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수영대첩비(보물 제571호)와 타루비(보물 제1288호), 동령소갈비
○ 탐방일 : 2014년 3월 29일
○ 소재지 : 여수시 고소동 고소대
○ 소 개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보물 제571호(1973년5월4일)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로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좌수영성 서문밖에 세웠던 이순신 전승기념비로 비문은 백사 이항복이 짓고 명필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전(篆)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그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좌수영대첩비는 거북받침을 하고 있으며, 지붕돌에는 뿔이 달린 용이 새겨져 있고, 지붕 꼭대기는 큼직한 연꽃봉오리가 올려져 있다.
비문은 옥포·노량·한산·명량 등지에서 활약한 충무공의 행적과 애국충정, 전몰상황까지 임진왜란 전편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비에 새겨진 명칭은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이지만, 일반적으로 충무공대첩비, 좌수영대첩비 등으로 불린다.
좌수영대첩비는 본래 좌수영성 서문 밖(지금의 충무동)에 건립되었으나, 1942년 일본인 경찰서장 마쓰기가 비를 서울로 빼돌리는
바람에 그 행적을 모르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비각은 1948년에 지은 것이다. 고소대의 대첩비각 비각이 있는 고소대는 옛날에 여수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명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소정도 사라지고 찾는 사람도 없다.
<타루비(墮淚碑)>
보물 제1288호(1998년12월4일)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94cm, 너비 59cm, 두께 19cm이다.
이 비는 이순신장군 순절 6년후인 1603년(선조36년)에 이순신장군 막하에 있던 군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
(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洋祐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이라고 적혀 있다.
즉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우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다.
꽃무늬를 새긴 대석(臺石) 위에 연화(蓮花)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운문(雲紋)과 연(蓮)봉오리형으로 된 개석을 얹었다.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좌수영대첩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비석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 비석을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비문은 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지었고, 건립경위는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썼다.
비신 뒷면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1698년(숙종24)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119㎝·폭 60㎝로, 직사각형 비좌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비신이 세워져 있는데 옥개석과 비신은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다.
비좌의 정면과 측면에는 꽃무늬가 새겨졌으나 심하게 마멸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반원형을 띤 옥개석 좌우에는 나선형 장식이, 중앙에는 여의주 무늬가 앞·뒷면으로 있고, 꼭대기에는 연꽃 봉우리형 보주로 장식하였다.
고소대(姑蘇臺)..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여수기상대(麗水氣象臺)와 충무공 대첩비각(大捷碑閣)이 있다..
여수8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소대제월(蘇臺霽月), 고소대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
그러나 지금은 고소정(姑蘇亭)의 흔적도 없어지고 수령 300년이라는 느티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의 비각은 1948년에 지은 것으로 안에는 세 기의 비석이 있다.
가운데가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왼쪽 비석이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오른쪽이 타루비(墮淚碑)이다...
좌수영대첩비 동판...
보물 제571호로 지정되어있는 좌수영대첩비는 일제강점기말 일본인 경찰서장에 의하여 감추어졌다가 1948년에 현위치로 옮겨졌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세워진 이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전(篆)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그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된 타루비(墮淚碑)..
이순신 장군이 순절한 지 6년 후인 1603년(선조 36)에 이순신 장군 막하에 있던 군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
(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洋祐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이라고 적혀 있다.
즉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우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다..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좌수영대첩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비석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 비석을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비문은 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지었고, 건립경위는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썼다.
비신 뒷면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1698년(숙종24)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슬러 20년 전 이오성(李鰲城)이 체찰사가 되어 나랏님을 배알한 날 선왕께서 제일 먼저 충민사(忠愍祠)를 창건하라는 명을 듣고
하래하여 드디어 대첩 비문을 지어 통제사에게 주었다.
유형(柳珩) 공은 자기에게 임무가 주어짐을 강개하고 먼저 재료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공사가 쉽지 않아 중지하였다.
공 역시 타직으로 전출되어 황해도 절도사로 가게 되었다.
몸은 비록 타도에 있으나 마음은 이 역사(役事)를 잊지 못하다가 강음에서 돌을 구하여 바다에 떠서 서울로 들어왔다.
조정에 계청하였으나 해변에 버려져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게 되었다.
이제 절도사 안륵(安玏) 공이 새로 도착하던 날 목욕재계하고 제를 올리되 개연(慨然)히 충혼에 감사하고 영원히 썩지 않게 할 뜻을
가짐이 오래되었다. 그때 이야(李爺)의 아들 전 현감 이회(李薈)가 와서 보고 서로 순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즉시 막속 전 현감 임영과 전 판관 정원명(鄭元溟) 등에게 명령을 내려 원근 석공들을 모아 서로 운반할 돌의 양을 나누어 거둬들였다.
전 호조참의 이창정(李昌庭)공 순천부백 강복성(康復誠)공이 힘을 모아 도와주었다. 이에 가까운 읍 수령과 변방 수장 역시 혹 물품을
보내주던지 새벽부터 밤까지 부역을 도와 반년이 지나 역사를 마치니 그 열렬함의 흔적이 비에 자세히 새겨 만세 불민하게 되었다.
진실로 당초에 유공과 여러 군자의 힘이 아니면 어찌 이를 얻을 수 있으리오?
유공이 임종을 당하여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이야의 비석이 세워지지 않으면 내 묘 앞에도 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야를 숭모하는 정성은 죽어서도 잊지를 않으셨느니라. 경신년 1월에 비를 세우니 타루비도 이 비 옆으로 옮기느니라.
이에 앞서 연해 사졸들은 공을 위하여 세운 비를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 비이다. 슬프도다! 이야의 일은 사람의 입이 모두
비(碑)이니 비록 돌에 기대할 수 없어 사람들이 돌을 세워 일의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별도로 작은 돌을 세우니라..
여수8경의 제2경에서 바라보는 여수항의 장군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여수시가지..
고소벽화거리와 진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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