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기행] 국보 제57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 철감선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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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기행] 국보 제57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 철감선사탑비

by 정산 돌구름 2012. 9. 27.
[화순기행] 국보 제57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 첨감선사탑비

 

탐방일 : 2012년 9월 21일

소재지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741

철감선사(徹鑒禪師) 도윤(道允) 소개

 도윤은 통일신라의 승려로 중국에 건너가 보원(普願)의 법을 이었고, 귀국한 뒤 금강산에 머물며 제자양성에 힘썼다.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선승으로 속성은 박(朴), 호는 쌍봉(雙峰), 시호는 철감선사(徹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798년(원성왕14년) 한주(漢州, 경기 廣州)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신이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825년(헌덕왕 17년) 중국 당나라에 가서 보원(普願)에게서 심인(心印)을 배우고 그 법을 이었다.

 847년(문성왕 9년)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경문왕도 그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868년(경문왕8년)4월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죽을 때 오색광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 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창건한 쌍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로 우리나라 석조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년(경문왕 8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

 

 

쌍봉사 경내에서 조금 벗어나 뒤편으로 오르면..

 

철감선사탑과 탑비..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이 탑은 8각 원당형(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로 현재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우수한 걸작품으로, 상하 각부가 조화롭고 장중한 작풍(作風)을 느끼게한다.

 

높이는 2.3m이며 하대석 1매, 중대석과 상대석이 1매, 몸돌 1매, 지붕돌 1매의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위에는 둥근 철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수법에서는 목조 건축양식을 본뜨고 있어, 그 무렵 건축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75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시멘트로 보강되었으나 팔각이었을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같은 돌로 2단의 팔각형 굄을 둔 후 두 단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을 놓았다..

 

하대석 하단은 각이 없이 둥근데, 옆면은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구름무늬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고 정면에서 두 용머리가 마주보며 그 가운데 발로 여의주를 받고 있다.

하대석 상단은 팔각이며 귀퉁이마다 연잎을 말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사자를 한 마리씩 양각했다.

여덟 마리의 사자는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젖혀 뒤를 돌아보거나 뒷발을 물고 있는 등 저마다 생생한 모습이다.
중대석과 하대석의 여결부위는 하대석 윗부분을 안으로 파서 그 안에 중대석 아랫면이 끼도록 되어 있다.

팔각을 이룬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아래위로 날개처럼 펼쳐진 연잎으로 기둥을 조각하고,

그 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가운데에 얼굴이 매우 큰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상대석은 둥근 연화대와 팔각의 몸돌 굄대로 이루어졌는데, 굄대가 매우 높다.

연화대 측면에는 16장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꽃잎 뒷부분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돌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상다리 모양의 기둥을 원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깊게 판 후, 비파·나팔·장구·바라 등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하나씩 새겼다.

윗부분은 갑석처럼 두드러져 나왔는데, 그 각 측면도 그대로 두지 않고 가느다란 선무늬를 넣었다.

아래의 상다리 기둥 표면에도 같은 무늬가 있고, 몸돌 바로 아래에는 팔각으로 둥그스름한 굄과 각진 굄이 있다.

둥그스름한 굄에는 자잘한 연꽃잎을 한 변마다 7장씩 엎어 새겼고, 팔각 몸돌의 각 귀퉁이에는 배흘림된 둥근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 목조건축의 짜임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몸돌 앞뒤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이 새겨져 있고, 앞뒷문 좌우에 사천왕상이,

나머지 두 면에는 옷자락을 날리며 내려오는 비천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지붕돌 또한 팔각을 이루어 낙수면이 묵직하게 흘러내렸고 기왓골이 정연한데, 기와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특히 수막새 기와에는 8엽의 연꽃무늬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고, 처마 밑에는 목조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연목과 부연이 표현되었다.

처마 아랫면에는 5곳에 비천상, 2곳에 향로, 나머지 2곳에 꽃무늬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각부의 조각은 정교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모든 모서리와 구석은 단호하게 각이 졌고 몸돌의 사천왕상은 옷매듭까지 여실하며,

지름이 2cm 남짓한 막새기와 안의 연꽃무늬는 정교하기 그지없다.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경문왕 8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9세기 말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이 탑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비신은 유실되었다.

이수 전면에 위패형의 액을 만들고 그 안에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雙峰山故澈鑒禪師碑銘)'이라는 명문을 서종으로 2줄 음각하였다.

두줄 10자 명문이 남아있어 탑비와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고, 조성연대도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 후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868년(경문왕 8년)에 입적한 철감선사(澈鑒禪師)의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마을에 전하는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비신이 없어졌는데,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한다.
비신(碑身)이 없어 철감선사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折中, 825~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한 뒤 김제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며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은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했던 범일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868년(경문왕 8년) 4월18일에 입적하였다.

경문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있으며 높이가 아주 낮고 깨진 부분 없이 완전히 잘 남아 있다.

용두(龍頭)화된 귀부의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입에는 둥근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하나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입가에는 활짝 펼친 날개 같은 것이 있다..

 

 

 

거북은 중앙에 복갑(腹甲) 형식의 중첩문이 정연하고 등에는 중곽의 육각구갑문(六角龜甲紋)이 선명하다.

갑(甲)의 바깥 선에는 귀갑문이 반으로 자른 듯 옆으로 선명하게 돌려져 있으며,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만들고,

연문을 돌린 후 그 윗면에 3단의 각호(角弧) 괴임을 조각하였다.

귀부의 네 발은 발가락이 3개씩인데 오른쪽 앞발만 발가락을 위로 들고 있어 마치 귀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수는 비신을 덮고 있는 밑면을 제외한 5면에 운룡문(雲龍紋)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세마리 용이 좌우와 중앙 상단에 꿈틀거리고 있으며, 후면은 두마리 용이 서로 몸을 뒤틀며 허공을 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수 정상부에는 보주형 귀꽃이 3개 솟아 있었으나 향 좌측의 것은 유실되고 없으며 그 자리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나머지 2개는 원석에 조각하였는데 유실된 부분만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별조하여 끼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