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무등산 증심사와 보물 제131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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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무등산 증심사와 보물 제131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by 정산 돌구름 2013. 1. 1.
[광주기행] 무등산 증심사와 보물 제131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탐방일 : 2012년 12월 30일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56

증심사(證心寺) 소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헌안왕4년(860년)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고려 선종 11년(1094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다.

  세종25년(1443년)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으며, 오백전을 건립, 오백나한과 십대제자를 봉안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해왔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광해군1년(1609년) 석경·수장·도광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한·일 불교의 공동원류설이 제창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한용운 등이 일본은 염불종·조동종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된 반면, 한국은 임제종(臨濟宗)을 이어받아 두나라 불교의 뿌리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펼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통을 천명하고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오백전, 대웅전·지장전·비로전·적묵당·종각·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내의 오백나한상은 1443년의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옆에는 높이 205㎝의 석불 1구가 있는데,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삼층석탑, 고려 초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는데, 이 차밭은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절 주변이 1986년11월1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일주문(一柱門)...

1980년대 초에 건립한 것으로 팔작지붕에 전체적으로 현란하게 단청되어 있다.

세벌대 기단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았으며, 지름 75㎝의 배흘림 원주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포작을 하였다.

원형기둥의 앞뒤에는 작은 팔각기둥이 있으며, 두공은 내외 삼출목 다포식이고 주문포작은 정면에 2개가 있다.

살미첨차(山彌簷遮)의 쇠서부분이 급하게 반곡되어 있으며 연봉은 초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림(碑林)과 부도...

1912년 이래 1975년까지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3기의 부도와 17기의 비석이 있다.

우측 탑을 본 따 세운 부도 3기는 대덕화안혼탑(大德華安魂塔)·조씨정행화탑(曺氏淨行化塔)·강진최씨지탑(康津崔氏之塔)이 있다...

 

비석은 건립연대순으로 김서운사적기저삼강녹급향부중비(金瑞雲事蹟己著三綱綠及鄕扶中비, 1912년),

증심사불량계답명(證心寺佛糧禊沓銘, 1921년), 참봉정공낙교시혜공덕비(參奉鄭公洛敎施惠功德碑, 1921년),

청신녀조씨정행화공덕비(淸信女曺氏淨行華功德碑, 1922년), 참서관해남윤공주신유애비(參書官海南尹公柱臣遺愛碑, 1923년),

청신녀묘화광서우죽기념비(淸信女妙華光徐友竹紀念碑, 1925년), 청신녀정월광이희춘영생비(淸信女淨月光李喜春永生碑, 1925년),

청신녀청정행구룡수성비(淸信女淸淨行具龍守性碑, 1925년), 청신녀정토행김장성선행비(淸信女淨土行金長城善行碑, 1925년),

선교양종청호당대선사기념비(禪敎兩宗淸昊堂大禪師紀念碑, 1927), 청신녀상락행김성배귀진비(淸信女常樂行金聖培歸眞碑,1928),

전돈령부도정정공만재공덕기념비(前敦寧府都正鄭公萬在功德紀念碑, 1931년), 학산천공보배기적비(鶴山千公寶培紀績碑, 1936년), 증심사불량계추공비(證心寺佛糧禊追功碑, 1949년), 여사애월당만영화청주좌씨헌성비(女史愛月堂晩永華淸州左氏獻誠碑, 20세기초),

유인미량박씨선도화비(1964년), 증심사대웅전중건기적비(證心寺大雄殿重建紀績碑, 1975년) 등 17기이다...

 

중앙의 한가운데 있는 규봉당 부도(圭峯堂 浮屠)..
이 부도는 비로전 뒤편 북쪽의 암벽 중앙에 세워져 있는데,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에 세워 놓은 것이다.

원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과 상륜을 안치하였고, 탑신과 상륜은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에는 가로로 ‘규봉당(圭峯堂)’이라는 당호(堂號)가 새겨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76cm이다.

전면 중앙의 월암당대사민성 부도(月岩堂大師敏性 浮屠)..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하여 그 위에 방형의 중대석을 올려놓았는데 현재의 지대석은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평면이 사각형인 중대석의 각 면에는 사람의 얼굴과 꽃무늬를 새겼는데, 얼굴이 장승의 모습과 비슷하다.

상대석은 원형에 가까운 팔각의 앙련대(仰蓮臺)인데 정면의 앙련을 중심으로 좌우에 둘씩 5엽을 조각하고 뒷면은 생략하였다.

팔각 탑신의 정면에는 ‘월암당대사민성(月岩堂大師敏性)’이라는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 ‘강희오십사년오월일을미입(康熙五十四年五月日乙未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1715년(숙종 4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의 처마에는 2단의 서까래와 부연을 새기고 낙수면에는 기왓골을 각각 조각하였다.

윗면의 우동마루에는 여덟 개의 용머리를 조각하였는데, 정면의 용머리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고 나머지는 정면을 바라본 모습이다.

전면 좌측 월암당 부도 바로 옆에 있는 수월당보문 부도(水月堂普文 浮屠)..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거북의 등에 사각의 받침을 마련한 대좌를 놓았다.

탑신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타원형의 돌로서 정면에 ‘수월당보문(水月堂普文)’이란 당호(堂號)만 새겼다.

사각형의 옥개석 우동에는 용머리와 낙수면의 기왓골을 조각하였고, 전각의 반전은 매우 심한 편이며, 처마 밑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증심사 사천왕문...

2012년2월23일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의식을 열었었다.

사천왕은 1609년 중창한 정문누각 취백루 1층에 모셔 있었지만 6.25때 소실된 사천왕을 봉안하기 위해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복원..

사대천왕(四大天王)은 동방에 지국천왕, 서방에 광목천왕, 남방에 증장천왕, 북방에 다문천왕을 각각 배치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埵)에 있는 천궁(天宮)에서 살고 있다.

16선신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한다.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달리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을 방어하는 신은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埵)에 살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그는 흔히 잡어(雜語)·비호보(非好報)·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으며,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闍) 등이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埵)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취백루(翠栢樓)..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2층 누각(樓閣)으로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하층에는 종무소와 큰방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취백루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574년(선조 7)에 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증심사가 4창 되던 1609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광해군 1년(1609년)에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등 세 스님이 증심사를

4창하면서 세운 정문 누각이라 한다.

당시 하층에 사천왕을 봉안하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2층으로 마루가 깔린 2층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취백루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의 시구에서 취해졌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6.25 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 칸이 좌우 협칸이나 퇴칸보다 2배 정도 크며,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고, 그 아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기둥 위에는 용두와 주제를 놓았는데 용두를 밖으로 노출시켰으며, 내부에는 용꼬리부분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앞쪽 외진문에 외짝교살창문을 설치했는데 그 옆벽에는 십우도(十牛圖)를 그렸다.

 

또한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포작을 놓았으며 외삼출목·내오출목의 다포양식이다.

천장은 고주가 없이 평주와 내진주를 연결시켜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량에 수평으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오출목 부분에서 우물천장까지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었으며, 그 뒤에 석가모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왼편에 칠성탱, 오른쪽 벽에는 신중탱을 모셨으며, 그 외에 범종 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문수ㆍ보현보살이 오는 것이 상례인데,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석가모니불은 나발의 머리와 볼록한 정상계주에 방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를 갖추고 있다.

좌측에 협시한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을 쓰고, 왼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의이며, 목에는 영락이 장식된 목걸이를 걸고 있다.

우측에 협시한 보살은 보관에 대세지보살의 지물인 정병(淨甁)이 표현되지 않아 정확한 존명을 알 수 없으나,

좌협시인 관음보살의 상대적인 존재로 대세지보살임을 추정할 뿐이다..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탱화이다.

구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ㆍ보현ㆍ관음ㆍ지장 등 8대 보살과, 범천ㆍ제석천,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등장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배치된 보살과 성문(聲聞)들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의 좌대 아래에는 두 명의 동자가 합장한 채 서 있다.

탱화는 1997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하였다...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들을 나타낸 탱화로서 중앙의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심으로 화면 가득 104위의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인 신중탱에 등장하는 범천, 제석천, 위태천은 화면 상단의 좌우와 중단에서 각각 연꽃을 들거나 금강저를 들고 있다.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천왕과 팔금강, 천부의 천자, 팔부신중 등 다양한 신중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탱화는 1990년 금어인 조정우(曺廷宇)가 조성한 것이다...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중앙의 금륜(金輪)을 든 치성광여래와 좌우 대칭으로 7여래를 배치한 칠성탱이다.

치성광여래 좌측으로는 원만세계금색성취여래불(圓滿世界金色成就如來佛), 유리세계약사유리여래불(琉璃世界藥師琉璃如來佛),

정주세계광달지변여래불(淨住世界廣達智辨如來佛),최승세계운의통증여래불(最勝世界運意通證如來佛)과 상단에 성군3인을 배치했다..

우측에는 묘보세계광음자재여래불(妙寶世界光音自在如來佛), 무우세계최승길상여래불(無優世界最勝吉祥如來佛), 법의세계법해유희

여래불(法意世界法海遊戱如來佛)과 상단에 역시 3인의 성군을 배치하였다...

치성광여래의 두광(頭光) 좌우측에는 연꽃에 쌓인 듯한 모습의 해와 달이, 무릎 주변에는 3인의 동자ㆍ동녀가 시립해 있다.

우측 하단에는 북두칠성을 표현하고 각각의 별에 성군의 명호(名號)와 부적을 적어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표현하였다.

삼베에 감청색을 바탕색으로 채색하여 밤하늘을 나타내었으며, 하단에 구름과 산을 표현하여 땅과 하늘을 구분하였다.

이 불화는 송광사 방장인 범일보성(梵日普成) 스님의 증명으로 고영을(高永乙)이 2001년에 조성하였다...

 

대웅전 범종(大雄殿 梵鍾)..

1936년에 조성된 높이 100cm의 범종으로 천판 위에 용통(甬筒)은 없고 한 마리의 용이 종가(鍾架)와 종신(鍾身)을 이어주고 있다.

종신의 윗부분에는 4개의 범자와 당초문의 대(帶)가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이 있다.

종신의 중앙에 쓰여있는 시주자명 사이로 2위의 보살입상과 2위의 신장상이 조각되었으며, 하단에도 당초문의 대가 둘러져 있다..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5칸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창방 아래에는 4면에 모두 돌아가면서 주악비천상을 그렸고, 중앙과 왼쪽에 ‘지장전(地藏殿)’과 ‘회심당(繪心堂)’ 편액을 각각 달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ㆍ판관ㆍ녹사ㆍ동자 등 명부중(冥府衆)의 상과, 지장탱 및 4폭의 시왕탱을 봉안하였다.

...

 

 

 

지장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은 영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민머리에 석장을 쥐고 있다.

문관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과 수행하는 모습의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후불화로 지장보살화가 있는데 지장보살과 그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지장시왕탱(地藏十王幀)은 명부세계(冥府世界)의 구원자인 지장보살과 명부의 심판관인 십대왕(十大王)을 표현한 탱화이다.

화면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시왕 등 명부중(冥府衆)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된 구도이다. 이 탱화는 1993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이 조성하였다...

 

비로전(毘盧殿)..

대웅전 뒤쪽의 높은 축대 위에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덤벙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에 모두 2분합문을 달았으며, 중앙 칸에는 권창윤(權昌倫)이 쓴 ‘비로전(毘盧殿)’ 편액을 달았다.

내부 구조는 대들보와 종보 위에 마루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이며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자나후불탱을 봉안하였다.

1986년 영주스님이 중수하였다..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90cm로 현재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이 불상은 원래 증심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1934년 광주 시내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원래 위치는 구 전남도청 부근으로서 그곳은 당시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라는 절터였다고도 하고 지산동 부근이라고도

하는 등, 옮겨올 당시의 자료가 전하지 않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비로전 비로자나후불탱(毘盧遮那後佛幀)은 화엄경의 주존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설법장면을 나타낸 탱화이다.

구도는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팔대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 용왕, 용녀, 타방불 등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비로자나불은 탁자에 놓인 연화좌에 앉아 있으며, 불신에 걸친 법의에는 화려한 화문을 표현하였다.

붉은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이 후불탱은 1985년 금어인 구봉홍선(龜峯弘善)이 조성하였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가늘게 뜬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 귀는 짧은 편이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 굴곡이 드러나지 않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양팔에 걸친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된 점이 특이하다.

뛰어난 조각수법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층석탑(三層石塔)...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초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의 3층석탑이다.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층기단 중석의 네 모서리에 귀기둥을 표시하고, 면마다 2개의 면기둥을 새겼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여 각 면마다 3개씩 배치하였다.

하층기단 갑석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둥근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 1개씩의 돌로 되어 있고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위로 오를수록 몸돌이 알맞게 줄어들어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앙화(仰花)만 남아 장식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 면기둥의 변화, 초층 탑신받침, 옥개석 모서리의 치켜올림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복원하였으며, 현재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오백전(五百殿)...

대웅전 뒤편에 세워진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에서 6.25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당우일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막돌허튼 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둥근 기둥 위에 간단한 쇠서를 둔 익공식 건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양측 박공(朴工)에는 풍판(風板)이 없으며, 내부는 천정시설이 따로 없이 서까래만 노출되어 있다.

내부는 앞부분을 조금 남기고 좌우 벽을 연결하는 긴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 중앙에는 연꽃 좌대에 앉은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인 가섭ㆍ아난존자를 배치하였다.

좌우 후면에는 계단식탁자를 설치, 오백나한을 빽빽하게 배열하였는데 이들 아라한상은 상호가 우수하며 영험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1443년(세종 25)에 전라감사 김방이 오백나한과 십대제자의 성상을 조성ㆍ봉안하고, 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실제로 1430년에 건립된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과 가구수법 등에서 같은 계통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사찰이 소실되었다가 1609년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분의 스님이 4창(創)하였으므로,

오백전은 이때 건립된 것이거나 이전에 존재하던 법당을 이 시기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퇴락이 심하여 1971년 주지 보성스님이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2001년 재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대들보에서 1971년의

중수기와 함께 1489년(성종 20) 증심사에서 판각한 목판본 금강경이 발견되었다...

 

오백전 불단(佛壇)..

오백전에 빼곡히 봉안된 존상들로, 맨 앞줄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입상으로 협시하고 있다.

다시 그 좌우로 12위씩 전체 24위의 나한이 암석 모양의 좌대에 합장을 하거나 동물들을 희롱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전면에 배치된 이 나한들 뒤로는 13개의 단을 마련하여 소형의 나한상들을 천장 서까래까지 닿도록 배치하였다.

전면에 배치한 석가삼존상과 24위의 나한상이 나무로 조성된 반면, 뒤쪽의 소형 나한상들은 나무와 흙으로 조성된 상들이 섞여 있다.

1443년(세종 25)에 김방(金倣)이 오백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 10대 제자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존상들이 그 시기에 봉안되었던 상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은 확실하다...

 

원통전(圓通殿)..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2003년 9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상량하였다.

이 건물은 오백전 옆 언덕에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4호)이 세월의 풍화에 훼손되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으로 신축한 것이다...

 

원통전 석조보살입상(圓通殿 石造菩薩立像)..

2003년 9월까지 오백전 우측 범자7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 11월에 원통전을 보호각으로 건립하면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 여러 의견이 많으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6년 간행 <광주시사>에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는 205cm로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중·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과 2엽의 연화당초문이 혼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앙련좌는 16엽의 복판연화문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분할을 잘못하여 9엽이 되어 있다.

대좌 위의 보살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여 우아한 기품을 나타내고 있다.

얕게 새긴 삼도(三道)에는 목걸이를 장식했으며 납의(衲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굽혀서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고 오른손은 편 채로 내려뜨려 오른쪽 대퇴부 바깥쪽으로 붙이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현재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대석 직경 130cm, 상대석 직경 100cm, 대좌높이 50cm, 불신높이 150cm, 머리높이 50cm이다..

 

범종각(梵鐘閣)...

경사진 축대 위에 와벌대 기단을 두고 원형 다듬돌 초석을 놓은 뒤 배흘림기둥을 세운 1980년대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겹처마, 익공식 포작으로 다포식이며 건물의 기능상 벽면을 대신해 창살을 세웠다...

 

정면에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이 쓴 ‘범종각(梵鍾閣)’ 편액을 달았으며, 1983년에 조성된 높이 198cm의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천판 위에는 대나무 마디 모양의 용통과, 종신(鍾身)을 움켜쥐고 비상하는 듯한 모습의 용이 표현되었다..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는 당초와 연화문 대(帶)가 둘러져 있으며, 중앙에 성덕대왕신종에서 보이는 비천상을 그대로 모각하였다...

 

세로로 ‘무등산증심사범종(無等山證心寺梵鐘)’이라는 종명(鐘銘)이 양각되어 있다...

 

산신각(山神閣)

비로전 뒤 암벽에 규봉당 부도와 함께 세워진 소규모 석조전각이었으나 그 앞에 새로이 축조하였다..

 

계단을 만들어 오르도록 되어있다..

 

안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5층석탑(五層石塔)..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오백전 옆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갑석(甲石)은 파손이 심하며 4층 옥개석과 탑신은 잃어버렸다.

기단부는 지대석이 높다란 4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져 하층기단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 위에 올려진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의 합이 각 면 셋이며 옥개석 층급(層級)받침은 각 층 모두 셋이다.

초층 탑신에는 네면의 중앙에 사각형의 돌출된 구획을 만들어 그 안에 꽃무늬를 양각하였고, 2층 이상의 탑신에는 일반적 석탑과

마찬가지로 모서리에 귀기둥을 새겼는데, 크기에 비해 얇은 옥개석 아랫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모서리의 반전이 심하고 2층 이상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1933년 해체·복원할 때 탑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 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7층석탑(七層石塔)

5층석탑과 나란히 서있는 7층석탑으로,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돌로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아 기단부가 생략되었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통상적으로 조각하는 옥개받침을 생략하고 윗면의 물매가 완만하여 매우 납작하다.

각층 네면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동일한 범자를 7층에서 아래로 한자씩

새겼다. 일반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는 어색한 점이 있으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겨 희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행원당(行願堂)...

취백루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요사이다.

자연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주두(柱頭) 위의 공포는 익공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오른쪽 1칸은 벽으로 감싸고 그 외의 칸에는 마루를 놓았다...

 

적묵당(寂默堂)..

취백루에서 보아 왼쪽에 위치해 있는 팔작지붕 건물로서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현재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적묵이란 고요히 깊히 잠기어 말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증심사의 설화...

광주 시가지에서 무등산 증심사에 가려면 학동에 있는 홍림교(洪林橋)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광주사람들에게 ‘배고픈 다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근처를 ‘선거리’라고 부른다.
조선 세종때, 광주고을에 김방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시 가뭄이 잦아 고을사람들이 흉년에 시달렸는데, 김방은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어 당시로서는 큰 공사인 방죽 축조공사를 벌였다.

큰 못을 파서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고이게 하여 농사에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2년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방죽을 만들었으나 그해부터 3년간 계속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이를 괴로워한 김방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하늘을 우러러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기우제를 마친 날 밤, 김방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증심사를 중건하여 오백전을 짓고 거기에 오백나한을 봉안하라’는 분부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김방은 서둘러 오백나한을 조성하고 증심사 중건에 나섰는데 이 일에 부정을 탈까 염려하여 스스로 육식을 금하고

손수 공사현장에서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일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자 김방의 건강은 점차 나빠지고 과로로 인하여 몸은 여위어 갔다.

온 고을 사람들이 김방의 지성에 감복하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여러 집에서 매일 닭을 잡아다가 김방에게 먹기를 권하였다.

김방은 백성들의 간절한 권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닭똥집 몇점만을 먹고 나머지는 일꾼들에게 고루 먹게 하였다.

이러한 김방의 노력으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궁중에서 낮잠을 자던 세종의 꿈에 난데없이 광주에서 왔다는 수백마리의 닭들이 엎드려 아뢰기를 ‘어지신 임금이시여.

광주에 김방이라는 자가 있는데 무등산 골짜기에 수천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역적모의를 하고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닭들을 수백마리씩이나 죽이고 있으니 임금께서는 이 축생들에게도 자애를 베푸시어 김방을 잡아 죽여주옵소서.’라고 고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세종대왕은 지체없이 금부도사를 불러 3일 안으로 김방을 잡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금부도사가 이끄는 군졸들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광주에 이르러 곧바로 무등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런데 홍림교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말들의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괴한 일에 당황한 군졸들이 말에서 내리려 하였으나 말등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 닭들의 꿈을 꾼 세종은 이상하게 여기며 그날 밤 침상에 들었는데, 어렴풋이 잠이 든 순간 어린 사미승 수백명이 꿈에 나타나

‘대왕께 아뢰옵니다. 어찌 영민하신 대왕께서 미미한 닭들의 참소를 들으시나이까. 김방이 매일 닭의 내장을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방은 일찌기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중수하고 광주에 방죽을 만들었으며, 다시 힘을 모아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는 갸륵한 뜻에서 하는 일이오니 굽어살피시어 금부도사를 곧 거두도록 분부하소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아뢰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은 곧 명을 내려 금부도사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금부도사 일행이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을 때 멀리서

어명이 거두어졌음을 전하고 회군을 명령하자 비로소 말과 사람이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이 관군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선채로 이틀 밤낮이나 꼬박 지샜으므로 이 거리를 관군이 서 있었던 거리라 하여

‘선관이’ 또는 ‘선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홍림교를 배고픈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아마도 이 관군들이 이틀 밤낮동안

굶주리고 배고픔에 시달렸기 때문에 '배고픈다리'라고 부르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