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기행] 천년고찰 관음기도도량 강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와 선각대사편광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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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기행] 천년고찰 관음기도도량 강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와 선각대사편광탑비..

by 정산 돌구름 2013. 3. 12.
천년고찰 관음기도도량 강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와 선각대사편광탑비..

 

탐방일 : 2013년3월1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無爲寺)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39년(617년)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통일신라 헌강왕1년(875년)

  도선(道詵國師)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고려 정종 1년(946년)에는 선각(先覺)국사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태종7년(1407년) 무위사가 천태종(天台宗) 17자복사(資福寺)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12년(1430년) 극락전을 지었는데 현재도 남아 있다. 명종1555년(명종 10) 태감(太甘)이 4창하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있는 당우는 극락전명부전,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

  (焚香閣)·천불전(千佛殿)·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동안 이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해탈문·명부전·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천왕문(天王門)..

사찰을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막돌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두를 얹었으며, 공포는 외부로 1출목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 한 2익공식이다.

중앙 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로 하고, 좌우 각 1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좌우에 2구씩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눈을 부릅뜨고 아귀를 밟은 채, 보탑ㆍ비피ㆍ칼 등의 지물을 들고 서 있다.

무섭게 보여야 할 사천왕의 상호는 다소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천왕중, 왼쪽의 용을 쥐고서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며,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준다. 

오른쪽의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칼을 잡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여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돕는 천왕이다..

 

보제루..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단층 겹처마 건물로 되어 있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1983년 대량 상부를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

(墨書銘)을 통해 이 극락전만큼은 1430년(세종 12) 효령대군(孝寧大君) 등에 의해 건립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으며, 기단은 앞쪽만 높게 쌓고 옆면과 뒷면은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住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을 가진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기둥머리에는 2출목의 공포를, 외포의 끝은 제공처럼 되어 있고, 내포는 1장의 판으로서 파련(波蓮) 무늬를 새긴 운공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가운데칸 양쪽 포 위에 놓고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올려놓은 뒤,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

과 ㅅ자 솟을합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렇듯 가구구조는 2중량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건물 외부에서 보면 2종량 구조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高柱) 위에 중종보만이 걸쳐져 있고 그밖에 창방ㆍ퇴보ㆍ장혀 등 작은 직선재로 측면을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전면은 격자모양ㆍ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 넓은 공간인데, 중앙부 뒤쪽에 불단을 마련하고 천장은 중앙 칸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불단 위쪽에는 닫집모양의 보개를 올리고 불단 위에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으며, 마루 아래에는 전돌이 깔려 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30여 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백의관음벽화만 남기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 보관하고 있다. 그밖에 사자고대(獅子鼓臺) 위에 봉안된 법고(法鼓)와 범종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 벽화들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49일간 절대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주지스님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궁금증을 참을 길 없어 마지막 49일째 날,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 법당 안을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주지스님이 놀라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렸고,

따라서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극락보전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현재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측(향우)에는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을,

우측(향좌)에는 석장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모두 개금처리와 개채가 되어 있는데, 다소 미숙한 개금처리로 인해 표면이 거칠어졌을 뿐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이 아미타불좌상은 연화대좌와 불신이 하나이며,

통견의 법의에 손은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고려 후반기의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사라져 근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와 처진 가슴, 간략화하고 정형화된 옷주름, 가슴 아래로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평행 띠주름, 금구장식의 소멸 등

조선 초기 불상들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다...

 

좌협시상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양식이며, 화려한 금속제 보관을 쓰고, 양어깨 위로 굽실거리는 보발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정인과도 같은 손가짐을 취하고 있는 두손에 보병을 받쳐 들고 있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간단한 가슴장식이 있다.

앉은 모습은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대좌와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앞쪽의 옷자락 또한 몸으로부터 흘러내리지 않고 대좌와 함께 조성됨으로써 몸체와 분리되는 특색이 엿보인다.

본존 우측 지장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 대칭하여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석장을 짚고 있다.

세 상(像) 가운데 비교적 갸름한 형태의 얼굴을 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걸터앉은 듯 오른 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상에서도 역시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앞쪽 옷자락을 몸체와

분리하여 대좌와 함께 조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후기 불상조각 양식의 계승과 함께 조선 초기 불상양식의 정립이라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조성연대는 1934년 보수 당시 발견된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국보 제44호) 석탑지(石塔誌) 내용 중의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

(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무위사조주불(無爲寺造主佛)…" 기록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1478년경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 삼존불은 고려 후기를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으로, 우리나라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각각의 크기를 살펴보면 본존불은 총높이 122㎝, 머리높이 34㎝, 어깨폭 48㎝이다.

관세음보살은 총높이 146㎝, 머리높이 40㎝, 어깨폭 46㎝이고, 지장보살은 총높이 140㎝, 머리높이 30㎝, 어깨폭 43㎝ 등이다..

 

극락보전 아미타후불벽화(阿彌陀後佛壁畵)

보물 제1313호이며,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벽화로서, 화면의 크기는 가로 210cm, 세로 270cm이다..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해 별도로 세운 흙벽에 채색그림으로 그렸다.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지장보살이 시립한 아미타삼존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벽화는,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 초기의 새로운 수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걸작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중앙의 본존불은 거대한 키 모양 광배 안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왼손에 석장을 잡고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서있는 구도이다.

구름을 배경으로 한 화면의 상단 좌우로는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만 드러내고 채색을 부드럽게 하여,

중앙 삼존으로 향하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다시 그 위에는 서광이 펼쳐진 가운데 좌우로 소형의 좌불(坐佛)이 각 2불(佛)씩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도적 특징은 16관경변상도를 이어받은 조선 초기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1465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어,

16관경변상도의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이 단독으로 그려진 듯한 구도이다.

삼산형의 머리 윤곽과 신체의 부피감, 괄호 모양의 이마 처리, 법의의 금선문양 표현, 두건 쓴 모습의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투명한

겉옷과 치마 끝단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온화한 색채 등은 고려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요소이다.

반면, 큼직한 육계와 정상계주, 발 위로 길게 내려뜨린 왼손, 간결한 문양, 사각대좌와 키 모양 광배, 발목의 레이스 모양 옷자락 표현,

본존불과 대등한 크기의 기타 인물표현 등은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오른쪽의 내용에 '○○십이년병신삼월초 길화성무량수여래관세음지장보살…

화원 대선사해련(○○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畵員 大禪師海連)…'이라 밝히고 있으나 연도부분이 퇴락하여

조성연도를 알 수 없었는데,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북탑지(北塔誌) 내용 중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

중수조(重修造)…무위사조주불설대회안거(無爲寺造主佛設大會安居)'라는 기록이 있어, 성화 12년(成化十二年)인 1476년에 화원

대선사 해련(海連)이 조성한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이 벽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것으로, 고려양식을 띈 조선초기 불화의 전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보전 칠성탱(七星幀)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여, 사각의 좌대 위 연화좌에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를 크게 그리고,

그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과 칠여래ㆍ칠원성군ㆍ태상노군ㆍ육성군을 배치한 화면구도이다.

신중탱과 마찬가지로 1995년에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다...

 

극락보전 신중탱(神衆幀)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 화면 중앙에 위태천을, 상단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한 구도이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 사이에 5명의 주악동자(奏樂童子)와 주악동녀(奏樂童女)를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6위(位)의 신중을 배치하였다. 화면 하단 중앙에 기록한 화기에 의하면 이 신중탱은 1995년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다...

 

무위사 괘불석주(掛佛石柱)..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괘불석주로, 높이는 각각 114cm와 109cm이다.

위ㆍ아래에 모두 17cm의 구멍이 있고, 극락보전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석주에는 옆면에다 조성연대를 새겼다.

명문은 세로 2줄로 ‘강희십칠년무오일○자조성야(康熙十七年戊午日○字造成也)'라 새겨, 1678년(숙종 4)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괘불석주는 괘불대를 끼워 괘불을 세우는 기둥으로 흔히, 괘불석주와 당간지주를 혼동하는데 당간지주는 절입구에 있는 큰 돌기둥이고

괘불석주는 대웅전이나 법당 앞에 2개가 한조를 이루어 양쪽에 서있는 작은 돌기둥이다. 괘불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배례석(拜禮石)..

극락보전 앞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으로 길이 130cm, 너비 98cm, 높이 9cm이다.

배례석은 불전이나 탑 앞에 배치하여 그 위에 향로나 제기를 올리도록 한 장치이다.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單瓣八葉)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의 원좌(圓座)에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주위에는 방형 1단의 괴임을 나타내었으며,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로 기단을 형성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놓고 창방을 걸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혀 사이로 소로를 끼웠다.

가구(架構)는 앞뒤 평주 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놓은 다음 종보를 얹은 5량집이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상 등을 봉안하였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그 주위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판관, 사자, 귀왕, 장군상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상은 목조로 되어 있으며, 민머리형에 원만한 상호를 띄고 있다.

통견의 법의에 지물은 들고 있지 않으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상, 그리고 각 2구씩 조성되어 있는 판관, 귀왕, 사자, 장군상은 지장보살과 함께 모두 목조로 조성되었으며,

소형의 판관상 2구만 소조로 조성되어 있는데, 지장보살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위사 삼층석탑(三層石塔)..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96cm이다.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인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406cm,  비신 높이는 250cm, 이수 높이는 56cm이다.

극락보전에서 천불전 쪽으로 30m 정도 가다보면 미륵전 못 미쳐 남향으로 서 있는 비를 만나게 된다.

이 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의 탑비로, 비명(碑銘)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

塔碑銘幷序)’이며, 당시 태상(太上)인 최언위(崔彦撝,868~944)가 글을 짓고, 유훈률(柳勳律)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인 고려 정종 1년(94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출신으로 법휘(法諱)는 형미(逈微)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그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의 심인(心印)을 받고 905년에 귀국,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 한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는 양각으로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하였고,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갑문을 정연하게 양각하였다.

비좌(碑座) 전후 2면에는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 운룡문(雲龍文)과 반결 쌍용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편액에는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이라 적혀 있고 '법철(法哲)'이 썼다고 씌어 있으며, 내부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山神幀)..

바위산과 그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의지한 채 호랑이에 걸터앉아 있는 산신을 그린 것이다.

산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동자는 허리춤에 호리병을 찬 채 커다란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동자가 서 있는 곳이 공중인지 바위 끝인지 불명확한 점 등 구도가 다소 불안하다.

구름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소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잘린 듯하며, 달인지 해인지 분간되지 않는 일월(日月)이 표현되어 있다.

화기에 의하면 1991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조성하여 강진 무위사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화원은 김소영(金昭映)임을 알 수 있다..

 

미륵전(彌勒殿)

정면과 측면 각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석불입상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다...

 

석불입상(石佛立像)..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 독지가들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현재 하단부가 마루바닥 밑으로 들어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마루까지 218cm이다..

 

천불전(千佛殿)..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금동아미타삼존상과 많은 사람들의 원불인 천불상이 각각의 번호를 가진 채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는 중앙에 삼존불과 그 뒤로 천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성연대는 건물의 건립시기와 같이 하는 1970년대 후반이다...

 

삼존불상은 동제(銅製)로 중앙의 본존은 좌상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우 협시는 보관을 쓴 보살로,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지만 우협시 보살은 정확한 명호를 알 수 없다...

 

천불상 역시 삼존불상과 마찬가지로 재질은 동제이며, 한 틀에서 주조하여 불상의 상호가 모두 동일하다..

 

최근에 신축한 나한전..

 

나한전 석가삼존상 및 16나한상(釋迦三尊像ㆍ十六羅漢像)..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극락보전에 있던 옮겨 놓은 것이다.

중앙에는 삼존이 봉안되었고, 좌우에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중앙의 삼존불좌상은 수기삼존으로,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맺고 있는 석가여래이며, 좌우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불상의 재질은 모두 석조이다.

16나한상 또한 석조로 삼존불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양식적 특징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9세기 후반 경으로 보인다..

 

 

 

범종각(梵鍾閣)..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져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996년에 조성한 범종을 봉안하였다..

 

 

 

일명부도(逸名浮屠)..

무위사 주차장에서 향좌측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고, 개울 건너편에는 산과 맞닿아 논밭이 이어져 고승의 부도 1기가 서 있다..

 

부도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 앙련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에는 명문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마모되어 판독되지 않는다. 옥개석은 처마를 들어올린 듯한 모습의 팔작지붕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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