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3년3월10일
○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 백련사(白蓮寺) 소개
통일신라 문성왕1년(839년) 무염(無染)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는 만덕사(萬德寺)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으며,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1426년 주지 행호(行乎)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으며,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丹靑)이 잘되어 있는 다포(多包)집 건물이다.
이 밖에 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七星閣)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보물 제1396호인 백련사 사적비는 대웅전에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귀부(龜趺)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碑身)와 이수(이首)는 1681년(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1962년12월3일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 백련사 앞에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다.
1.3ha에 약 1,500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주변에 비자나무·후박나무·푸조나무가 곁들여 자라고, 밑에는 차나무가 있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높이가 7m에 달하며,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이 되는 것이 많고,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다.
꽃은 2~3월에 피고,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꽃잎은 5∼7개가 밑에서 합쳐져서 비스듬히 퍼진다.
동백나무는 한국의 남쪽 난온대지방 식생의 대표수종이며, 종자에서 머리기름을 낸다...
이곳의 동백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는데, 이 길은 옛날 정약용이 백련사를 왕래할 때 이용하던 길이라고 한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없고 텅 비어있다..
육화당(六和堂)..
강진만 풍경..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벽화는 부처님의 교리를 알리기 위한 목적과 건물의 외벽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두가지 이유로 그려진다.
네번째 벽화는 게으른 제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 물고기로 만들었는데, 그 물고기 위에 나무가 자라게 되어
그 나무로 목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오른쪽에 있는 얘기는 호랑이에게 쫓겨 낭떠러지의 밧줄에 매달려 있는데,
꿀의 단맛에 취해 자신의 처지를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현판 ‘대웅보전’ 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인데 그가 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내부에는 삼세불과 후불탱, 신장탱, 삼장탱이 모셔져 있고, 또한 백련사의 사역을 알려주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와 '해탈문중수기'가
현판형식으로 걸려있다...
대웅보전의 불단은 삼세불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불을 주존으로 왼쪽에는 약사불, 오른쪽은 아미타불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하여, 부처님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이 삼세불신앙은 무병과 장수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형식이다...
뒤에는 중앙에 석가후불화인 영산회도, 왼쪽에는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극락회도를 배치한 후불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 신중탱(神衆幀)
신중탱화는 일정한 형식없이 복잡한 구도이지만, 일반적으로 중앙에 제석을 모시고 좌우로 무기를 든 신장들이 배치되는 형식이다.
신중은 인도 재래신들을 불교에 수용하여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으로 개인의 재난을 막아주고 불법과 사원을 보호해주는 호법신이다.
'만덕산(萬德山)'과 '백련사(白蓮社)'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절의 본래 이름이 '만덕산 백련사'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근래 다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대웅보전 삼장탱(三藏幀)..
삼장탱은 지장보살의 발전, 확대된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다.
삼장보살은 천장(天藏), 지지(持地), 지장(地藏)보살을 일컫는것으로 이 삼장보살을 중심으로 삼계의 보살과 권속들을 그리고 있다.
중앙에 천장보살이 설법인을 결하고 앉아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의 협시를 받고 있으며, 왼쪽에 지지보살은 용수보살과 다라니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명부전(冥府殿)..
대웅보전 바로 왼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현재 명부전에는 1775년(영조 51)에 지은 '시왕전중수기', 1942년에 쓴
'명부전중수', 1969년에 쓴 '명부전중수기' 등 3점의 중수기록 기문이 걸려 있다. 이를 보면 1775년에 시왕전을 중수한 이후
1942년과 1969년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때는 시왕전이 아니라 전각 이름을 명부전으로 바꿔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후 익공을 짰는데 출목 하나를 두었다.
서까래 위에 부연을 겹처마로 구성하였고,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를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고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단청은 매우 간단하며, 전체적으로 목부재는 주칠, 측면 인방재만 푸른색을 칠하였고, 정면에만 2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을 쳤다..
안에는 내부에는 ㄷ자형 불단을 조성하고 지장상을 비롯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 및 시왕상과 판관, 녹사, 인왕상 그리고 사자상 등
지장보살의 권속을 봉안하였으며,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시왕상들이 협시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이 죽은후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의 육도의 윤회에서 영원히 헤매며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소원을 세운 보살이다...
시왕 10체와 판관·녹사·인왕상 각 2체 그리고 사자상 1체 등 지장보살의 권속이 봉안되어 있다.
시왕들은 초칠일에서 칠칠일까지, 백일, 일년, 삼년의 10차례에 걸쳐 매차례 한분씩 재판을 하며, 삼년 사이에 태어날 세계가 결정된다..
명(冥)이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여, 지옥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님과 십대왕들을 모시게 된다..
응진당(應眞堂)..
대웅보전 왼쪽 언덕 위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운두가 높은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치목하였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후 익공을 짰는데 출목을 둔 이익공이다.
천장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고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안에는 'ㄷ'자형 불단을 만들고 그 위에 상을 안치하였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상을 비롯하여 아난과 가섭 등의 16나한상을 봉안하고, 본존상 뒷벽에는 후불탱화인 영상회상탱을 걸었다.
절에서는 응진전으로 부르고 있으나 현판은 응진당으로 적혀 있다..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로 응진당을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한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다문제일의 아난과 두타제일의 가섭이 협시를 이루며,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인데, 나한상들은 제각각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모임지붕의 정자(亭子)식 건물로 범종이 걸려 있는데, 범종은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친다고 한다..
육화당(六和堂)..
육화란 석가모니가 교단의 화합과 대중 수행에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기 위에 6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신 6가지 발원을 말한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대웅전 마당에서 보면 1층이지만 누각 앞마당에서 보면 2층 건물이다.
기존에 있는 요사채를 1995년에 확장 중수한 건물로 1층은 식당, 찻집 등으로 사용하고, 2층은 객실로 쓰고 있다..
요사채..
육화당 외에 요사 2동이 있다. 한 채는 육화당 뒤편에 있는데 ㄱ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다른 한 채는 종각 왼쪽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응진당 옆의 천불전..
천불전에는 중앙에 삼존불과 그 뒤로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1396호)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190㎝×110㎝이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비신 전면 상단에는 자경 15㎝의 전서체로「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횡서로「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랑선군 이우(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랑원군 이간이 썼다.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 바,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118㎝×29㎝이며, 이수는 170㎝×75㎝이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연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만경루(萬景樓)..
대웅전의 동일 축선상 맞은편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백련사 주출입 통로 정면에 있는 누각이다.
원래는 만경루 밑을 지나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도달하는 누하진입방식이었으나 지금은 누각 왼쪽에 난 계단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안에는 1817년(순조17) 응언(應彦) 스님이 지은 '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이 걸려 있다..
자연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쌓았는데 서로 만나는 면을 그랭이해서 깨끗하게 다듬었다...
누하주를 받친 초석은 널찍하고 운두가 높은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휘고 구부러진 자연재를 크게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였다.
기둥머리는 귀틀을 짜서 상층 바닥을 만들었다. 상층기둥은 원형으로 하층 기둥에 비해 정연하게 다듬었다.
하층은 측면 2칸인데 비해 상층 좌우 측면은 3칸처럼 가운데에 기둥 2개를 세워 대들보를 받고 있다.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어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며 좌우는 풍판을 달았다.
누각 출입은 어칸을 제외한 칸의 나머지 문을 사용하는데 이에 따라 배면에는 어칸을 뺀 나머지 칸 앞에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만경루에는 '백련사(白蓮寺)'라고 적힌 사액이 걸려 있고, '만경루' 편액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오른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는데 제법 반듯반듯한 돌을 1단 쌓아 기단은 널찍한 자연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익공을 짰는데 초익공이며 주간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고, 천장은 구조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다.
구조는 간결한 3량가로 결구하였고, 서까래만 쓴 홑처마이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고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다.
정면 3칸에만 출입문을 달았으며, 문은 2분합문으로 하부에 궁판을 두고 상부는 빗살로 짰다.
현재 건물은 불기 2543년인 1999년에 새로 지었는데, 어칸 종도리에 먹으로 쓴 상량문이 남아 있다
..
내부에는 뒷벽에 붙여 일자형 불단을 조성하고 독성탱을 중심으로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칠성탱(七星幀).. 중앙에는 치성광여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다.
칠성은 자연재해를 주관하며, 자식을 원하는 민간적인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여래로 승격된 분으로 주존은 치성광여래이다
산신탱(山神幀)..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 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있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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