 원만하다.
납의는 통견이나 여학생 제복의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접힘이며, 그 아래는 원심적인 유려한 선을 음각선으로 새겼다.
하체의 옷주름은 두다리의 양끝에 뾰족한 구심적 타원형을 표현하였고 광배는 두신광을 굵은 철선으로 표현했는데, 두광은 윗부분이
없어졌으나 가운데 머리를 중심으로 판단이 보다 넓은 복판 연화무늬가 조각되었으며, 고사리줄기 같은 연꽃가지들을 장식하였다.
신광 안에도 연줄기가 정교하게 묘사되었고, 광배 밖으로는 화염무늬가 치밀하게 올라가고, 양쪽에 각각 화불 좌상 2구씩이 새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불전과 동불에 대한 기록이 있고 창건연대도 밝혀져 있어, 고려 문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1호, 만복사지 석좌(石佛座臺)..
높이 1.4m, 하대 한변의 길이 1.2m, 하대 이상 높이 0.96m의 1석으로 조성된 6각형의 연화대좌로서 원위치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하대(下臺) 위에 상대(上臺)를 마련하고 그 사이의 간주(竿柱)는 낮게 표현하였다. 하대 측면에는 각 면마다 2개의 우주(隅柱)를 새기고
중앙의 탱주(撑柱)로 2분하였는데, 우주와 탱주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1단 낮은 선조(線條)를 새겼다.
각 면의 2분된 구간에는 안상을 오목새김하고, 안상 안에는 귀꽃모양의 화형문을 새기고 하부는 1단의 받침을 새겨 측면받침으로 삼고
있다. 상부는 갑석 모양으로 테를 마련하고 그 위의 경사진 상면에 복엽의 복련(覆蓮)을 조각하였는데, 윗면에 중대받침을 조각하였다.
중대(中臺)는 양쪽에 우주,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2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안상 등의 장식은 없고 마멸이 심하여 각 주형(柱形)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다. 중대 상단에는 하부와 상대하여 1단의 상대굄을 마련하였으나, 상대의 앙련(仰蓮)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어
어떠한 형태인지 잘 알 수 없다.
상면은 평평할 뿐 별다른 장치는 없으며, 중앙에 1변길이 30㎝의 방형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좌대(座臺)는 방형 혹은 8각, 원형 등이나 이 석좌는 6각형으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 각 면의 우주와 탱주 가장자리에 선조를 장식한 것이라든지 안상의 안쪽에 귀꽃형 화문을 장식한
수법 등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서, 이 석조대좌의 조성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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