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기행]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성지 화순 영구산 운주사(雲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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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기행]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성지 화순 영구산 운주사(雲住寺)..

by 정산 돌구름 2013. 1. 24.
[화순기행]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성지 화순 영구산 운주사(雲住寺)...

 

탐방일 : 2013년 1월 22일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

운주사(雲住寺)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

  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덜 야지에 비로자나불(부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와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으로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일주문.. 영구산 운주사 편액이 걸려있다..

 

뒤편에는 천불천탑도량(千佛千塔道場) 편액..

 

운주사 9층 석탑...

1984년11월30일 보물 제796호로 지정된 높이 10.7m에 달하는 세장한 형태가 특징이며,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하다.

기단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만 방형으로 다듬어 탑을 앉혔으며, 4단으로 조출하고 그 위에 초층 탑신을 바로 올렸다.

탑신석은 초층만 세장하고 2층 이상은 초층에 비해 체감율이 적은 편이다. 탑신과 옥개석은 9층을 형성하였고 그 위는 상륜부를 올렸다.

초층 탑신은 한 돌이 아니라 면석과 우주석으로 이루어졌고 얕게 탱주와 우주를 새겼다.

2층 탑신 이상은 모두 한 돌로 탑신석을 만들었고 표면에 동일한 무늬를 새겼다.

무늬는 마름모를 2중으로 한 곽을 만들고 그 안에 4엽의 꽃을 양각으로 새겼다.

옥개석은 9층 모두 네 귀퉁이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한 형태이며, 지붕돌 하부에 추녀와 방사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 무늬를 새겼다.

양식적으로는 백제계 석탑과 상통하는 탑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에 새긴 문양은 물론 비례감 등에서도 유례가 드문 탑형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다.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잎의 꽃잎 문양은 유일하게 운주사의 탑만이 간직하고 있다.

아래 거대한 기단석도 잘라서 운반하였고, 일설에는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한다...

 

 

 

 

가 석불군...

보물 796호인 9층석탑 동쪽 암벽에 위치하며, 좌상이 1분, 입상이 6분, 대좌 6개가 남아있다.

높이 약8m, 너비 약20m의 암벽 중앙에 좌상을 배치하고, 그 오른쪽에 입상 5분과 대좌 5개를 배치하였다.

석불좌상 뒤편에서는 발굴조사 시에 금동여래 입상과 금동보살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한결같이 장방형의 판석을 이용한 듯 볼륨감이 없으며, 얼굴은 세로로 긴 타원형으로 눈썹과 코의 흔적만 보이며,

목에는 삼도를, 신체에는 선각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합장 수인의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여 배치된 형식이다.

바위너설 안에 모셔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풍우를 피할수 있게 바위 너설 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낸 흔적을 엿볼수 있다.

다른 불상 보다도 그 모양이 특이하여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가 인상적이며, 소박하고 친근하다..

 

운주사 거지탑(5층석탑)..

돌덩이를 다듬지 않고 본래 모양대로 갖다가 탑몸에 앉혀 자연미와 파격의 미를 함께 갖춘 탑이다...

 

 

운주사 수직문 7층석탑...

동쪽 산중턱의 높직한 암반 위에 있는 높이 7.2m의 석탑으로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화재자료 제2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대석 등의 시설은 하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사각 모양의 단을 만든 뒤 기단부를 두고 그 위에 탑신부를 올렸다.

우주 사이의 면석에는 가늘게 층을 따라 7~11선의 수직 종선문(縱線紋)을 음각해 놓았는데 각 층 모두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현재 6층의 탑신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 석불군..

가석불군에서 경내 쪽으로 10여 미터 떨어진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에 의치하며, 입상이 9분, 대좌가 10개가 남아 있다.

암벽은 높이가 약5m, 너비가 25m로 수평방향의 암결이 있으며, 하단은 많이 떨어내어져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7분의 협시불을 배열하였는데,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로 묘사되었다.

대형입상은 긴 귀와 코를 가진 세로로 긴 타원형 얼굴에 머리에는 육계를 갖췄으며, 법의는 오른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왼쪽어깨에서 흘러내려 하체에서는 U자형으로, 법의가 몸에 밀착된 듯이 두 다리를 구분하는 수직선을 묘사하였다.

대좌는 복련의 연화를 조각한 연화대좌인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서로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고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장날의 거리 풍경처럼 길가에 소중히 기른 채소며 집짐승 산나물들을 들고

나와 전을 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다 석불군...

가와 나석불군의 연장선상의 동쪽 산등성이 암벽에 위치하는데 앞서 석불군의 암반과는 연결되지 않는 좌우로 양분된 암벽에 위치한다.

암벽높이는 오른쪽이 4~5m, 왼쪽이 8m이고, 너비는 오른쪽의 것이 11m, 왼쪽이 18m로, 오른쪽에 대좌 6개와 불두 2분, 석불입상

2분이 있고, 왼쪽에 방형과 원반형 대좌에 불상 3분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는 방형연화대좌를 갖춘 불좌상이 있고 그 좌우로 입상의 협시불이 배치되었는데, 중앙 불좌상은 두 손이 결실된 채 다른 불상들

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는데, 얼굴은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복련이 묘사된 방형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다.

좌우석불은 기타 불상군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한 돌부처의 모습이 인상적이며, 발가락이 선명하고 그 인상 또한 친근감이 묻어나온다.

가장자리에 서있는 애기 돌부처는 마치 갓난아기마냥 정겹고 앙증맞다. 발가락과 손 모양이 너무나도 귀엽다...

 

 

운주사 7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으며 9층석탑(보물 제796호) 다음에 있는 높이 9.6m의 석탑이다.

원래는 논 가운데에 있었으나 운주사에서 주변 논밭을 모두 매입하여 잔디를 심고 정비하였다. 

석괴형 기단 위에 파격적인 원형의 1단 몸돌받침을 만들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초층과 2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각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해 놓았다.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1석씩이며 각면마다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층마다 추녀와 처마를 직선형으로 표현하였으며,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단정하고 소박한 신라 전형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다.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운주사 쌍교차문 7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된 날렵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칠층석탑이다.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7.75m이다.

큼직하게 잘 다듬은 1석의 사각 기단석 위에 1단의 사각 괴임대를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얹어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석탑의 외형을 보면 신라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층 탑신석에 '쌍교차문(XX)'과 측면의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해

놓아 국내 석탑에서는 유례가 없는 개성있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석도 잘 다듬어서 이곳으로 운반하여 그 위에 직사각형으로 돋을 새김하여 탑을 세웠다.

운주사의 탑의 기단부나 탑신부는 네 개의 직사각형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려 놓은 형식으로 건립하였다...

 

 

 

운주사 광배석불좌상..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9층탑과 석조불감 사이에 위치하는데, 사다리꼴의 판석에 석불좌상이 고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원만한 긴 타원형으로 눈언저리보다 약간 높은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갖추었다.

머리와 이마의 구분선은 보이지 않은데, 미간에는 도드라진 백호를 묘사하고, 육계는 윗부분이 파손되었지만 높게 표현되었다.

짧은 목에는 삼도의 묘사가 보이지 않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식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소매에만 사선으로 음각되었고, 옷에 가려진 손의 모습은 무릎 바로 위에서 명치 부분으로 모아지는 형태이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길상좌이며, 다리에 온통 옷주름이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사다리꼴 판석으로 상단 일부가 파손되었는데, 두광과 신광의 구분 없이 전체에 소용돌이 모양의 화염문을 표현하였다.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4차 발굴조사에서는 이 불상의 하부 유구를 조사하였는데,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편들이 출토되어

현재의 유구상태로는 목조 감실 같은 간이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 석조불감 앞 7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으며, 운주사 석조불감 바로 앞에 있다.

높이 7.5m의 이 탑은 다른 석탑들이 석괴형의 사각 모양 지대석을 둔 것과 다르게 아주 낮은 지대석 위에 탑신부를 올렸다.

지대석 위에는 높이 약 5cm의 1단 몸돌괴임을 두고 그 위로 탑신을 얹었다.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를 이루는 우동마루(내림마루)는 뾰족한 각을 이루지 않고 통통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적절하여 전체적인 안정감을 준다...

 

 

운주사 석조불감..

원반형 연화탑 남쪽 5m 지점에 자리한 불감으로 1984년11월30일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었다.

재료는 화강석이며 높이 5.5m, 폭 5m로 기단 위에 방형 몸체를 올리고 그 위는 팔작지붕 형태를 만들었다.

불감 내부에는 앞뒤로 석불 2체를 앉혔는데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일반적으로 불감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 형태의 공예적인 형태인데 운주사 석조불감은 외부에 조성된 특이한 예이다.

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석실 위로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현재 석불 앞은 개방된 상태지만 원래는 석실 앞에 문을 달았었다. 문을 달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내부에 봉안된 두 불상은 각각 남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여래좌상으로 남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55㎝이다.

원만한 둥근 얼굴에 소발의 머리를 갖추었는데, 육계부분은 파손되었다.

가느다란 눈썹과 콧등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되어, 코는 길고 예리하게 표현되었으며, 목에 삼도(三道)가 음각되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으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위에 얹은 모습으로 손가락까지 묘사되었다.

오른발을 들어 얹은 결가부좌의 형태로 길상좌에 속하며, 발바닥과 발가락을 제외한 다리부분에도 도식적인 옷자락이 표현되었다.

광배(光背)는 사다리꼴 형 판석에 두광과 신광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문양이 선각되어 있는데 화염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64㎝로 원반형 연화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남쪽을 향한 불상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얼굴은 원만한 둥근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과 눈, 희미한 입을 갖추고, 귀는 형태만이 남아있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없고, 목은 짧은데 삼도가 뚜렷이 묘사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주름이 가슴부분에 모아 쥔 두손으로 흐르다가 결가부좌한 다리까지 신체 전면을 덮고 있다.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주형(舟形)의 판석에 위쪽이 가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선각되었는데, 이것도 화염문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두 불상은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두분의 석불은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불우조에 이 상배불이 언급되어 있다.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 천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이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돌문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앞바다에 내다버렸다 한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1984년11월30일 보물 제798호호 지정되었으며, 탑의 독특한 형태로 인해 연화탑 또는 호떡탑으로 불린다.

원형 지대석 위에 원형에 가깝게 다듬은 기단을 놓았는데 상부는 앙련을 얕게 새긴 갑석을 덮었다.

갑석 위에 단면 원형을 다듬은 탑신석을 놓고 버섯처럼 외곽을 접은 옥개석을 올렸다.

현재 6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으나 비례로 볼 때 원래는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

기단은 한 돌로 만들지 않았는데 4매의 돌을 다듬어 조립하고 그 안은 잡석으로 채웠다.

탑신석에는 가로로 두 줄을 새겨 장식하고, 옥개석 바닥면에도 두 줄의 선을 얕게 음각하였다.

옥개석을 원반(圓盤) 모양으로 다듬은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유례가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연적인 명당탑에 비해 인공적인 거북형의 하대석 위에 자리한 10각 기단부, 연꽃문양의 기단갑석에 둥근 탑신석과 둥근 원형의

옥개석을 갖춘 아름다운 석탑이다. 원과 원으로 이어진 우주전체를 조형하고 있는듯한 인상이다.

기단갑석에 두른 연꽃문양,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부처밖에 없다. 탑 전체가 부처를 상징한 탑이다.

일반적인 탑의 꼭대기 부분인 앙화와 보륜 그 위의 보개, 수연, 보주, 찰주 등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연화탑은 현재 6층만 남아있으나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온전히 남아있었다면 그 해석이 더 용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아하고 개성적인 아름다운 석탑은 이곳 운주사만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석탑 예술의 특징이다.

둥근 처마를 잘빗어 내린 옥개석과 둥근 탑신의 절묘한 조화도 경이롭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기단갑석의 연화무늬의 선을 쪼은 정자국이

방금한 듯 남아있어 조형자의 혼과 숨결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무명탑과 지혜당.. 지혜당은 서점과 찻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운주사 보제루..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범종각(梵鍾閣).. 

사방 1칸의 단칸 건물로 익공계 모임지붕으로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익공을 짰는데 이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간에는 화반을 각 2구씩 두었다.

구조는 좌우로 대들보를 하나 걸고 대들보 한가운데 기둥을 세워 네 모서리에서 나온 추녀를 걸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건 겹처마로,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사모지붕을 만들었으며 지붕 정상부는 절병통을 올려 마가마하였다.

내부 천장에는 각 칸마다 용을 그려 넣었는데 흰색, 황색, 청색, 녹색으로 각각 구분하였다.

종각 외곽 하부에는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전면만 가운데를 개방하여 드나들기 편하게 하였다.

종각 안에 걸려있는 기문에 따르면 불기 2538년 즉 1994년에 범종 불사를 추진하였다...

 

 

3층석탑... 뒤편에 행랑채와 공양간..

 

 

 

운주사 대웅전 앞 다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0호로 지정되었으며 운주사 대웅전 앞에 있다.

높이는 3.23m이며, 탑신은 4층의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그 이상 부재가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옥개석 낙수면부가 일반적인 옥개석의 형태가 아니고 전탑과 같이 층급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3계단의 모전석탑 유형이다.

각층의 옥개석 전각 부분에 가벼운 반전이 있어 전탑계 석탑으로 보인다.

모전석탑과 유사한 형태이지만 탑 제작에 벽돌 모양으로 깎은 돌이 아닌 통돌을 사용하였다.  운주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의 석탑을 빼어닮은 완전한 신라탑의 유형이다.

전탑양식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으로 그 형식에 있어서 옥개석(지붕돌)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4층만 남아있으나 실제로는 7층 혹은 9층은 되었음직한 크기다.

일설에는 이 탑을 건립할 때 맑은 날 거대한 이무기가 감고 올라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그 요물을 벌하였는데 그때 이렇게

파손되었다는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안에는 석가여래상을 비롯해서 1988년에 봉안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및 금고가 있다.

주존상 뒤편에는 후불탱화로 1994년에 조성한 영축산에서의 석가모니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였다. 

장대석 기단 위에 역시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단에는 정면과 좌우 측면에 각각 1개소씩 계단을 두었으며 기단 바닥은 전돌로 깔았다.

전면 3칸은 4분합문을 달고 나머지 3면은 문짝 외에 판벽을 설치하였다.

고막이석에는 구멍을 뚫어 卍자를 새겨 통풍을 시키고 있으며, 기둥 상부는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올렸다.

포는 외2출목, 내3출이며 주간에는 주간포를 2구씩 배열하였고, 외부 첨차는 교두형으로 다듬었고 살미는 앙서형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모두 교두형으로 다듬었으나 3출목 이상의 살미는 운궁형으로 치목하였고, 포벽에는 좌불 1구를 각각 그려 넣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이며 귀처마는 추녀와 사래를 걸고 선자연을 썼다.

지붕에는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하단에 미출을 써서 장식적인 효과를 냈다.

내부는 우물천장을 들여 구조는 가려져 있고, 상하 2단으로 나눠 우물천장을 가설함으로써 공간상의 위계를 자연스레 드러낸다.

대웅전 내부에는 후불벽을 만들고 그 앞에는 닫집과 불단을 상하로 설치하였다.

닫집 외관은 운궁형이지만 내부는 화려한 다포계 공포로 짜고 닫집 천장에는 용을 그려 장식하였다.

닫집 전면 판에는 한가운데에 옴자를 그려 넣고 그 좌우로 피리를 불며 하늘을 나는 주악천인상을 그려 넣었다.

후불벽 배면에도 관음상을 그리고, 배면 문짝 좌우 벽에도 백의관음상을 그려 장엄하였다.

중앙 불단뒤에는 근년 조성된 석가모니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으로 불기 2538년(1994)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주존상인 석가모니불좌상은 석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모셔져 있는데, 얼굴은 턱이 좁은 원만한 형태로 이마에는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묘사되어 있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로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갖추고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내의는 윗배 부분에서 띠매듭으로 고정하였다.

법의 자락은 어깨에서 수직으로 흘러 결가부좌한 다리에서 수평 곡선으로 주름지다 아래로 흘러 대좌를 덮는 상현좌의 형식을 갖추었다.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왼쪽 무릎 위로 손등을 살짝 댄 설법인을 결하고,

불상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좌로 상단의 복련과 하단의 앙련 사이에는 원형단을 둘러 높이를 조성하였다.

하단의 앙련 밑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된 16각형 단을 대고 그 밑에 방형 판석을 대었다.

신중탱은 부처의 정법을 수호하는 신들[신중(神衆)]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신중은 원래 고대 인도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화되어 호법선신의 기능을 맡게 되었다고 전한다.

대웅전에 봉안된 신중탱은 불기 2538년(1994)년에 조성된 것으로 중앙 불단을 향해 볼 때 왼쪽 측벽 불단에 모셔져 있다.

불화 제작에는 후불탱화 영산회상도와 동일한 금어(金魚) 해봉 석정 등이 참여하였다.  

중앙 하단에는 삼두팔비(三頭八臂)의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심으로 상단에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을 배치하고

사이에 태상노군, 동진보살 등을 배치하고 그 둘레에는 팔금강(八金剛), 사보살(四菩薩)과 여러 신(神) 등을 묘사하였다.

채색은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명확하게 하고, 드문드문 지물 등에 금채를 더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각 측벽 상부에는 다수의 벽화가 백의관음(白衣觀音)을 주제로 그려져 있다.

대부분 해상(海上)에서의 백의관음과 선재동자를 묘사하였고, 그 아래 벽면에는 연화나 괴석 등을 그렸다.

이 벽화는 일반 흑벽이 아닌 목조 판벽으로 되어 있어, 이 벽화도 판벽화로 분류된다.

한편 내부 본존상 후불벽의 뒤편에는 천수천안관음도(千手千眼觀音圖)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진한 남색바탕에 만개한 연화좌위에 11면에 천개의 손을 가진 관음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천개의 손에는 천개의 눈이 있어

천수천안관음으로 불린다. 11면의 얼굴 위에는 좌상의 아미타불을 모시었고, 천수의 손에는 중생구제에 필요한 지물을 각각 들고 있다.

관음이 걸친 천의는 바람에 날리고, 하늘에 떠 있는 듯 상단에 구름이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 대웅전 외부 벽면에도 각 벽면마다 벽화를 그려 넣었는데, 그 내용은 부처의 인연고사에서 불교계의 인연고사까지 다양하다.

이것 역시 판벽화로 조성되어 있다. 또 외부 포벽에는 다양한 수인의 불좌상을 묘사하였다.

금고(金鼓)는 금속으로 만든 북의 일종으로 범종과 같이 사찰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범음구이며, 반자(飯子) 또는

금구(禁口)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형태는 꽹과리를 크게 만들어 놓은 모양으로 측면이나 상하에 2~3개의 고리를 만들어 매달 수 있게

하고 표면에는 보통 연화문이나 당초문, 보상화문, 여의주문 등을 장식한다.  

이 금고는 대웅전 중앙 불단을 향해 볼 때 왼편에 있는 신중탱 불단 왼편에 봉안되어 있다.

윗부분과 좌우에 3개의 고리가 달려 금고대에 매달려 있다. 표면에는 연잎 끝이 뾰족한 2중 연화문을 장식하였는데, 즉 연화문을 당좌에

묘사한 후 그 당좌를 연밥으로 삼아 하나의 연화문을 더 장식하였다. 테두리에는 장식이 없으며, 안쪽 면에는 ‘불기 2334(1990)’년의

화기와 ‘운주사(雲住寺)’의 사명과 주소, 그리고 시주자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범종은 종신(鐘身)에 ‘화순군 도암면 영구산 운주사[和順郡 道岩面 ?龜山 芸柱寺]’라는 명문과 한글로 시주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근년에 조성된 것이다. 상부에는 용뉴와 음통이 있고, 그 아래로 당초문이 장식된 상대를 둘렀다.

상대 아래는 앞·뒤면에 2개의 유곽이 있고, 탑신에는 조그만 당좌와 두광을 갖춘 승문형 인물이 합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그 주위 가득 시주자명을 새기고, 그 아래 하대를 둘러 장식하였다...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 익공계 맞배집으로 현존 전각은 최근 새로 지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익공으로 짰는데 초익공이며 주간에는 소로를 받쳤다.

내부 가구는 5량가로 짜, 앞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주두와 첨차형 부재를 놓고 종보를 올렸다.

종보 이상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구조를 확인할 수 없으며, 천장은 우물반자를 썼는데 중도리를 기준으로 층단을 두었다.

전면 3칸에는 각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는데 문짝은 궁판 위에 교살로 문살을 짰고, 전면 기둥 앞에는 각 기둥마다 주련을 걸었다.

나머지 3면은 벽을 들이고 벽화를 그려 장엄하였다.

지장전 안에는 뒷벽에 붙여 3단의 불단을 ‘ㄷ’자 형으로 조성하여 존상을 봉안하였다.

가운데 지장보살상을 두고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협시하고, 좌우에는 목조로 된 지장천불을 봉안하였다.  

지장천불은 천정에 닿을 듯한 계단식 불단에 두었으며, 반가량은 옻칠을, 반 정도는 개금을 하였다.

위쪽 불단에는 개금을 한 지장보살을, 아래쪽 불단에는 옻칠을 한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중앙 지장보살은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좌상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인은 설법인을 결하고 법의자락이 대좌를 덮는 형식의 상현좌이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원만하고 살짝 웃는 듯한 인상을 보인다.

머리는 승문형의 민머리인데 두건을 쓰고 있어 피건형 지장상이 되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고 그 아래로 목걸이를 장식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내의는 띠 매듭으로 고정하였다.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는 법의 자락이 드리워져 대좌를 덮고 있으며, 대좌는 연화좌로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되었다.

좌우 협시로는 승문형의 도명존자와 관모를 쓴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있다.

지장전 문 입구에는 근년에 조성된 범종 하나가 봉안되어 있다...

 

 

 

 

 

 

 

 

 

미륵전...

 

 

 

 

석불군...

대웅전에서 공사바위 가는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20m 쯤 떨어진 암벽 남쪽에 위치한다.

좌상 2분, 불두 1분을 포함하여 입상 3분, 대좌 1개가 남아 있는데, 이 불상군은 배열 상태가 상당히 흐트러져 있다.

본래 상태와 유사한 상태로 보이는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왼편에 소형의 석불좌상을, 오른편에 불두 1분과 입상의 불상 2분을 모셨다.

암벽은 높이 15m, 너비 20m로 마애여래좌상의 암반과 연결되어 중앙부와 하단을 깎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감실 형태를 이른다.

감실 형태의 구조물 흔적으로 보이는 길이 14cm, 너비 8cm, 깊이 6cm의 구멍 4개가 좌우 상하단에 나있다.

중앙 불좌상의 오른쪽에 있는 불입상 2분은 얼마 전까지 서로 어깨를 기대로 있어 ‘부부부처’라고 불렀는데, 대좌로 보아 원래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현재는 따로 떨어져 있다. 이 두 불입상 옆에는 불두가 하나 있는데, 눈썹과 코를 잘 다듬은 이 불두에는

중심에 수직으로 5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돌을 쪼개려는 채석구멍과 달리 뚫려있어 그 연유에 대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근엄하게 앉아있는 불상이 아버지처럼 엄숙해 보이고 그 옆에 얼굴이 반쯤 떼어진 작은 불상이 응석받이 아들 부처 같다.

예전에는 기단위의 단위에 모셔져 있었는데 훼손의 정도가 심하여 단도 사라지고 바닥의 판석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들불상도 제 짝이 아닌 기단석 위에 놓여져 있는데, 원래는 아버지 부처 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배치가 흐트러진 상태다.

아버지불상 뒤에 움푹 패여 닳아진 부분이 아들 불상이 앉았던 자리인데 잔바람에도 자꾸 들썩거려 신비롭게 파였다한다.

오른쪽 부부부처도 원래는 어깨를 마주대고 있었는데 떼어 놓았다한며, 득남설화와 관련하여 부부 불상의 코의 파손이 매우 극심하다...

 

 

불사바위..

운주사 사역 가장 뒤편인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이는데,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 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40미터 떨어진 암벽에 위치한다.

즉 운주사 불적과 일대의 풍경을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공사바위’ 바로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은 계곡 안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과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다.

균열로 인해 탈락이 심하나 암벽의 요철 부분을 그대로 살려 얕게 부조한 이 마애불은 타원형의 얼굴에 희미하게 눈과 입이 묘사되었고,

도드라진 긴 코와 긴 귀를 지녔으며, 머리와 이마는 거의 없이 육계만이 두툼하게 솟아 있고, 목은 두툼하고 긴데 삼도가 선각되어 있다.

법의는 한쪽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오른쪽 어깨는 탈락이 심한 편이다.

두손은 꼭 모아진 형태인데 소매자락으로 가리어져 있어 어떤 수인을 결하였는지 판독하기 어렵다.

불좌상의 대좌는 연화대좌로 8개의 연꽃잎을 복련의 형태로 묘사하였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의 구분없이 육계 상단부에서부터 몸체 좌우 그리고 무릎 위쪽까지 음각선으로 화염문을 표현하듯이 처리하였다.

마애불좌상의 머리 윗부분에는 가로로 장방형의 홈이 파여 있어 예전에는 풍파를 막는 장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대한 바위벼랑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불상이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 명당탑..

운주사의 주산인 영구산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탑으로써 넓적한 하대석에 사각형의 기단면석 위에 놓인 둥근 원반형 석탑이다.

운주사의 석질은 이렇게 시루떡처럼 잘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특이한 형식의 석탑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넓고 둥근 돌을 둥근 탑신을 세운 그 위에 층층이 올려 놓았으나 옥개석 밑면을 보면 연화무늬가 둥그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남은 탑은 자세히 보면 그 석질이 서로 다른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곳이 천년을 지배할 황제가 태어날 천년 군황지혈이라 하여 명당을 찾는 무리들에 의하여 그 훼손의 정도가 남다르다.

앞 4층 석탑도 훼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운주사 실패탑...

 

스님들의 수행공간 원융당...

 

운주사 거북바위 5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지정되었으며,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큰 암반에 세워진 높이 5.57m의 석탑이다.

이 탑은 같은 암반 위에 서있는 7층석탑과 달리 신라 전형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데, 옥개석의 생김이 직선적이고 육중하다.

탑의 옥개석 상면에 탑신괴임을 생략한 것은 운주사의 다른 탑의 기법과 같다. 상륜부는 위는 좁고 아래는 퍼진 복발형(伏鉢形) 부재를

안치하였고 그 위로 보주를 연결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매우 세련된 느낌을 준다...

 

 

 

운주사 거북바위 교차문 7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된 높이 7.17m의 석탑이다.

운주사 계곡의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암반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7층의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탑신의 2층에서 7층까지의 4면에 X자형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너른 바위를 온통 기단석으로 해서 비스듬이 깎아지른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세웠는데 그 건축 기술과 과학적 재치가 신비롭다.

얇은 옥개석에 처마귀가 솟은 걸로 봐서 백제계탑이다. 볼록 솟은 교차 문양은 동서남북 사방불을 상징하는 듯 싶다...

 

 

 

바 석불군...

운주사의 서쪽 산등성이 와불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

높이 5m, 너비 12m의 거대한 암반 위에는 석탑 2기가 모셔져 있고, 그 남쪽 측면에는 3×4×2m의 공간을 형성하여 암벽 감실을

조성하여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불상 2분, 입불상 8분을 안치하였다.

이외에도 이 암벽에는 높이4m 지점에 지름1m정도 암벽이 다듬어진 흔적이 있어 이곳에 대형불상을 안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불좌상은 여타의 불상군보다 마모가 심하지 않아 얼굴에 눈, 코, 입의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으며, 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 덮는

통견식으로 착용하였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띠를 이루었으며, 두 손은 모두 결가부좌한 무릎위에 얹었는데,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왼손은 손바닥으로 위로하였다. 대좌는 방형의 연화대좌를 갖추었는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장식이 없다...

 

 

 

시위불(侍衛佛)..

와불로 가는 산 정상 바로 아래 부분에 모셔져 있는데, 와불을 지킨다하여 시위불 또는 머슴부처라 불리기도 한다.

조각이 뚜렷하지 않아 희미하지만,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머리에 관모를 쓴 것처럼 단이 진 육계와 머리와 이마를 구분 표현하였다.

이마는 한 단 낮고 좁은데, 그 아래로 눈썹과 연결된 오똑한 코와 초생달형의 눈이 묘사되어 있다.

입은 희미하여 잘 알 수 없고, 귀는 이마 위에서부터 입 부근까지 길고 좁게 묘사하였으며, 볼은 도톰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식으로 보이나 왼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묘사되지 않았다.

수인은 오른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왼팔을 쭉 뻗어 왼쪽다리에 붙이고 있는데 시무외 여원인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암반위에 세워진 이 불상의 크기는 좌상의 와불 오른쪽에 길이 6m, 너비 95~115cm, 두께 68cm의 채석흔적과 유사한데,

와불 옆에서 떼어냈다는 구전상의 이야기와 대체로 부합되어, 와불 옆에서 떼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臥形石造如來佛)..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서쪽 계곡의 산 정상에 위치한 와불은 석불좌상과 입상이 나란히 누워 있어 ‘부부 와불’로 불리기도 하였다.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조각된 이 불상은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온다.

좌불은 달걀형의 얼굴에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썹과 코, 거칠게 조각된 긴 귀를 갖췄으며,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표현되지 않았다.

육계는 다른 석재로 불상의 머리 오른쪽에 놓여져 있는데, 이를 두고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잘라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으로, 그저 암반이 부족하여 취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이마는 머리부분보다 한 단 낮게 깍아 경계지었으며, 목은 길고 넓은데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다.

신체는 머리에 비해 좁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식으로 걸쳤다.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 가슴부분에 모아 쥔 두 손으로 모아졌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수평의 원호로 선각되었다.

수인은 옷자락에 가리워져 확인하기 어려운데, 합장인이거나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입불은 조각수법에 있어서는 좌불과 흡사함을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기다란 얼굴에 반달형 눈, 기다란 코와 두툼한 입술에 긴 인중을

묘사하고 있다. 눈 주위는 눈썹을 돌출돼 보이게 하기위해 한 단 낮추어 조각하였으며, 귀는 깨어진 채로 흔적만 남았다.

이마는 좌상과 마찬가지로 머리부분보다 한 단 낮게 표현하였는데, 머리 위 육계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경계 지어져 있다.

신체 역시 머리보다 좁고, 신체로 이어지는 목은 길고 넓지만 삼도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법의는 왼쪽 어깨를 드러낸 좌견편단식으로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서 발까지 흐르는 옷주름을 선각하였다.

인은 왼팔은 들어올려 오른쪽 가슴에 대고 오른팔은 구부린 채로 손들을 배어 댄 어색한 시무외여원인을 결하고 있다.

이 두 석불은 다리부분이 약간 높은 머리가 남향인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다리부분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이 있어 전해오는 설화처럼

세우려 하였는지, 미완성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m, 입상 10.26m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채석장...

1989년 조사 당시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을 제작에 쓴 석재를 채취하고 운반한 유적을 주변에서 발견한 것이다.

와불에서 칠성바위로 가는 서쪽 산허리 주변의 암반에는 불상용 돌을 채취한 채석장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채취한 암반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마멸된 암반의 흔적 등을 확인하였다...

 

칠성바위(七星巖)...

운주사 ‘와불’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20m쯤 밑으로 내려오다 보면 일곱 개의 원반형 바위가 있다.

원반형 칠층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북두칠성이 땅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배열상태와 원반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광도(光度)]와 매우 흡사하여 칠성석일 가능성이 높다.

각 돌의 지름은 28~385cm 정도이고, 제작 시기는 주변 불적과 함께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정황에 따라 이 7개의 바위를 북두칠성석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칠성석은 칠성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칠성신앙은

본래 불교에서의 북진(北辰) 묘견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이 칠성신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여러 사찰에 칠성각의 형태로 남아있다.

북두칠성은 농사의 풍요, 생명의 관장,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로 믿었다한다.

원시시대 고인돌 관뚜껑, 고구려 장군총, 무용총 무덤안의 천상도 북쪽에도 북두칠성이 정확히 찍혀져 있다.

민가의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새벽에 기원을 드릴 때 북쪽 하늘에 뜨는 별이 바로 북두칠성이다.

불교에서도 우리 민간 신앙을 받아들여 삼신각 혹은 칠성각을 짓고 거기에다 모셔놓고 있다...

 

 

 

 

운주사 칠성바위 앞 7층석탑...

2005년7월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계곡 왼쪽 기슭에 있는 칠성바위 앞, 커다란 암반 위에 서있는 높이 7m의 석탑이다.

따로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을 설치하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를 올린 모양이다.

탑신 각면에는 양쪽 귀퉁이에 넓직한 우주를 두드러지게 모각하여 둔중한 느낌이 난다.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대부분 직선이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 반전이 있으며 낙수면도 평박(平薄)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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