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기행] 사적 제397호 병영성(全羅兵營城)과 하멜기념관..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강진기행] 사적 제397호 병영성(全羅兵營城)과 하멜기념관..

by 정산 돌구름 2013. 3. 13.
사적 제397호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과 하멜기념관..

 

탐방일 : 2013년3월1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전라병영성 소개

  1992년3월9일 전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4월18일 사적 제397호로 재지정되었다.

  태종17년(1417년)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것인데, 면적 93,139㎡로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이 전라도 53주 6진을 통치하였을 때 축조하였다.

  마천목의 꿈 속에 나타난 대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여 ‘설성’이라고도 한다. 당시 남해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선조32년(1599년) 도위수 권율의 상소로 장흥으로 이설하였다가 1604년 다시 본래의 위치로 옮겼다.

  고종31년(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 복구되지 못하고 폐영되었다.

  폐영 당시 1,889개의 가옥과 5,973명이 살고 있었다.

  <대동지지>, <색지>에 따르면 석축의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여첩 302개, 옹성 12개, 포루 2개, 호지 5개, 우물 9개가 있었다.

  또, 2층 누로 이뤄진 남문·동문·북문 등이 있었고, 각종 관사와 누정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철되었다.

  평지에 축조되었는데, 성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부정형의 형태로 총 길이는 1,650m이다.

  성곽의 서북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천을 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으로 바깥면에는 다듬은 돌을 썼다.

  보통의 성과 마찬가지로 하부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쌓는 방법을 썼다.

  병영초등학교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은 너비가 2m 이상이 될 정도로 넓게 안쪽까지 견실하게 마무리하였다.

  반면 박삼옥 댁에 있는 성벽 중 일부는 외벽만을 쌓고 안쪽으로 흙을 쌓아 내탁하는 편축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서남부의 군사본부로서 방어기지와 육군 지휘부가 되었고, 네덜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약 8년 동안 억류되었다.

  전라병영성은 1417년 축조하여 1895년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수많은 역사와 일화 속에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로 존속되어 왔다.

  전라병영성 맞은편에 위치한 하멜기념관은 전라병영에서 7년간 억류되었던 네델란드인 하멜의 기념관이다.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했다고 할 수 있는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와 강진군이 자매결연

  을 맺고 세운 기념관이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큼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선박의 왕래가 잦아 상업도시로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쿰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

  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취업하였고 선박의 포수(砲手)로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

  당시 바타비아에는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멜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서기(書記)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하멜 일행을 체포 감금하였고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朴燕, 얀 얀스 벨테브레 )이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하멜 일행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멜은 조선의 임금인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으며 자신이 포를 다루는 포수의 경험 때문에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문물과 지식이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하멜은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

  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서 이들을 담당하기가 힘겨워지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현종7뇬(1666년) 마침내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하였다.

  나가사키에는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의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 제주도 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국내에서는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고,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