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기행] 보물 진제313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강진기행] 보물 진제313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by 정산 돌구름 2013. 3. 12.
보물 제313호, 월남사지(月南寺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탐방일 : 2013년3월1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3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소개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1963년1월21일 보물 제313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58m, 폭 2.3m으로, 고려 고종 때 세워진 비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비이며, 직사각형 대석 위에 같은 크기의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있고, 대석과 귀부는 단일석이다.

 여의주를 머금고 있는 귀부는 강렬한 사실적 조각 기술을 보이는 조형이며, 비좌에는 간결하게 구름무늬를 새겼고, 비신은 편마암이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린 형태로 비신 상반부는 잘렸으며, 현재 남아 있는 하반부도 새긴 글자의 풍화 마멸이 심하여 비문(碑文)의

 내용을 판독하기 어렵다. 진각국사비는 고려시대의 문신·문인인 이규보(李奎報)가 비문을 지었다.

 월남사 터에 있는 이 석비는 사찰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월남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세운 사찰로 진각국사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자는 영을(永乙),

 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1988년12월21일 전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월남사지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

 월남사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

 (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 즉,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지>에 ‘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동국여지지>를 쓸 당시

 (1649∼1659) 이미 월남사는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있는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출산 남쪽 평지에 위치한 월남사지에는 현재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터로 보이는 기단부와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지(金堂址)에는 월남사의 건물 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기와편과 청자·백자편,

 탑재로 쓰인 직사각형의 판석들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모전석탑 우측에 있는 어느 민가의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절터 안의 백제계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법당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최근에 현 모전석탑 서측(向左)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월남사지에는 원래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전석탑과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모전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기록대로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모전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백제계 탑들이 고려 초기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이다.

 그중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