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1년 11월 5일(토)
○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
○ 탐방지 소개
< 관룡사(觀龍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내물왕 39년(394)에 창건되었다는 신라 8대사찰의 하나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진평왕 5년(583)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통일신라 때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을 이루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 한다.
경덕왕 7년(748)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 태종1년(140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가 소실되어
광해군9년(1617)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영조25년(1749)에 보수하였다.
이 사찰에는 대웅전(제212호)과 약사전(제146호), 석조여래좌상(제519호),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제295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약사전 3층석탑(유형문화재 제11호), 관룡사사적기(유형문화재 제183호), 석장승(민속자료 제6호), 부도(문화재자료 제19호), 원음각
(문화재자료 제140호) 등이 경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약사전은 임진왜란 때 전화를 면한 관룡사 유일의 건물로서, 부석사 조사당·송광사
국사전과 함께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이 약사전 안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약사전 앞에
있는 높이 2m의 3층석탑은 기단부의 4면에 각각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작품이다.
절의 서쪽 500m 위의 용선대(龍船臺)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불로서, 산 정상에 안치된 드문 예이다.
관룡사 입구 좌우에 마주보고 선 높이 약 2m의 석장주(石將柱) 2주는 자연석에 남녀상을 새겼는데, 관룡사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구실도
하고있다. 산내 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과 삼성암(三聖庵)이 있고, 관룡사 아래 극락암, 화왕산 자하골에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관룡사 사천왕문(觀龍寺 四天王門)...
사찰 초입의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숙종 38년(1712)에 대웅전과 함께 건립된 것을 1978년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하였다.
건물은 어칸 중앙의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대문을 달고, 내부에는 사천왕탱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 있다.
현재 벽체는 비어 있으나 사적기의 내용을 통해 1713년 천왕문을 단청하면서 사천왕회상(四天王會像)을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절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화왕산관룡사(火王山觀龍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大雄殿)...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건물로 현재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1965년8월 해체보수공사 때 어칸 마루도리에서 발견) ,
태종1년(1401)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9년(1617)에 중창하고, 영조 25(1749)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화강암을 다듬어 바른층쌓기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위에 포작을 짜 올렸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에 우물천장을 장엄한 모습으로, 어칸 중앙 후열에 두 개의 고주를 세우고 불단을 배치하였다.
불단 위로는 보개의 구실을 하는 닫집을 가설하고, 천장을 비롯하여 공포에 금단청을 입혀 고색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특히 충량의 용문양과 금단청, 공포의 보모양, 수미단의 조각과 후열 고주에 그려진 보살상과 후불벽화인 양류관음도, 포벽을 장식한
각종 벽화와 별화 등의 화려함은 조선후기 불전 장엄의 정수로서 그 종류가 매우 다채롭다...
현재 대웅전에는 불단에 모셔진 목조석가삼존상을 제외하고 조선후기 성보들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근래 좌우 불단에 봉안된 석고비로자나불좌상과 석고보살좌상이 있다.
목조삼존상은 중앙의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ㆍ아미타불을 모신 석가삼존상으로, 17세기 중반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은 모두 나발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앙계주를 가지고, 장방형의 얼굴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코는 통자형으로 짧고 입은 코보다 큰 편이지만 적당한 크기로 얌전히 다물고 있고, 눈은 가늘게 뜨고 눈위로 눈두덩이가 표현되어 있다.
목은 길지 않으며, 삼도는 목과 가슴의 경계에 선명하게 세 줄로 나타나고 있다.
신체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조금 긴 편으로 넓은 어깨에 상체가 약간 앞으로 쏠려 있으며, 천의는 우견편단이다.
전반적으로 경직된 자세, 군의의 일자형 사선문양, 변형된 무릎 등에서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중앙석가불은 앉은 키 150㎝, 무릎 폭 98㎝이며, 좌우 약사와 아미타불은 앉은 키 120㎝, 무릎 폭 80㎝이다.
이외 높이 66㎝, 길이 504㎝, 폭 95㎝의 대형 목조(木槽)와 근래에 조성된 청동금고가 있다..
대웅전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양류관음은 불교에서 병고(病苦)를 덜어주는 관음으로,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불화에서 중요한 화제(畵題)의 하나가 되어 오고 있다.
대개가 바위 위에 비스듬히 앉아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쥐고, 왼손은 왼쪽 젖가슴에 올려놓고 있으며,
아래쪽 한 모서리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배치하여 회화상의 대각선구도를 살리고 있다...
불화로는 1992년 금어 이진경이 그린 영산회상도를 비롯하여 1940년 화공 천덕주(千德柱)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18세기 작풍인 지장시왕탱, 1976년 금어 석정(石鼎) 스님이 그린 신중탱이 있다...
대웅전 천정...
응진전(應眞殿)...
지금의 응진전은 1983년에 주지 신허스님과 화산스님이 나한전으로 건립한 것을 2000년대 보수한 것이다.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에 의하면 1714년(숙종 40)에 16 중수되었다고 하며, 전후의 연혁은 알 수 없다.
견치석으로 쌓은 4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그위로 원주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외부는 삼면을 벽체로 형성하고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한 모습으로, 정면에는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건물 삼면에는 16나한도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불상은 근래 조성된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고, 그 주위로 높이 26~31㎝의 소형 나한상
16구를 배치하였다. 불화로는 삼존상 뒤로 1990년 월하스님이 증명하고 금어 김룡환(金龍煥)이 조성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불단에는 석가삼존상을 봉안하고 뒤에는 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석가불좌상은 완만한 상호(相好)로 어깨까지 귀가 늘어져 있으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法衣)를 걸쳤다.
손가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그 손이 몸에 비하여 크게 만들어 어색하게 보인다. 좌우에는 보살좌상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형태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새겨진 관음보살과 정병이 새겨진 대새지보살이다.
불단의 좌우로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도록 수기(授記)를 받은 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칠성각(七星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다.. 『명부전칠성각상량문(冥府殿七星閣上梁文)』에 의하면,
1652년 건립되어 1912년까지 4중창된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명부전·대웅전·칠성각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견치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건물 삼면에는 벽면 내외부에 작가와 시기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산수도와 감로탱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 그 모습은 사라지고
옛 부재인 화반만이 창방 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외 건물 외부에는 편액과 주련 4기가 있으며, 공포는 익공양식으로 앙서형과 수서형으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불단을 만들어 칠성탱을 봉안하였는데, 가구는 3량이고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특히 대들보는 자연상태의 만곡재를 씀으로서 목조건축의 미를 살리고 있다....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로 대웅전 서편에 있다. 『명부전칠성각상량문(冥府殿七星閣上梁文)』에 의하면,
1652년 초창하여 1682년에 중창하였으며, 1753과 1912년에 각 3중창과 4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명부전은 2000년 주지 정안스님이 보수한 것으로, 건물은 화강암을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만든 낮은 가구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가구는 3량이고, 내부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불상은 ㄷ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불단에는 17세기에 조성된 목조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무독귀왕 입상을 봉안하고
그 주위로 시왕 10구와 판관·귀왕 1구, 그리고 장군 2구를 배치하였다.
불화로는 1992년 노천월하스님이 증명하고 금어 이진경(李鎭景)이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지장보살상은 깍은 머리에 스님 모습으로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을 결하였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두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협시하고 있다.
뒤에는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의 몸에서 광채를 뿜고 한손에 투명한 보주를 든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시왕(十王)은 염라왕이 중국에서 발전하여 10대왕으로 확대된 것으로 원유관에 문관복을 입고 홀을 든 문인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죽은 중생들은 초칠일~칠칠일, 백일, 1주기, 그리고 3주기 등의 10차례에 걸쳐 한 왕씩 앞으로 나아가 재판을 받게 되는데,
3년 사이에 태어날 세계가 결정한다고 한다...
고불당(古佛堂)...
1981년 주지 신허스님과 화산스님이 건립한 별원(別院)에 있는 요사이다.
원래 옛 영산전터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그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 전면에는 자연괴석과 아름드리 소나무를 조경하여 고요한 선실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화산(華山)스님이 쓴 편액과 주련 4기를 걸어 놓았으며, 현재는 관룡사 노스님의 참선 수행을 위한 선실과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약사전(藥師殿)...
정면과 측면 각 1칸으로 된 작은 전각으로 현재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초기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이나 송광사 약사전이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축임에 비해, 주심포 계통의 맞배지붕 건물이 특색이다.
『관룡사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흘해왕 44년(353)에 초창되어 중종2년(1507)에 재창된 건물로 이후 1609년과 1821년 중수되었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전돌을 깔고 그 중앙에 석조여래좌상을 배치한 구조로, 가구는 대량·중량·종량으로 구성된 5량이다.
특히 건물 4면에는 산수도·조화도를 비롯한 다양한 벽화가 채색되어 있는데, 평방 위의 천불도는 세련된 필치와 채색에 명호가 기록되어
있어 사찰벽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룡사 약사전은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약사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불상의 높이는 110㎝, 대좌높이는 86㎝의 중형 불상으로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5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龍船臺)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불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선각으로 나발이 표현된 큼직한 육계와 중앙계주가 있고, 비만한 얼굴에 비해 짧고
단정한 코, 융기된 좁은 인중, 작은 입, 뚜렷한 턱의 윤곽선, 굵은 띠주름의 삼도 등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사전 삼층석탑(三層石塔)..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을 재료로 만든 장방형의 3층탑이며,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1층 옥개와 상륜부는 결실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다. 전반적으로 양식과 각부의 수법은 신라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각부의 양식수법이 간략·섬약해져 조성시기를 고려시대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범종루(梵鐘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로 원음각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노천월하(老天月下)스님이 증명하고, 주지 지묵항조 화상이 조성한 '반야대범종(般若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1987년 대웅전 서쪽 요사와 함께 지은 것으로, 2층 누각의 모습으로 하고 있다. 건물의 외부는 1층을 경사지에 석조를 세워 배치하고
그 위로 원주를 세워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으로, 2층 누상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범종은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며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주는 의식구로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여 준다고 한다...
부도(浮屠)..
관룡사에는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절의 북쪽 등산로 옆에 있는 부도는 경남문화재자료 제19호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높이 205cm, 몸통둘레 175cm로, 2단의 바닥돌 위로 상·중·하대의 기단을 쌓고 석종형의 탑신을 올린 후 사각의 옥개를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 비해 탑신이 커서 불안정하지만 대석·연화대·옥개석을 모두 갖춘 완형 부도로, 대석에는 구획을 나누어 기하학적인 문양과
운문을 새겨 넣고 있어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도로 알려져 있다...
관룡사 석문(石門)...
사실상 관룡사의 일주문으로 불리는 석문으로 축성시기를 알 수 없다.
이 문은 자연석 축대를 쌓아 올려 상부를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화강석을 올려서 지붕을 올린 아담한 석문이다.
폭 118㎝, 높이 210㎝에 한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조그마한 문으로, 좌우로 관룡사 가람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조성시기는 17세기 명부전과 칠성각이 조성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관룡산의 진산인 화왕산 산성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석문 옆에는 4기의 비가 있는데, 1938년에 세워진 전현풍군수하재명 숙부인김녕김씨 도장석축유공비(前玄風郡守河在鳴 淑夫人金寧金氏
道場石築有功碑)를 비롯하여 환몽화상유공비(幻夢和尙有功碑), 1985년과 1995년에 세워진 전기불사공덕비(電氣佛事功德碑),
진관평산포수군만호자 불사공덕비(鎭管平山浦水軍萬戶者 佛事功德碑) 등 관룡사 중창과 관련된 불사 공덕비이다...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石造 釋迦如來坐像).....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 높이 181cm, 대좌 높이 117cm로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으며 광배는 없어졌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낮아진 둥근 육계(肉髻)가 있으며, 탄력성은 감소되었으나 단아한 사각형의 얼굴이다.
직선에 가까운 눈, 오똑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은 온후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으며, 목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오고, 어깨는 좁아지고 조금 올라간 위축된 자세이지만 안정감이 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안정감은 있으나 조금 둔중하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는데, 석굴암의 본존이 취한 항마촉지인과는 조금 다르다.
몸에 밀착된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 선이 규칙적이면서도 평평하게 처리되었으며,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다
대좌의 상대는 반구형으로, 연판 내에 꽃무늬가 새겨진 중판연화문(重瓣蓮花文)이 앙련(仰蓮)으로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중대는 팔각인데 각 면마다 안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사각형의 받침 위에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 앞에는 석등의 부재로 보이는 연대가 남아 있는데, 사각형의 받침 위에 복판연화문이 새겨진 것으로 4분의 1 가량이 파손되었다.
그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아마도 석등의 간주(竿柱)가 서 있던 자리인 것 같다.
주위에 철책이 둘러져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고, 아래는 수십 길의 낭떠러지로 높은 조망대를 형성하고 있다...
9세기경에 이르게 되면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단독불좌상이 많이 조성된다.
이 불상도 이러한 예 중의 하나로서 통견의 불의,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 평행 계단식 옷주름, 섬려한 대좌 등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8세기의 불상 양식에서도 나타나지만, 다소 위축된 자세라든가 사실성이 줄어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볼 때,
8세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9세기 이후의 형식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구룡산 아래의 청룡암...
뒤편의 석굴에는 석불...
석굴은 오래 된 듯하지만 석불은 최근에 봉안된 듯...
오롯이 자리잡은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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