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9월 21일
○ 소재지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741
○ 쌍봉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9년(847년)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이후 퇴락한
절을 문종35년(1081년)에 혜소국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인조6년(1628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현종8년(1667년)과 경종4년
(1724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로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 밖에도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있다.
쌍봉사교를 지나면 거대한 일주문, 쌍봉사자문...
그리고 천왕문..
1990년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거물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등 사천왕상이 있다...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방을 수호하며 몸은 백색이고 갑옷을 입고 손에는 비파를 음악을 사용하여 중생을 불도로 이끌고 수호한다.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방을 수호하며 몸은 청색이고 갑옷을 입고 손에 보검을 쥐고 있다.
이름과 같이 중생의 복덕과 선근을 증장시키며 손에 든 보검으로 사마외도로부터 불법을 수호하고, 모든 구반다를 통솔한다..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몸은 백색이고 갑옷을 입고 손에 용을 잡고 있다.
광목이라는 천왕의 이름과 같이 큰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여 중생들을 수호하고 용왕들을 통치한다.
다문천왕((多聞天王) 은 북방을 수호하며 몸은 녹색이고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보배우산 혹은 보배깃발을 들었으며 왼손 손바닥에
고불의 사리탑을 받들고 있기 때문에 탁탑천왕이라고도 한다. 다문의 명칭은 이 천왕의 복덕과 부가 온 세상에 널리 들린다는 의미이다.
이 천왕은 야차들을 통솔하여 보배우산으로 사마외도들을 물리치고 중생들의 재물과 부귀를 수호한다..
뒤편에는 해탈문(解脫門).. 해탈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사찰과 세속의 세계를 구획하였다.
해탈은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려 미혹의 고통에서 풀려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또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등 3종의 선정은
열반에 들어가는 문으로 해탈문이라고 한다..
쌍봉사 대웅전(大雄殿)..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즉, 이 건물이 숙종16년(1690년)에 중창되고, 경종4년(1724년)에 3창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초창의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다.
정유재란에 전소된 것으로 추정하여 병자호란 이전 인조 때 중건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로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희귀한 문화재의 인멸을 방지하기 위하여 1985년 8월5일 복원 공사에 착공, 1986년 12월30일 준공하였다.
소실 이전의 모습은 3층으로 지붕이 팔작형식이었는데, 현재는 사모지붕의 목탑 지붕형식으로 바꾸고 상륜부까지 보완하였다.
각층마다 옥신은 4면이 한 칸의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1층 1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로, 2층과 3층에서는 옥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어 벽체 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가 2ㆍ3층은 2출목, 초층은 3출목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1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2,3층은 하나로 튼 통층(通層)이며 중심에 심주(心柱)가 하나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1962년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724년(경종 4)에 3중창할 시기의 상량문이다.
2중창에서 3중창에 이르는 기간이 30여 년에 불과하여 3중창은 부분적인 중수공사인 것으로 여겨지며, 1690년(숙종 16) 2중창 당시에
세운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인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좌상은 1984년 대웅전에 불이 났을 때 다행히도 타지 않고 보존되었다.
석가여래좌상의 좌우로 아난과 가섭존자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한 채 시립하고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전체높이 120㎝로 얼굴이 넓적하여 사각형에 가까우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작은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백호는 작게 처리하여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으며, 눈은 일자형으로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다.
반원통형에 가까운 코는 콧볼의 상단만 약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하였으며 입은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귀는 크고 두툼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法衣)는 통견이며 두툼한 질감이 느껴진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여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자연스럽게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발 바닥
위에 놓고 별조하여 손목 속에 끼워 넣었다.
불상의 하면은 목판으로 마무리하였는데 가운데에 가로 19㎝, 세로 10.5㎝ 크기의 장방형 복장공이 뚫려 있다.
불상 조성 발원문에 의하면 이 석가불은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가섭과 아난존자와 함께 1694년(조선 숙종 20)에 조성된 것이다.
발원문은 극락전과 삼층전(현재는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음)의 불상을 동시에 만들고 쓴 발원문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조성동기, 불상 조성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괘불지주(掛佛支柱)..
대웅전 앞 정원에 놓여 있는 괘불대 지주는 양쪽에 2개씩 1조를 이루고 있지만 원래의 자리에서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상부는 각을 없애고 호형으로 다듬어 모나지 않게 마무리하였고, 상부와 하부의 두께가 거의 일정하며 단면의 형태는 세장방형이다.
각각 상하에 구멍이 뚫려 있고 문양이나 명문은 없으며 면이 다소 거친 편이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며, 쌍봉사에도 괘불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극락전(極樂殿)..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는 쌍봉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다포계 양식의 단아한 건물이다.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될 때 대웅전과 함께 보전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이 1984년에 소실된 점을 생각하면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 앞에 자리잡은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행여 법당을 가릴 새라 각기 바깥쪽을 향해 비스듬히
서있는 모습이 극락전의 운치를 더욱 살려 주고 있다...
건물형태는 잡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축대 위에 낮은 외벌대의 기단을 구성하였다.
커다란 덤벙주초를 놓은 뒤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포작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 2출목으로 주 칸마다 공간포를 1좌씩 배치하였고, 설첨자 부분에는 연봉과 봉두를 깎아 장식하였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앞쪽의 처마는 부연을 내달은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흩처마이며, 처마 양측에 풍판을 달았다.
가구구조는 평5량으로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얹은 다음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치는 일반적인 형식을 하고 있다..
극락전에는 현재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조지장보살좌상 1구와 신중탱ㆍ칠성탱ㆍ독성탱 등 3점의 불화, 범종 등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극락전에는 아미타삼존불로서 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과 좌측에 관세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었으나,
1989년에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현재 아미타여래좌상만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은 전체높이 165㎝로, 넓적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등이 약간 굽어 있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정상에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백호는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다. 일자형에 가까운 눈, 반원통형의 코와 콧볼의 상단만 약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한 점,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 크고 두툼하며 귓볼이 뭉툭한 귀, 삼도(三道)가 얕게 패인 짧은 목, 양 어깨를 감싼 두툼한 통견의 법의(法衣) 등이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흡사한 모습이다...
수인은 미타정인(彌陀定印)으로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을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자세는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걸쳐 앉아 있고, 허리는 짧고 통통한 편이며, 원래의 대좌는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694년(숙종 20) 같은 사람에 의해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두 불상은 조각형식이 거의 흡사하다...
극락전 신중탱은 상하 2단 구도로, 상단에는 제석과 범천을 배치하고 하단 중앙에는 금강저를 든 채 합장하고 있는 위태천을 배치했다.
위태천 옆으로는 칼과 창을 들고있는 무장이 배치되어 있고, 그림의 하단에 화기가 있으나 다소 훼손되어 있으며, 덧쓰인 부분도 있다.
화기에 의하면 1936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에는 홍관사(弘觀寺)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신탱과 칠성탱의 하단 화기를 보면 1984년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는 독성탱도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산신탱은 백발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산신을 중심으로 호랑이와 동자, 천녀들이 배치되어 있고 뒤의 배경은 소나무와 기암절벽을
수묵채색으로 그려 깊은 산속을 표현하였다.
칠성탱은 수미단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는 손에 금륜을 들고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앞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해와 달을 손에 들고 협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는 도포를 입고 머리를 묶은 성군(星君)과 머리가
높게 솟은 필성(弼星)등이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맨 끝줄에 칠여래가 늘어져 있다...
나한전(羅漢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법당 내부에는 중앙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아난과 가섭존자 상을 포함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었다.
또한 판관상 2구, 인왕상 2구, 동자상 4구가 목조로 조성되어 봉안되어 있는데, 건물과 불상은 모두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쌍봉사 나한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상호는 네모난 편으로 머리에는 넓적한 육계와 반월형 계주가 솟아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승각기 매듭이 가슴 윗부분에 처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본존불 좌우로는 아난ㆍ가섭존자를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협시인 아난과 가섭존자는 입상이고 나머지 나한상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나한전에는 목조로 된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동자상 4구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柱心包) 건물로 근래에 조성되었다..
건물의 측벽과 후벽에는 지옥세계를 묘사한 외벽화로 장엄되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아 각 4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고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당시 쌍봉사의 전경 사진에는 지금의 명부전 자리에 '호성전'이라는
정자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지금의 지장전 건물은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현재의 논위에 지어져 '오백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오백전 건물을 지금의 지장전 자리로 옮겨와 시왕상을 모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내부 중앙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목조도명입상과 무독귀왕 입상 및 목조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목조시왕상은 일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장보살의 양 옆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서있는데, 도명존자는 높이 146㎝로 민머리에 합장하고 있으며,
무독귀왕은 높이 148㎝로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가려져 있다...
주존인 지장보살을 비롯,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상(十王像), 판관(判官), 귀왕(鬼王), 동자(童子), 사자(使者) 등
21구의 목조각상이 있는데, 지장보살은 팔각대좌에 앉은 모습이고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모두 입상이다.
지장보살은 높이 104㎝로 민머리이며, 머리·눈썹·수염의 모든 털을 녹색으로 처리하였는데, 민머리 모양을 제외한 형식은 불상과 같다.
이마에는 백호,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이고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지장삼존의 양 옆에는 머리에 관을 쓴 시왕상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 형태가 모두 다르다.
시왕상에서 일부 복장물이 확인되었고, 시왕들 사이에 판관·귀왕·동자 등의 조각상이 서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1667년(현종 8)에 조성된 것으로, 빼어난 조각솜씨로 예술성이 뛰어나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현재 일괄로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梵鐘閣)은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으로 기둥을 세워 겹처마에 사모지붕을 올린 익공식(翼工式) 건물이다.
천정은 서까래를 노츨시킨 연등구조이며 중앙에 성덕대왕신종을 본떠 주조된 범종이 걸려 있다..
T자형을 이루고 있는 호성전(護聖殿)은 2000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쌍봉사의 요사(寮舍)는 전각들이 있는 중심영역 좌우에 영역을 달리하여 위치해 있다.
주지스님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는 육화당(六和堂)과 선방인 다성암(茶性庵), 그리고 종무소와 식당 등이 있다..
쌍봉사 경내에서 조금 벗어나 뒤편으로 오르면..
철감선사탑과 탑비..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이 탑은 8각 원당형(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로 현재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우수한 걸작품으로, 상하 각부가 조화롭고 장중한 작풍(作風)을 느끼게 한다...
높이는 2.3m이며 하대석 1매, 중대석과 상대석이 1매, 몸돌 1매, 지붕돌 1매의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위에는 둥근 철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수법에서는 목조 건축양식을 본뜨고 있어, 그 무렵 건축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75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시멘트로 보강되었으나 팔각이었을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같은 돌로 2단의 팔각형 굄을 둔 후 두 단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을 놓았다...
하대석 하단은 각이 없이 둥근데, 옆면은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구름무늬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고 정면에서 두 용머리가 마주보며 그 가운데 발로 여의주를 받고 있다.
하대석 상단은 팔각이며 귀퉁이마다 연잎을 말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사자를 한 마리씩 양각했다.
여덟 마리의 사자는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젖혀 뒤를 돌아보거나 뒷발을 물고 있는 등 저마다 생생한 모습이다.
중대석과 하대석의 여결부위는 하대석 윗부분을 안으로 파서 그 안에 중대석 아랫면이 끼도록 되어 있다.
팔각을 이룬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아래위로 날개처럼 펼쳐진 연잎으로 기둥을 조각하고, 그 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가운데에
얼굴이 매우 큰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상대석은 둥근 연화대와 팔각의 몸돌 굄대로 이루어졌는데, 굄대가 매우 높다.
연화대 측면에는 16장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꽃잎 뒷부분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돌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상다리 모양의 기둥을 원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깊게 판 후, 비파·나팔·장구·바라 등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하나씩 새겼다. 윗부분은 갑석처럼 두드러져 나왔는데, 그 각 측면도 그대로 두지 않고 가느다란 선무늬를 넣었다.
아래의 상다리 기둥 표면에도 같은 무늬가 있고, 몸돌 바로 아래에는 팔각으로 둥그스름한 굄과 각진 굄이 있다.
둥그스름한 굄에는 자잘한 연꽃잎을 한 변마다 7장씩 엎어 새겼고, 팔각 몸돌의 각 귀퉁이에는 배흘림된 둥근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 목조건축의 짜임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몸돌 앞뒤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이 새겨져 있고, 앞뒷문 좌우에 사천왕상이,
나머지 두 면에는 옷자락을 날리며 내려오는 비천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지붕돌 또한 팔각을 이루어 낙수면이 묵직하게 흘러내렸고 기왓골이 정연한데, 기와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특히 수막새 기와에는 8엽의 연꽃무늬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고, 처마 밑에는 목조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연목과 부연이 표현되어 있다.
처마 아랫면에는 5곳에 비천상, 2곳에 향로, 나머지 2곳에 꽃무늬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각부분의 조각은 정교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모든 모서리와 구석은 단호하게 각이 졌고 몸돌의 사천왕상은 옷매듭까지 여실하며,
지름이 2cm 남짓한 막새기와 안의 연꽃무늬는 정교하기 그지없다.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경문왕 8)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9세기 말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이 탑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비신은 유실되었다..
이수 전면에 위패형의 액을 만들고 그 안에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雙峰山故澈鑒禪師碑銘)'이라는 명문을 서종으로 2줄 음각하였다.
두줄 10자 명문이 남아있어 탑비와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고, 조성연대도 철감선사 도윤(道允)이 입적한 868년 후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868년(경문왕 8년)에 입적한 철감선사(澈鑒禪師)의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마을에 전하는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비신이 없어졌는데,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한다.
비신(碑身)이 없어 철감선사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折中, 825~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한 뒤 김제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며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은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했던 범일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868년(경문왕 8) 4월 18일에 입적하였다. 경문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있으며 높이가 아주 낮고 깨진 부분 없이 완전히 잘 남아 있다.
용두(龍頭)화된 귀부의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입에는 둥근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하나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입가에는 활짝 펼친 날개 같은 것이 있다...
거북은 중앙에 복갑(腹甲) 형식의 중첩문이 정연하고 등에는 중곽의 육각구갑문(六角龜甲紋)이 선명하다.
갑(甲)의 바깥 선에는 귀갑문이 반으로 자른 듯 옆으로 선명하게 돌려져 있으며,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만들고
연문을 돌린 후 그 윗면에 3단의 각호(角弧) 괴임을 조각하였다.
귀부의 네 발은 발가락이 3개씩인데 오른쪽 앞발만 발가락을 위로 들고 있어 마치 귀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수는 비신을 덮고 있는 밑면을 제외한 5면에 운룡문(雲龍紋)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세마리 용이 좌우와 중앙 상단에 꿈틀거리고 있으며, 후면에는 두마리 용이 서로 몸을 뒤틀며 허공을 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수 정상부에는 보주형 귀꽃이 3개 솟아 있었으나 향 좌측의 것은 유실되고 없으며 그 자리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나머지 2개는 원석에 조각하였는데 유실된 부분만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별조하여 끼운 것으로 보인다...
쌍봉사를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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