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기행]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南桃石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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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기행]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南桃石城)..

by 정산 돌구름 2014. 7. 8.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南桃石城)..

 

○ 탐방일 : 2014년 7월 8일

○ 소재지 :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 남도석성(南桃石城) 소개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사적 제127호(1964년6월10일)로 지정된 이 성은 높이 4m, 폭은 2.5~3m 가량 되는 옛 성인데 둘레가 526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차 있고 마을 사람들은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 현 嘉興)과 매구리현(買九里縣,

  현 臨准)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년)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이 1438년(세종 20년) 정월로 미루어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

  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또한 1765년(영조 41년)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터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홍교과 단홍교, 두 개의 홍교가 놓여 있다.

  단홍교가 언제 놓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쌍홍교는 해방 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한다.

  두 다리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편마암 자연석재를 사용하여 홍교를 놓은 것은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드문 특이한 양식이다.   

  서쪽입구에는 6기의 남도석성만호비가 있는데 수군의 수장 중에서 뛰어난 만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 또는 <청덕선정비>라고

  새겨서 공적을 기렸는데, 마을 중간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

  남도 포에 설치된 수군제진의 수장중에서 이곳에 세워진 비석들은 뛰어난 수군만호들을 기념하고 있다.

  고려 말 수군을 재건할 때 각도별로 도만호 관하에 만호(萬戶), 천호(千戶) 등을 두면서 비롯된 수군만호는 태종 때 정3품 이상을

  만호로 칭했다가 1443년(세종 25년) 3~4품을 모두 만호로 통일하여 각 도에 둔 제진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뒤 종4품으로 통일하였다. 만호는 대부분이 무예에 능한 전임직이었는데 여기에는 모두 여섯분의 만호비가 모셔져있다.

  이들 만호비들은 원래 남도석성안 마을 중간쯤에 있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의 합의하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만호비는 조선 후기 수군만호의 선정비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또는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라고 새겨 만호들의 공적을 기렸다.

  만호김공익대청덕선정비(萬戶金公益大淸德善政碑)<1753년>를 비롯, 만호서공성록영세불망비(萬戶徐公星祿淸德善政碑)

  <道光二十九年 1849년>, 행가장가선대부김후이종보민불망비(行假將嘉善大夫金候履宗保民不忘碑)<同治三年 1864년>,

  만호이공찬홍영세불망비(萬戶李公贊弘大永世不忘碑)<同治十四年 1865년>, 만호노공홍선정비(萬戶魯公鴻善政碑)<甲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