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기행] 천등산 금탑사(金塔寺)와 천연기념물 비자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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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기행] 천등산 금탑사(金塔寺)와 천연기념물 비자나무숲..

by 정산 돌구름 2012. 9. 26.
[고흥기행] 천등산 금탑사(金塔寺)와 천연기념물 비자나무숲...

 

탐방일 : 2012년 9월 20일

소재지 : 전남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700

금탑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7세기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금탑(金塔)이 있어 금탑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된 극락전산신각, 범종각,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건물로, 정면의 어칸은 공간포(空間包) 2조, 협칸은 공간포 1조를

  배치하였으며, 어칸 좌우의 기둥에 용두(龍頭)가 달려 있다.

  범종각에는 법고(法鼓)와 범종(梵鐘)이 보관되어 있으며, 일주문에는 신동 손문경이 13세 때 썼다는 금탑사 현판이 있다.

  이밖에도 약 250년 전에 제작된 괘불(掛佛)과 함께 천여 년 전에 그렸다는 원효와 의상대사의 영정이 있지만, 그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2002년7월3일 보물 제1334호로 지정된 금탑사 괘불탱(掛佛幀)은 비현(丕賢)과 쾌윤(快允)이 1788년 함께 그린 것이다.

  옆으로 긴 폭에 삼세불을 표현한 독특한 화면구성으로 사천왕등의 권속을 배제하고 주요 협시보살만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이다.

  삼세불은 횡으로 3등분하여 큼직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으로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의 형태는 18세기 후반기의 특징인 원만한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옆으로 퍼진 육계에 큼직한 정상계주, 각이 진 어깨,

  발목의 치견장식 등을 보여준다.  괘불탱을 보관하고 있는 괘불궤는 1697년에 제작된 것으로 괘불보다는 약 90년전에 만든 것이다.

  1972년7월31일 천연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된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금탑사와 관련되어 심어진 것으로 보여 조상들의 문화생활

  일면을 볼 수 있는 오래된 인공림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천등산 금탑사 표지석을 지나 한참을 올라야 한다..

 

1985년2월25일 전남도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된 금탑사 극락전(極樂殿)...

정유재란때 사원 전체가 불탔으나 선조36년(1603년) 궁현옥순(弓弦玉淳)대사가 중건하였다.

금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과 측면 각3칸으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자연석축의 기단 위에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어간(御間)은 공간포(空間包) 2조(組)와 협간(夾間)은 공간포 1조를 배치하였고,

어간 좌우의 기둥머리에 용두(龍頭)가 달려 있어 조선 후기 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각 추녀에는 활주(活柱)를 사용하였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약한 굵고 낮은 원주를 세웠다.
.

 

창방과 평방은 굵은 부재로 하여 길게 좌우로 빼냈고, 그 위에 주간포를 배치하였다.

주두(柱頭)와 평방(平枋)이 결구된 부분의 내부에 살미첨차들의 중첩을 보아지로 만들어 용머리를 밖으로 내놓았다.

외삼출목에 내사출목으로 건물 규모에 비하여 출목수가 많다.

살미첨차의 앙서[仰舌]부분은 둥그렇게 굽어 올라가지 않고 수직으로 깎아서 각을 이루고 있다.

첨차의 굽면 역시 둥그렇지 않고 경사지게 깎아서 강직한 맛을 풍기며 다소 큰 느낌을 준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는데, 2개의 대량에 걸쳐 고주를 세우고 닫집을 만들었으며, 연등천장(椽背天障  서까래 사이의 개판이 그대로

치장이 되게 한 반자)이면서 중앙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한 후 보개천장(寶蓋天障)을 설치하였다.

보개천장과 내부 공포와의 사이에는 다시 빗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용의 몸통 형상을 한 부재로 공포와 대량을 연결하여 설치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2분합의 문은 빗살로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내부의 단청은 잘 보존되었으나 외부의 단청은 1995년에 새로 하였다.

지붕부의 처마 밑은 공포로 휩싸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크고 다소 세련미가 떨어진다.

약간 넓은 어간(御間)에는 2구의 주간포가, 협간(夾間)에는 1구의 주간포가 있고, 모서리 부분에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 아미타여래는 수명장수하고 극락왕생을 보장하며, 자비를 베푸는 분이고,

극락이라는 말은 미타3부경(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에서 유래한다...

 

극락전 목조삼존불은 1993년에 개금하였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인 본존불은 높이 160cm(불두 높이 60cm), 어깨 폭 60cm 크기로, 나발(螺髮)에 육계가 보이며, 계주도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방형으로 표정이 경직되었으며, 이마에 백호(白毫)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U’자형이고, 배 위에 ‘一’자형의 내의자락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로 내린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결하고, 오른발이 왼쪽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를 취하였다.
본존불 왼쪽과 오른쪽에 협시된
보살상 2기는 각각의 높이 146cm, 150cm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로 여겨지는데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목조삼존불 뒤에 모셔진 후불탱은 화기에 의하면 1847년(현종13년)에 제작된 것으로 불화조성시에 여러 인물들이 적혀 있어

조선 후기 불화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47cm, 333cm 크기의 비단에 그려져 있으며, 그림을 그린 금어로는 금암 천여(錦庵 天如)스님을 비롯하여 전부 10명이다.

화면 가운데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한 모습을 중심으로 상하좌우 네 모서리에 사천왕이 각각 배치되었고,

그 사이에 아난과 가섭 등 4대 제자, 관음과 지장 등의 8대 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신중탱(神衆)은 202cm×174cm 크기의 불단의 좌측에 걸려있는 탱화로써 화기에 의하면 1982년이라고 적혀 있으나

이는 그 이전부터 있던 그림의 화기위에 덧쓴 것이라고 한다.

그림의 내용이나 색깔로 보아 아미타후불탱의 조성시기와 비슷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신중탱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들을 도상화한 것이며, 많은 신들을 배치하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인다.

신중탱은 참배자의 심성에 내재한 온갖 잡신들을 쫒아냄으로써 마음에 청정함을 갖게하여 호법과 호신의 길을 깨닫게 한다..

 

명부전(冥府殿)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으로 동쪽편에 넓게 축대를 마련한 기단위에 고주형의 고석으로 기둥을 올렸다.

창호는 솟을빗살문으로 단순하면서도 정갈하게 짜여져 각 2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으며,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85년 이듬해에 통도사 건물을 뜯어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옛 부재를 재활용하여 잘 지어졌다.

안에는 지장보살상과 여러 권속들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죽은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과 명부에서 중생을 심판하는 시왕, 판관, 시자, 인왕 등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현재 무위당이라 불리는 곳이 명부전이었지만 1999년 새로 지어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명부전이지만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어 흔히 지장전이라고도 불린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 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명부전에는 목조로 된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머리는 민머리 형태이며, 양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상호는 근엄한 모습을 취하고, 법의는 통견으로 U자형을 이루며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여뜨렸다. 어깨가 좁아 상체가 빈약해 보이며, 다리는 상현좌로 상체에 비하여 옷주름이 약하게 표현되었다.

수인은 아미타9품인인 중품하생을 결하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편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병립하는데 지장보살상과 함께 1982년에 개분하였다.. 

 

명부전에서 바라본 극락전과 관이루..  

 

아담한 승방과 장독대..

 

금당선원(金堂仙院).. 2002년에 새로 지은 정면6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석축을 쌓아 그위에 건립하였으며, 수행처로 사용되고 있다..

 

혜량당(慧糧堂)..

 

무위당(無爲堂)..1999년 명부전을 새로 짓기 이전에는 현재 무위당이 명부전이었다고 한다..

 

응향각(凝香閣)..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극락전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새로 해체 복원하였으며 절에서는 노전이라고 불리고, 현재는 승방으로 사용중이다...

 

관이루(觀耳樓).. 1998년에 지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누각으로 강당처럼 사용되고 외벽화가 그려져 있다...

 

나한전(羅漢殿).. 3단의 석축위에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나한전에는 수기삼존상을 중심으로 아난과 가섭, 16나한, 시자상을 봉안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과거불의 대표인 정광불의 제화갈라와 미래불의 대표인 미륵불의 미륵보살로 협시하고 있다.

16나한은 석가여래 열반 이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분들이다...

 

나한전은 석가모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한 500나한을 모시는 전각이며, 나한은 부처는

되지 못하였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불상없이 1988년에 제작한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산신탱(山神幀)은 조선후기 이전에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산신탱화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로 추정할 수 있다.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을 큼직하게 그리고, 호랑이는 신선 앞에 정답게 애교 띤 모습으로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

항상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를 배경으로 기암괴석 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그리는데, 간혹 옆에 동자(童子)를 배치하여

시봉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호랑이는 대호(大虎)로 그리는 경우도 있고 고양이처럼 그리는 경우도 있으며, 민화풍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섭지 않고 애교 있게 그리는 예가 많다. 특히, 이 산신탱화는 전국의 어느 사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것이다.

그러나 산신탱화는 복덕(福德)을 희구하는 자들의 신앙이 되기보다는 사찰의 수호신으로서의 구실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칠성탱(七星幀)은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시립하고, 칠성여래를 비롯한 여러 성중이 호위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금어(金魚)는 지언(志彦)이다..

 

독성탱(獨聖幀).. 독성은 범어로 pindolabharadvaja인데 빈두로파라수로 음역되는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이다.

남인도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로 잘 알려져 있다.

흰 수염의 늙은 나반존자가 홀로 괴석과 폭포가 어울어진 산속에 소나무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형상으로 주위에 동자승이 표현되었다...

 

삼성각 앞에 아름다운 상사화..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풍경..

 

나한전, 극락전, 명부전이 차례로 서있다..

 

하단의 종각..

 

단촐한 범종..

 

절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된 비자나무 숲과 독치성(禿峙城) 등 유서깊은 곳이 많다..

 

 비자나무는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라는데,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가을에 익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천등산 중턱에 있으며, 금탑사가 세워진 선덕여왕 6년(637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높이는 10m 정도이고 모두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