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교룡산 둘레길, 그리고 교룡산성과 선국사..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아름다운 길

남원 교룡산 둘레길, 그리고 교룡산성과 선국사..

by 정산 돌구름 2014. 7. 20.

남원 교룡산 둘레길, 그리고 교룡산성과 선국사..

 

○ 탐방일자 : 2014년 7월 19일 (토)

○ 기상상황 : 오전까지는 세찬 빗줄기, 오후에는 갬(오전에는 전남지역 호우경보와 주의보, 26~28℃)

○ 탐방인원 : 부부

○ 탐방코스 : 교룡산성 주차장~교룡산성 둘레길~교룡산성~선국사~주차장(전북 남원)

○ 거리 및 구간별소요시간 : 약 8.37km, 3시간10분 소요

  교룡산성 주차장(14:25)~미동마을 갈림길(14:35)~제실마을 갈림길(14:45)~보성마을 가림길(14:50)~숲길 입구(14:55)~임도 쉼터

  (15:05)~벤치 쉼터(15:20~30)~전망 좋은 곳(15:43~48)~금강마을 갈림길(15:55)~만복사지 갈림길(16:17)~전공비(16:30)~

  주차장(16:35)~교룡산성 홍교(16:45~50)~선국사(17:00~10)~야영장(17:20~31)~주차장(17:35)

○ 교통상황 : 광주 문흥동(13:30)~문흥IC~호남고속~88고속~남원IC~24번 국도~의총로~교룡산성 주차장(14:20)

 

○ 산행지 소개

  남원시 대산면 옥률리에 우뚝 솟은 교룡산(蛟龍山, 519m)은 독립된 산으로 주봉인 밀덕봉과 남쪽의 복덕봉이 같은 높이로 맞서 있다.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섬진강 맑은 물과 남원평야의 광활한 들판이 장관을 이룬다.

  산기슭에서 정상까지는 돌을 반듯이 깍아 쌓은 3,120m 교룡산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명이

  산화한 성지로 최근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어 성역화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산은 교룡(蛟龍)이요, 부의 서북쪽에 있다. (중략) 교룡산은 부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북쪽에는 밀덕봉(密德峯)과

  복덕봉(福德峯)이 하늘을 받치고 높이 솟아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교룡산은 덕유산에서 오는데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교룡(蛟龍)'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산성 표시가 있다. 남원의 지세는 풍수적으로 백공산이 주산이고 교룡산이 객산

  (客山)인데, 주산은 약하고 객산인 교룡산은 산세가 강대하므로 주산이 객산에 압도당한 형국이다.

  <삼한산림비기>에서도 "남원은 주산이 낮고 객산이 건장하여, 서자가 요망함을 부리고 관직에 있는 이에게 해독을 끼친다."라고 하였다.

  이에 남원부에서는 약한 주산은 북돋우고 강한 객산은 눌러야 할 필요를 느껴 비보사찰을 배치하였다.

  교룡산 둘레길은 교룡산성관리사무소옆 ‘월남참전기념비’에서 우측으로 가면 안내판이 있는데 한바퀴 도는 코스이다.

  교룡산을 중심으로 한 9,680평 규모의 교룡산국민관광지, 교룡산성과 산성 내에 있는 선국사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된다.

  산기슭에 율정 · 내동 · 보성 · 미동 · 용정 · 서화정 · 금강 등의 자연 마을이 입지해 있다..

○ Prologue

토요일이지만 어제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아 오전 내내 집에만 있었다.

전남 일부지역은 호우경보, 대부분 지역이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세찬 빗줄기는  때문에 집에 있다가 오후에 비가 그쳐 남원으로 향하였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남원 교룡산 둘레길 입구 주차장에서 교룡산을 한바퀴 돌고 교룡산성과 선국사를 둘러 보았다..

 

 

 

 

비온 후라서 인지 교룡산 입구 주차장은 한산하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월남참전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임도를 타고 간다..

 

교룡산 둘레길 안내도가 있고, 임도가 나있다..

 

건강 지압길이라지만..

 

관리가 되지않아 억망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길이 좋다..

 

잠시 후 미동마을 갈림길..

 

길은 고도차없이 산허리를 감돈다..

 

미동마을의 덕원아파트..

 

1km지점을 지나고..

 

길가의 수목장..

 

과수원의 감은 탐스럽게 익어간다..

 

제실마을 갈림길을 지난다..

 

길은 감나무농장 사이로 이어간다..

 

또 제실마을 갈림길..

 

이어 나타나는 보성마을 갈림길..

 

과수원 너머로 교룡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길은 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이어 통나무 계단길..

 

오르막이 이어진다..

 

부드러운 소나무 숲길을 지나..

 

잠시 내려서면 다시 임도..

 

잠깐 동안의 산속 숲길이다..

 

쉼터를 지나고..

 

길은 다시 부드러운 임도를 따라간다..

 

3km지점을 지나면..

 

의자가 2개 놓인 쉼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아래로는 순천-완주고속도로 북남원TG, 그 뒤로는 풍악산 능선..

 

길은 숲속의 임도를 따라가고..

 

우측으로 전망이 좋은 곳...

 

전망이 좋은 묘역이다..

 

풍악산~문덕봉~삿갓봉~고리봉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이다..

 

문덕봉~고리봉 능선, 그 뒤로 동악산 자락이 보인다..

 

당겨본 문덕봉과 고리봉, 바로 앞 확장 중인 88고속도로..

 

동남방으로는 지리산 능선이 이어진다..

 

잠시 쉬어가며..

 

문덕봉~고리봉 능선을 배경으로..

 

긴 내리막길이 구불 이어져 대나무 숲길을 지난다..

 

금강마을 갈림길..

 

바로 아래 88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길은 다시 시멘트길 오르막이 이어진다..

 

만복사지 갈림길..

 

6km지점을 지난다..

 

남원시가지 너머로 지리산 서북능선이 바라보인다..

 

국민관광단지 야영장이 나타난다..

 

산성교를 지나고..

 

동악성지 남원..

 

6.25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한 무공훈장수여자 전공비..

 

박항식박사 시비..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수지중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지낸 뒤 원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일생을 보냈다.

1949년 한성일보 신춘문예에 「눈」이 당선된 이래,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 시조 <노고단>과 <문장대>가 당선되어 문학적 역량을 널리 떨쳤다.

그는 원광대학교 내에 ‘만경강’, ‘원광문학회’ 등의 학생 문학동인회와 교수 문인 중심으로 <원류(源流)> 동인회를 결성, 동인지를 발간하여

문학 풍토 조성에 힘써 왔을 뿐만 아니라 전국 최초로 ‘문예 장학생’ 제도를 신설하여 우수 인재들을 발굴 육성해 왔다.

이러한 문학적 열성과 집념으로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안도현 등 130여 명에 달하는 원광 문인들을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 호남문학회장, 1972~1974년 한국언어문학회장을 역임하였다.

낭만적 선비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1989년 1월 8일 익산시 남중동 자택에서 영면(永眠)하였다.

그는 정결한 언어와 심원한 동양적 사유가 정교하게 어우러진 서정 미학으로 한국 시사에 새로운 정신 세계를 열어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원광대학교 교정에, 2000년에는 고향인 남원 교룡산에 <박항식 박사 시비>가 세워졌다..

 

단지내의 조형물들..

 

 

 

 

다시 돌아온 주차장..

 

길을 따라 선국사로 향한다..

 

월남전 참전기념비..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남원시가지가 바라보인다..

 

교룡산 등산안내도가 있는 작은 주차장..

 

주차장을 오르면 교룡산성 동문지..

 

전북기념물 제9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된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해발 518m인 교룡산(蛟龍山)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현재 동문의 홍예(虹霓)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성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 또는 설인귀가 쌓았다고 전하고 있으나,

통일신라기인 691년(신문왕 11년) 남원소경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에 백제가 축성하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조선 초기까지도 왜구에 대비한 피난처로서 계속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승병장 처영(處英) 등이 수축하여 남원읍성과 함께 지키고자 하였던 곳이며,

그 뒤 계속 수축과 개축을 하면서 중요한 군사요새지로 유지되었음을 성 안에 남아 있는 기적비들이 알려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1597년(선조 30년)에는 남원부사 최염이 주변 7개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1636년(인조 16년)에는 동문초루를 중건하였으며, 그 후 숙종 때에도 수축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성벽은 높이 약 4.5m로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동쪽 계곡부에 수구를 두고 옆에는 옹성을 갖춘 동문터가 남아있다.

동문은 무지개 모양의 문을 이루었으나, 그 형식은 조선시대 후기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 안에는 용천사가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는 승려들을 성곽수호에 기여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안 북측에는 몇 개의 기적비(紀績碑)가 있는데, "천총이진택중건기루 영세기속숭정5년병자5월일(千摠李震澤重建欺樓 永世紀續崇楨五年

丙子五月日)"이란 글이 새겨져 있음을 보아, 인조 14년(1636년)에 이 동문초루(東門樵樓)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루를 지나 오르면 교룡산장이 나타나고 건너편에 촌닭들이 놀고있다..

 

교룡산장을 지나 오르면..

 

돌계단을 지난다..

 

복덕봉 갈림길..

 

이어 선국사 경내에 들어선다..

 

교룡산 선국사(善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창건 당시 절 근처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龍泉寺)라 했다가

절 둘레에 교룡산성을 쌓은 뒤 절의 성격이 호국도량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선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절 건물이 성을 지키는 본부로 쓰인 바 있고,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산성절이라고도 부른다.

1803년(순조 3년)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891년(고종 28)에는 칠성각을 세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1984년 칠성각을 중수하고 1991년 미륵불상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보제루·관음전·요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선국사 대웅전(大雄殿)은 전북유형문화재 제114호(1985년8월16일)로 지정되었다.

685년(신문왕 5년)에 건립되었으며, 1803년(순조 3년)에 중건되었다.

창방 위의 주두(柱頭)에만 공포를 갖춘 주심포집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외이출목 형식을 갖추었고,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이며, 귀솟음 수법으로 추녀 끝을 더욱 가볍게 보이도록 하였고, 추녀마루는 굽은 기둥으로 지탱하였다.

정면의 어칸에는 삼분합의 빗살문을, 안쪽 문에는 삼분합문을, 측면에는 외짝문을 각각 달았고,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탱화가 그려져 있다.

내부에는 교룡산성승장동인(蛟龍山城僧將銅印 전북민속자료 제27호)과 선국사 대북(전북민속자료 제5호)이 보존되어 있다..

 

현판은 1803년에 제작된 법당신건기와 1891년에 제작된 칠성각창건기가 전한다..

 

내부에 아미타삼존불과 지장보살, 삼세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와 큰북, 중종, 현판 2매가 보관되어 있다.

탱화 중 삼세후불탱화는 1775년(영조 51)에서 1784년(정조 8)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쾌윤(快玧) 등이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탱화는 2000년11월12일 도난사고로 사라지고, 현재 봉안된 탱화는 2001년9월12일 다시 그린 것이다.

 

보물 제1517호(2007년7월13일)인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유행한 건칠(乾漆; 마른 옻칠) 기법으로 조성한 높이 132cm, 폭 93cm의 아미타불좌상이다.

현존 건칠상은 그 수가 많지 않고 또 대부분 보살상인데 이 불상은 흔치 않은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고 14C 중반의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체구가 장대하고 신체 각 부위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髻珠)와 중앙계주가 있다.

어깨는 둥글고 가슴 부분은 솟아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양감이 풍부하다.

법의의 착용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 표현 등에서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과 유사한 양식을 보인다.

또 둥근 얼굴과 어깨에 늘어진 옷자락 표현은 1362년 이전에 조성된 '화성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제980호)'과 비교된다.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인본다라니 1,158장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말에 만든 것이다...

대웅전 내부 천정..

 

선국사 대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1974년9월27일)로 지정되었으며, 둘레 260㎝, 길이 102㎝이다.

소나무에 소 가죽으로 제작되었고,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북으로 추정된다.

선국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북의 크기로 보아 선국사가 큰 사찰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칠성각은 1891년(고종28년) 새로 지었고, 1984년에 늘려 지었으며, 2002년 중수하였다..

 

칠성각의 안의 탱화..

 

대웅전 앞 배롱나무와 칠층석탑..

 

고즈녁한 절과 어울려 아름답다..

 

보제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마루 밑에서 교룡산성승장동인이 발굴된 바 있다.

이 인장은 전북 민속자료 제27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되었는데, 산성별장이 동학군에게 절을 빼앗길 때 빠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보제루에는 관음전 보수 불사 방명록 등 10매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이곳은 백용성조사 첫 줄가성지이기도 하다..

 

1991년 미륵입상을 세웠다..

 

선국사에서 바라본 남원시가지와 지리산 능선..

 

잠시 내려서면서 국민관광지 잔디밭 벤치에서 쉬어간다..

 

다시 돌아온 주차장.. 텅 비어있다.. 이렇게 짧은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임지훈/꿈이어도 사랑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