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기행] 정다산 유적지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서암, 동암, 그리고 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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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기행] 정다산 유적지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서암, 동암, 그리고 천일각..

by 정산 돌구름 2013. 3. 13.
정다산 유적지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서암, 동암, 그리고 천일각..

 

탐방일 : 2013년3월1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103-2

다산초당(茶山艸堂) 소개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1여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茶山艸堂(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온 때는 그가 40세 되던 해인 순조1년(1801년) 겨울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밖의 주막집이 유배지였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 주막집 한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어 자신을 추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의 <사의재기(四宜齋記)>중에는

  생각은 마땅히 맑게하되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되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말이 많으면 곧바로 과묵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중후게 하며 중후하지 않으면 중후하게 하라.

  다산은 백련사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도움으로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고성사

  (高聲寺) 내 칠성각인 보은산방으로 거쳐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9개월을 머물게 된다.

  혜장선사와 다산의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茶道)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이후 유배생활을 감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다산에게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던 혜장선사는 다산보다 10살이 어렸지만 1811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806년 다산은 고성암을 나와 그의 제자인 학래(鶴來) 이청(李晴)의 집에 기거하였다가 1808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도암에 있는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은 외가였던 해남 윤씨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산에 있는 초당은 귤동(橘洞) 마을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윤규하, 윤규의 산정이었다.

  윤단은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약용의 제자가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유배생활은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부호였던 윤광택(尹光宅)은 정약용 부친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아들 윤서유는 죽마고우였다.

  이들의 배려로 유배생활의 어려움은 해소되었고 유배중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정약용의 외동딸이 혼인하여 사돈지간이 된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원래 작은 초가집

  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58년 해남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기왓집으로 새롭게 지었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왓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져 있다. 2칸은 뒤가 거실이며, 앞이 마루로 된 소박한 남향집인데,

  처마밑에는 원판이 없어져 뒤에 완당(阮堂)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만덕산(萬德山)에 자리잡고 강진만을 한눈으로 굽어보는 이곳에서 적거(謫居)하는 동안에 실학을 집성함으로써 빛을 더하게 되었다.

  또, 정석(丁石)·다조(茶竈)·약천(藥泉)·연지(蓮池) 등 이른바 <다산사경(茶山四景)>이 있는데, 정석은 다산이 석벽에 친히 글씨를

  새긴 것이고, 다조는 뒷담 밑 약천의 석간수(石澗水)를 손수 떠다가 앞뜰에서 차를 달이던 청석(靑石)이며, 연지는 초당 동쪽 앞에

  수양을 늘어뜨린 아담한 못으로, 그 안에 몇 개의 괴석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을 쌓았다.

  순조1년(1801년) 신유박해 때 유배된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1여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현재의 <정다산전서>에

  보이는 방대한 실학체계의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다.

 

 -  다산초당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하던 건물로 여기에서 저술작업을 하단 곳이다.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으며 기거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고,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여기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1976년 서암(西庵)과 함께 복원하였는데 현판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방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 다산초당 서암(西庵)

  서암은 윤종기 등 18명의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차와 벗하며 밤 늦도록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재축하였다.

 - 형제를 그리는 마음이 깃든 천일각(千日閣)

  강진만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가족을 생각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1975년에 강진군에서 건물을 세웠다.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모습을 다산은 천일각에 앉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이 형을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도로가의 다산정약용선생유적비..

 

안내도..

 

강진군수가 직접 나서 목민심서 싸인회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고가..

 

유적지 안내도.. 산길따라 300m가량을 올라서야 한다..

 

가는 길목의 뿌리..

 

 

윤종진의 묘..

 

 

다산초당 서암..

 

 

 

다산초당..

 

 

 

 

 

 

 

 

다산초당 동암..

 

 

 

 

 

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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