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 사적 제507호,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 탐방일 : 2014년 5월 6일(초파일)
○ 소재지 :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 선암사 소개
<선암사사적기(仙巖寺寺蹟記)>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3년(542년) 아도(阿道)화상이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고, 헌강왕 5년(875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현종 1년(1660년)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순조 24년(1824년)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동, 요(寮) 25동,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교종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보물 제395호 선암사 3층석탑과 보물 제1311호 선암사 대웅전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가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선암사는 2009년12월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088년(선종 5년)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석종(石鍾)·철불(鐵佛)·보탑(寶塔)·부도(浮屠)·문수전(文殊殿)·조계문(曹溪門)·청치(圊廁)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적연당(寂然堂)·명경당(明鏡堂)·대장전(大藏殿)·청운당(靑雲堂)·
백운당(白雲堂)·배면당(背面堂)·독락당(獨樂堂)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
(天藏殿)·지장전(地藏殿)·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낙성료(落星寮)·
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
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
심주각(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1년)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護岩)과 치현(致玄)이 있었다.
또,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년)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塑像) 61구, 화상(畵像)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 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년)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霜月)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海鵬)·눌암(訥庵)·월파(月波)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 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당시의 주지는 방홍파(方洪坡)이었고 그 뒤를 장기림(張基林)·김청호(金淸昊) 등이 주지직을 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선암사에는 대웅전·지장전·불조전·팔상전·대장전·장경각(藏經閣)·원통전·응진당·각황전(覺皇殿)·벽안당·진영각·
심검당·설선당·창파당(滄波堂)·소재전(消災殿)·산신각·천불전(千佛殿)·무우전(無憂殿)·독락당·만세루(萬歲樓)·응향각·도선암
(道詵庵)·극락전·일주문·노전(爐殿)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부속암자로는 산내(山內)에 대각암(大覺庵)·대승암(大乘庵)·청련암(靑蓮庵)·운수암(雲水庵)·선조암(禪助庵)·향로암(香爐庵)·
비로암(毘盧庵)이 있었고, 산외(山外)의 말사로는 여천군의 흥국사(興國寺), 순천군의 향림사(香林寺)·도선암(道詵庵)·정혜사
(定慧寺)·대흥사(大興寺), 여수군의 한산사(寒山寺)·석천사(石泉寺)·용문암(龍門庵), 광양군의 백운암(白雲庵),
광주군의 증심사(證心寺)·원효암(元曉庵)·약사암(藥師庵)·규봉암(圭峯庵)·지장암(地藏庵) 등이 있었다.
6·25전쟁 이전에는 불각(佛閣) 9동, 당료(堂寮) 25동, 누문(樓門) 31동 등 모두 65동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중에 불타고,
현재는 대웅전·원통전·팔상전·불조전(佛祖殿)·장경각·강선루(降仙樓) 등 크고 작은 20여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선암사 안내도..
선암사 초입의 부도군..
선암사 동부도전..
길 옆에 자리한 부도밭으로 11기의 부도와 8기의 비가 줄지어 서 있는데
그중 화산대사 부도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선암사 강선루(降仙樓)..
안과 밖에 ‘강선루(降仙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안쪽은 윤용구(尹用求)의 필이고, 밖의 것은 김돈희(金敦熙)의 글씨이다..
선암사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이다.
위층은 가늘고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위층에는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을 일주문 안쪽에 두는 데 반해 선암사의 경우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이채롭다.
선암사의 실질적인 경역이 바로 강선루에서부터 시작된다..
보물 제400호(1963년9월2일)로 지정된 선암사 승선교(昇仙橋)..
선암사에 이르기 전 조계산 계류 건널목에 놓인 돌다리를 말하는데, 다리는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전체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기저부에는 가설(架設)이 없고 자연암반이 깔려 있으며, 홍예(虹朗)를 중심으로 하여 양쪽 냇가와 사이에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있다..
윗면은 평평하게 정지하여 통식(通式)의 교량을 이루고 있다.
좌·우 측면의 석축에 약간 보수를 가한 흔적이 있을 뿐 홍예는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주위의 석축도 난석(亂石) 쌓기로서 시멘트에 의한 보강이 전혀 없어 자연미를 잘 살리고 있다..
선암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년(현종 1)에 중창한 것을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1824년(순조 24)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이 돌다리도 임진왜란 이후 사찰을 중창할 때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24년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려고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자 자살을 하려 하자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했다.
대사는 이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우고 절 입구에 승선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 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 홍교보다 조성연대가 앞선다..
바로 아래 또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승선교는 2003년11월~2004년6월, 완전해체하여 자연암반부에 석재(지대석) 보충하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이 석재들은 당초 승선교를 구성하던 147개의 홍예석(아치석) 가운데 노후부식 등으로 강도가 약해져서 재사용이 불가능한
석대 30개를 전시하여 놓은 것이다.
전남도기념물 제46호(1980년6월2일)로 지정되어 있는 선암사 삼인당(三印塘)..
862년(경문왕 2)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 안에 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를 의미하는데,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장타원형으로 장변과 단변의 비율이 2.2:1이며, 연못안의 섬은 장변 11m, 단변 7m 난형으로 난저부 가까이 4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연못의 내부에 흙이 차고 석축이 좋지 않아 1996년 민간단체인 순천전통문화보존회에서 복원공사를 하였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불국사의 구품연지(九品蓮池)와 통도사(通度寺)의 구룡지(九龍池)는 타원형 연못이다.
하지만 모두 정형적인 정타원형의 윤곽선을 가지고 있다. 또 구룡지는 중앙에 가로지른 다리가 놓여 있는데, 구품연지의 형태를
이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선암사의 삼인당은 조성연대가 이보다 훨씬 앞선 신라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마비..
입구의 찻집, 선각당(先覺堂)..
선각은 왕이 도선국사에게 하사한 호이며, 찻집의 자리가 도선국사가 수행하던 터라고 한다..
전남도 지방문화재 제96호(1982년10월15일)로 지정된 일주문..
누문인 강선루를 지나 처음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실질적인 사찰의 영역을 의미한다.
단층맞배기와집 외4출목 다포식건물로 일주문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되었고 돌계단으로 층계를 연결한 형식이다.
일주문 입구의 현판에는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기록하고, 뒷면에 古淸凉山海川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범종각(梵鐘閣)은 불전사물의 하나인 범종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종각이라고도 한다.
범종은 아침과 저녁 예불 때 모든 중생의 글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친다.
화강암의 초석위에 원형기둥을 사용한 건물로 정면과 측면 각3칸의 우진각지붕으로 겹처마를 하고있는 단촐한 건물이다.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범종각 안에는 범종만 봉안되어 있다..
범종의 비천상..
만세루(萬歲樓)..
선암사의 강당 및 포행하는 공간에 해당하는 건물로 수많은 학승들이 여기에서 강학하였다.
1824년 대웅전과 함께 해붕, 눌암스님 등이 중창한 건물로 익공형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인 목조건물이다.
만세루에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글씨는 추증 영의정 김익겸(서포 김만중의 부친)이 썼다고 한다.
원래 초기 가람배치 형식에서 강당이 금당(金堂), 즉 대웅전 뒤편에 있어야 할 위치이나 조선시대의 가람에서는 대웅전 앞에 위치한다.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1974년9월24일)로 지정되었다가 보물 제1311호(2001년6월8일)로 승격 지정되었다..
875년(헌강왕 5년) 선암사의 창건 당시 함께 건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60년(현종 1년) 경잠(敬岑)·경준(敬俊)·문정(文正)의 3대사가 주동이 되어 중건하였다.
1766년(영조 42년) 재차 화재를 만나, 1824년(순조 24년) 재중건하였다.
대웅전은 선암사 가람(伽藍) 배치의 중심에 해당하는 건물로, 일주문(一柱門)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선에 위치한다.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大雄殿> 편액은 순조의 국구(國舅)인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글씨이다..
초파일에 행하는 관불(灌佛)의식..
불교경전<보요경(普曜經)>에 의하면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 용(龍)이 향수로 태어난 아이를 목욕시켰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관욕(灌浴), 욕불(浴佛), 석존강탄(釋尊降誕)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관불(灌佛) 의식은 고대 인도로 부터 유래되었다.
부처님의 형상을 깨끗이 씻으면 자신의 마음에 쌓인 죄와 번뇌를 씻고 맑고 깨끗해지며 복을 누리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대웅전 불단의 석가모니 독존불(釋迦牟尼獨尊佛)..
1828년(순조28년) 5월, 용암(용암) 혜언선사가 지은글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6창건부>가 목판에 새겨져 대웅전에 걸려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823년(순조23년) 늦봄에 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절집 1천1백여칸과 불상, 불경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러자 곧 절의 장로인 해붕(海鵬) 전령(展翎)대선사와 익종, 용암선사 등이 중심이 되어 곧 중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만에 옛모습을 능가하는 복원불사를 이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가모니 불상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12명의 신장상을 그렸다.
1765년(영조41년) 제작되었는데 이때, 상월(霜月) 새봉(璽封)대사 가 대웅전을 중찰할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이 불탈 때도 이 탱화만은 구하였으며, 가로 3.65m, 세로 6.5m인 초대형 영산회산도이다.
화면 전체에 붉은색과 녹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보물 제395호(1963년9월2일)로 지정된 대웅전 앞 선암사 삼층석탑(三層石塔)..
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을 계승하여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직사각형의 석탑으로 두 탑의 규모나 수법은 동일하다..
지상에 몇 개의 장대석(長臺石)을 짜고, 그 위에 하대석(下臺石)과 중석(中石)을 1석(一石)으로 하여 4매(枚) 장석(長石)으로
구성하였는데, 네 우주(隅柱)와 각 면에 1주식(一柱式)의 탱주(撑柱)가 표현되었다.
갑석(甲石)은 2매의 장판석(長板石)으로 덮고, 윗면은 경사가 현저한데, 우각(隅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는 듯하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一石)으로 각층 옥신에는 네 우주가 표현되었을 뿐, 다른 조식(彫飾)은 없다.
옥개석은 얇고 넓적한 편이며, 받침은 각층 4단으로 감소되었다.
옥정(屋頂)에는 각호이단(角弧二段)의 굄이 있는데, 옥개석에 이와 같은 수법의 몰딩이 있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이 석탑은 결구(結構) 방법에 규율성(規律性)을 보이고 있으며, 상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조법(彫法)도 착실하다.
그러나 규모는 작고, 옥개 받침수의 감소 등 생략된 경향이 보인 점으로 보아 이 두탑의 조성은 신라 중기 이후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선암사 괘불지주..
대웅전과 3층석탑 사이에 있는 이 지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탱화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 비단 한면에 그려져 있는데 1753년 만들어진 이후 우환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내걸었다고 한다..
대웅전 옆의 선암사 구시(구유)..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그릇인데 길이가 330㎝나 되고, 2,000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선암사 성보박물관..
선암사 전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일반대중에게 불교문화의 올바른 인식의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2001년3월23일 개관, 일반인에게 공개한 소장유물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부도전감로탱을 비롯한 불화류 105점, 화엄경사경을
비롯한 경전류 621권, 법화경변상목판을 비롯한 목판류 840여점을 포함한 당대를 대표하는 불교관련문화재 2,000여점을 소장한다.
설선당(設禪堂)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사찰의 중심축에서 왼쪽에 위치하며 수많은 학승들이 강학하던 강당이다.
옛날에는 만일염불을 했던 염불원이 있었던 건물이며, 현재는 행자들의 교육과 생활을 하는 곳이다.
낮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아 원형기둥을 세우고 초익공형식을 한 단촐한 건물이다.
맞배지붕이 이어져 ㅁ자를 이루고 중앙의 조그마한 마당을 향해 건물이 집중배치되어 잇다.
단층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중층으로, 1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중층은 수장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설선당 상량문에 의하면, 182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이듬해인 1825년 심검당과 함께 중건했음을 적고있다..
장경각은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목조팔작기와집으로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원래 명칭은 성수전으로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전각이었다.
특히 어칸부분의 계단은 소맷돌부분이 해태, 사자모양을 하여 흥미롭다..
선암사 팔상전(八相殿)..
이 건물은 높다란 장대석으로 석축을 쌓아올린 대자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주심포 맞배지붕의 양식을 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정면 중앙 3칸은 이분합이고 양끝 칸은 단일문을 달았다. 또 창방 위에 평방 없이 용자주로 대치했으며,
측면과 후면은 대량이나 마루대공이 2중량구조로 되어 무위사 극락전이나 도갑사 해탈문과 같은 계통의 주심포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전면은 수리시 후면과 달리 공포를 많이 넣은 팔작지붕에서 보이는 다포집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즉 원형은 후면에서와 같이 주심포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전면은 익공계로 전면과 후면의 양석이 서로 다르다.
이는 보수시 전면만 당시 유행하던 다포양식을 따른 결과라 하겠다. 또 천장도 다포집의 연등천장식이다.
이 건물은「조계산선암사사적기」에 강희 43년(1704)과 숙종 33년(1707)에 중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18세기초의 건물임을 알 수
있으며, 전남지방에 소재하는 조선후기 익공계이므로 좋은 자료가 된다..
호남제일선원..
응진당(應眞堂)..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조선시대에는 16나한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나한전, 영산전이라고 부른다.
나한은 득도한 수도자들인 성사과중(聖四課中)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들을 말하며, 응진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16나한들은 특별히 석가의 수기를 받아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하지 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들이다.
응진당은 경내의 가장 뒷쪽에 있는 별도의 조그만 승원으로 본영역의 주불전이고, 좌측에 달마전, 우측에 진영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목조맞배기와집이며 깬돌을 경사지게 쌓아 높은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덤벙주초와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심포와 익공형식이 섞여있고 어간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좌우측 퇴간에는 와형문양이 장식된 널빤을 천장으로 설치하였다.
북쪽면은 외1출목의 주심포 형식을 하고 있다.
응진당에는 삼존불과 16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삼존은 석가모니불과 협시인 미륵, 제화갈라보살이다.
16나한은 현세에서 정법(正法)을 지키는 16명의 아라한(阿羅漢)을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는 이들 나한의 이름이 보인다..
16나한은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囉惰闍),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가락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墮闍), 소빈타(蘇頻陀), 낙거라
(諾距羅), 발타라(跋陀羅), 가리가(迦理迦), 벌사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수박가(戍博迦), 반탁가(半託迦), 나호라(囉怙羅),
나가서나(那迦犀那), 인게타(因揭陀), 벌나파사(伐那婆斯), 아시다(阿氏多),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이다..
진영당(眞影堂)은 응진당 오른쪽에 있으며 이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기단 속에 주초가 묻혀 있고 두리기둥을 세운 민도리형식으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진영당 안에는 선암사 큰스님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달마전(達摩殿)은 중심축을 향하여 응진당 왼쪽에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응진당 경역의 요사와 선방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의 형식은 응진당 쪽은 맞배지붕, 반대쪽은 팔작지붕이다.
기단에 묻힌 초석 위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주두를 얹은 민도리 형식이다.
맨 위쪽의 칸은 부엌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방으로 쓰고 있다. 가칠단청에 머리초만을 칠한 수수한 건물이다..
벽안당..
'世界一花 祖宗六葉'..
추사 김정희가 만허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써준 글씨로 부처님의 근본진리가 보리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이어져온 것을 뜻한다.
천연기념물 제488호(2007년11월26일)로 지정된 선암사 선암매(仙巖梅)..
선암사의 원통전 담장 뒤에서 자라는 토종매실나무로 수령은 600여 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나무높이 8m, 밑둥기둘레 1.2m이며, 수관은 동서 13m, 남북 13로 생육상태가 좋고 넓게 퍼진 가지가 특히 아름답다.
꽃의 색이 유난히 붉고 향이 짙기로 이름나 있다.
선암사 어느 전각인가의 상량문에 이 매실나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남아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나무이다...
순천 선암사 경내에는 수령이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경내 원통전 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 돌담길에 있는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사 선암매라고 부른다.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는 수령 650년, 나무 높이 11m의 백매이며, 이들 선암매는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선암매 여러 나무들은 각기 수령과 나무 높이가 다르나 대체로 수령 350~650년 사이이며, 나무 높이는 5~12m까지 다양하다.
경내 이곳저곳에 널리 분포하여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들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는 봄철에 특히 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매화를 보기 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선암사의 매화는 3월에서 4월에 걸쳐 피는데 3월 말경에 만개한다..
잔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원통각(圓通閣)..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으로 관음각이라고도 한다.
1698년(숙종24년) 호암휴악대사가 중창하였고, 1759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761년 상월과 사악스님에 의하여 재중창되었다.
1824년 해붕, 눌암, 익종 세 대사가 중수하였고, 1923년 운악당돈각의 유촉으로 금 1,000여원을 희사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아담한 건물로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를 내어 사찰건축에서는 보기드문 丁자를 평면을 이룬다.
전면에는 양쪽으로 쌍여닫이문과 중앙에 4분합문이 있고, 양측면에는 쌍여닫이문이 하나씩 있다..
내부에는 인(人), 천(天), 대복전(大福田)이라는 순조친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는 정조가 후사가 없자 선암사 원통각과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순조를 낳자 금병풍, 은향로 등을 포함하여 선암사에 하사한 것이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95호 불조전(佛祖殿)..
1761년 상월과 서악스님에 의해 중창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목조팔작집으로 주심포형식에 익공형식이 가미된 건물이다.
내부구조는 통칸으로 대들보위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중앙부에는 동자주를 두어 한단을 높인 층단천장을 꾸몄다.
천장위에는 자라, 물고기, 모란 등을 조각하여 붙였다. 어칸은 4분합, 퇴칸은 2분합 빗살문이다..
불조전에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개창자나 중창자, 중수자, 역대 유명한 선조사들의 진영이 모셔진다.
그러나 선암사에는 과거 7불, 미래 53불 등 60불이 모셔진 전각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정면과 측면 각1칸의 조그만 전각으로 맞배집 겹처마이다..
초석은 장대한 자연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고, 가둥위로는 창방을 얹은 후 공포를 올렸으며, 주심포에 익공식을 가미하였다..
조사당은 중국에서 선(禪)을 전한 달마(達磨)대사를 시작으로 육조혜능(六祖慧能), 마조도일(馬組道一) 등 중국 5대선사의 진영과,
태고종의 종조인 태고보우(太古 普愚)국사, 그리고 선암사의 선을 널리 알린 침굉현번(枕肱懸辯)선사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三聖閣)은 대웅전 북서쪽에 있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중앙에 칠성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단과 산신단을 형성하였다..
선암사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은 서방 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인데 선암사의 무량수전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선암사 종무소. 종무소와 강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옛날에는 6방중 도원감이 있어 절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던 곳으로 활용하였다.
천불전중수상량문에 종무소 건물이 기록되어 있어 1844년 이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ㅁ자형 안마당과 실 구성은 전통적인 양반집 안채를 연상케 하고, 채는 ㄱ자형 건물에 누가 있는 ㄹ자형 건물이 이어져 ㅁ자를 이룬다..
적묵당(寂黙堂)..
1997년 신건된 T자형 건물로 대중이 모여서 공양하는 곳이다.
절에서 공양간, 뒷간, 세면장을 삼묵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이나 일을 볼 때, 손을 씻을 때는 항상 엄숙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전남 문화재자료 제214호 해우소..
대변소는 ㅡ자형 건물의 북측 중앙에 출입용으로 맞배지붕을 붙여 T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찰의 화장실은 해우소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정랑(淨廊), 청측, 뒷간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정유재란때 초토화 되었으나 불에 타지 않은 몇몇 건물중의 하나로 전한다..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57호(1987년9월18일)로 지정된 선암사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선암사에서 대각암(大覺庵)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7m의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높이 4.8m, 너비 1.2m이다.
마애석불 바로 곁에는 ‘갑진삼월일’이란 명문이 보이는데, 연대를 증명할 만한 연호가 없어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불상에 대한 사적기(寺蹟記)의 기록이나 다른 문헌이 없어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상호는 원만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눈·입·코 등이 균형 잡혀 있으나, 눈꼬리가 치켜져 위로 올라간 모습이다.
또한 상호에 비해 귀가 크게 묘사되어, 마치 법주사 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보물 216)의 귀와 비슷하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몸 전체를 덮고 있다. 왼쪽 팔에 걸친 옷과 가슴을 내려 덮은 옷이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나 도식화되었고, 가슴에는 卍자가 음각되었는데, 이 글자를 조각 당시에 새겼는지는 의문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다리 밑으로 수직이 되게 내려뜨려 손가락을 펴고 있다.
왼손은 팔을 굽혀 가슴 위에 붙였는데, 엄지와 중지를 모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있다.
비록 선각(線刻)이지만 단아한 얼굴, 정교한 나발의 표현 등의 기법은 뛰어나다.
그러나 옷의 도식화된 무늬, 신체 부위의 인체 파악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공양간에서 식사..
선암사 가람의 삼무(三無).. 선암사는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세 가지가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첫째, 사천왕문이 없다.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기에 장군봉이 지켜주기 때문에 따로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을 만들지 않았다 한다.
둘째, 협시보살상이 없다.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신다.
탐진치 삼독을 멸하시고 마구니에게 항복 받으셨으며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셔서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한다.
셋째,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맨 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닫는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 한다..
선암사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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