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기행] 철천리 석조여래입상(鐵川里 石造如來立像)과 칠불석상(七佛石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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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기행] 철천리 석조여래입상(鐵川里 石造如來立像)과 칠불석상(七佛石像)..

by 정산 돌구름 2012. 8. 28.
[나주기행] 철천리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과 칠불석상(七佛石像)

 

 

탐방일 : 2012년 8월 26일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덕룡산)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鐵川里 石造如來立像)

   1968년6월10일 보물 제462호로서 지정된 높이 5.38m의 거불이다.

   덕룡산의 창룡 아래 칠불석상 뒤편에 자리하며, 광배와 불상과 대좌가 한 몸인 고려시대 불상이다.

   불상이 자리한 이 곳은 산세가 연꽃의 봉우리 같이 아늑한 곳으로, 불상은 연꽃의 중심인 화심(花心)에 자리한 형태이다.

   상호는 뺨에 살집이 두둑한 네모진 얼굴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를 표현하였고, 이목구비는 가늘고 긴 눈, 펑퍼짐한 코, 두툼한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감추고 있다. 신체와 연결되는 굵은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표현되어 있으며,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에는 양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U자형의 통견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수인은 두 손을 들어 시무외(施無畏)ㆍ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지만, 오른손을 여원인하고 왼손을 시무외인한 특이한 모습이다.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2조의 신광과 두광이 결합되어 있다. 두 줄의 선으로 테두리 지은 두광 내부에는 단촐한

   연화문과 당초문이 새겨져 있으며, 외부의 신광에는 역시 두 줄의 선 안에 도식화된 구름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 또는 괴체화(塊體化)되어 가는 신체적인 모습에서 고려초기 거불의 조형적 특징이 엿보이나, 대칭적이고

   규칙적인 당당한 어깨, 촘촘하게 주름진 생동감 있는 의습, 당찬 상호의 표현 등에서 전대의 뛰어난 조각수법을 살필 수 있다.

   언덕 아래 칠불석상과 함께 미륵사 미륵부처님으로 칭해지며, 이웃의 만봉리 석가여래입상 및 운흥사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나주지역의

   특이한 미륵부처님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 철천리 칠불석상(鐵川里 七佛石像)

  1968년6월10일 보물 제461호로 지정되었으며, 고깔을 엎어 놓은 듯한 95cm 높이의 원추형 바위에, 표면을 돌아가며 여섯 기의 부처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매우 희귀한 형태의 조각상이다.

  동쪽과 북쪽에 두 기의 좌상과 남쪽 면에 4기의 입상 등 모두 6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서쪽에도 2기의 불상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제강점기에 광부들이 떼어냈다고 전한다. 실제로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좌상 한 분과 거친 정자국이 보인다.

  이외에 바위 맨윗부분에도 석동자상(石童子像)이 있었다고 전하여 원래는 9불(佛)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석동자상이 있던 옛날에는 미륵사를 찾은 아낙네들이 칠불석상의 동자불상을 밀어서 스스로 잘 돌아가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으며, 동자상이 사라진 뒤부터는 이곳에 둥근 돌을 올려놓고 굴리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6기의 불상들은 야외에 노출되어 있는 관계로 풍파에 닳아 그 모습이 자세하지 않으나, 모두 육계와 얼굴 윤곽만은 분명한

  부처의 모습이다. 얼굴은 갸름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호를 지녔으며, 몸에 비해 도드라진 조각수법을 보인다.

  얼굴에 비해 체구는 작은 편이고, 팔과 다리를 제외한 몸의 굴곡은 표현되지 않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좌상 2기는 어깨가 넓고 통견의 옷주름이 얕게 선각된 모습으로, 동쪽상은 항마인(降魔印)을 취하고 북쪽상은 합장(合掌)하였다.

  4기의 입상 중 3기는 왼쪽 어깨를 감싼 편단우견으로 두손을 몸에 붙인 채 꼿꼿이 서있고, 1기는 오른손을 가슴에 댄 유연한 모습이다.

  좌상과 입상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에는 돌출부분을 마련하여 대좌로 삼았고, 광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전반적인 조각수법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퇴보한 도식화된 모습으로, 빈약한 체구의 형식적인 옷주름 처리를 통해 이웃 운주사의

  입상과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 12~13세기의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지리적 조건 아래 도식화된 불상군이 출현한

  점을 통해 나주지역 백제 불상조각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원추형의 비스듬한 4면에 다수의 불상이 새겨진 철천리 칠불석상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예이다.

 

 

 

 

 

 

 

미륵사 산황대신지위비(彌勒寺 山皇大神之位碑)

  덕룡산 창룡 아래 자리한 이 비는 용의 가피를 입은 미륵사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비문은 오석(烏石)에 음각되어 있으며, 아치형의 귀부에는 창룡출운(蒼龍出雲)이라는 글귀와 산황대신지위(山皇大神之位)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는 미륵사가 용의 가피를 입은 절로써 용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창룡이 덕용산의

  산신으로서 이 비가 산신각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용의 가피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무렵에 일어났는데, 마을사람들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을 비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며칠 후 왜군이 마을에 들이닥쳤을 무렵 철천리 마을민들은 현몽을 믿고 그대로 마을에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구름이 일어나 3일간 마을을 감싸는 바람에 왜군은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지나치게 되어 난을 면하게 된 것이다.

  비석은 높이 110㎝, 폭 37㎝의 아담한 크기로 귀부에는 음각으로 장식된 쌍룡문이 새겨져 있으며, 배면에는 비를 세운 시주자들의

  명호(名號)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