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3년3월10일
○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32
○ 월남사지 소개
1988년12월21일 전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면적은 33,106㎡이며,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
월남사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
(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 즉,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지>에 ‘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동국여지지>를 쓸 당시
(1649∼1659) 이미 월남사는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있는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출산 남쪽 평지에 위치한 월남사지에는 현재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터로 보이는 기단부와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지(金堂址)에는 월남사의 건물 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기와편과 청자·백자편,
탑재로 쓰인 직사각형의 판석들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모전석탑 우측에 있는 어느 민가의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절터 안의 백제계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법당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최근에 현 모전석탑 서측(向左)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월남사지에는 원래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전석탑과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모전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기록대로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모전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백제계 탑들이 고려 초기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이다.
그중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다.
○ 월남사지 삼층석탑(三層石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8호로 지정된 높이 7.4m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월남사터에 남아 있는 단층 기단(基壇) 위에 세운 3층 석탑으로, 기단이나 탑신부를 여러개의 작은 석재(石材)로 각 부를 구성하였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각형으로 돌려놓고 중앙에 높직한 하대석을 놓고 있는데, 그 위에 우주석(隅柱石)과 면석을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역시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1층 탑신이 2, 3층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고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고,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塼塔, 벽돌 탑)처럼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으며,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 있다.
탑의 상륜부에는 받침 위에 장식한 석재가 남아 있으며,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체감률이 낮다.
전탑의 외모를 지녔다고하여 모전석탑이라고 하였으나, 여러 개의 판석형 석재를 끼워넣어 결구한 수법으로 보아 전탑이라 볼 수 없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특징이다.
석재 결구에서 백제탑 양식을 많이 따른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3층석탑의 전설..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조각한 석공에게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었다. 석공은 아내를 멀리 떠나는 일이 안타까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내에게 “탑을 완성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절대로 나를 찾지 마시오.”라고 이르고 월남사로 떠났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아내는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로 찾아왔다.
먼발치에서 삭탑을 쪼는데 열중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그냥 돌아서기가 너무나 아쉬워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보았다.
혼잣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아내는 돌로 변해 버렸다. 석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어루만져 보았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석탑을 만들어야 했지만 인근에 쓸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돌로 변한 아내를 옮겨 눈물로 이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1963년1월21일 보물 제313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58m, 폭 2.3m으로, 고려 고종 때 세워진 비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비이며, 직사각형 대석 위에 같은 크기의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있고, 대석과 귀부는 단일석이다.
여의주를 머금고 있는 귀부는 강렬한 사실적 조각 기술을 보이는 조형이며, 비좌에는 간결하게 구름무늬를 새겼고, 비신은 편마암이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린 형태로 비신 상반부는 잘렸으며, 현재 남아 있는 하반부도 새긴 글자의 풍화 마멸이 심하여 비문(碑文)의
내용을 판독하기 어렵다. 진각국사비는 고려시대의 문신·문인인 이규보(李奎報)가 비문을 지었다.
월남사 터에 있는 이 석비는 사찰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월남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세운 사찰로 진각국사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자는 영을(永乙),
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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