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철제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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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기행]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철제여래좌상..

by 정산 돌구름 2012. 12. 24.
[남원기행]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철제여래좌상..

 

탐방일 : 2012년 12월 23일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통일신라 흥덕왕3년(828년)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은 신라 혜공왕 때 처음 전래되었지만 발전을 못하다 도의(道義)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

  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숙종26년(1700년)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 36동의 웅장한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무생전, 십불전, 오백전, 장육전, 원통전, 미타전, 적묵전, 미륵전, 명부전, 만화당, 현묘당, 청심당, 보응당,

  자운당, 탐진당, 정성당, 금당, 향로각, 대동고, 환재각, 종각, 향적소, 만세루, 능허각, 불이문, 천왕문, 해탈문, 조계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전각과 누각이 고종20년(1883년) 스님들을 몰아내고 실상사의 너른 땅을 차지하려 했던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인해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이 남았다.

  그때 불탄 대적광전은 단층 건물로는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부르던 건물이었다 한다.

  웅장했던 실상사 규모를 보여주는 한 예로서 목탑지를 들 수 있다.

  실상사 목탑지는 천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의 9층탑지보다 조금 작았던 듯하다.

  건물지의 위치와 심초석이 안치된 방법, 자연석인 초석 등을 종합해보면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장육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실상사에는 보광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칠성각, 종각, 천왕문, 화엄학림 학사와 강당, 요사채, 해우소 등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석등

  (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 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상원주장군 석장승(민속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9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천왕문(天王門)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동방에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에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했다...

 

지국천은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동방천왕으로 국토를 수호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개 몸에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드물게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

다문천은 수미산의 북쪽을 지키는 북방천왕으로 항상 부처님의 도량(道場)을 수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재보신(財寶神)인 구베라(kuvera)에서 유래된 신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보통 갑옷을 입은 채 오른손에는 창·막대기·보서(寶鼠)를 가지고 있으나 왼손에는 항상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증장천은 수미산의 남쪽을 지키는 남방천왕으로 구반다(鳩槃茶) 등 여러 귀신을 지배하고 항상 중생의 이익을 증진시켜 준다.

그 형상은 갑옷을 입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둔 반면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목천은 수미산의 서쪽을 지키는 서방천왕으로 항상 깨끗한 눈을 가지고 중생을 살펴서 이익되게 해주는 신(神)이다.

원래 3개의 눈을 가진 힌두교의 시바(Siva) 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고 넓은 눈 또는 진기한 눈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갑옷을 입고 새끼줄(絹索)과 삼차극(三叉戟)을 가지고 있다..

 

옛기와탑(古瓦塔)..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깊은 사찰인 실상사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쌓아 놓은 것이다.

실상사가 창건된 당시의 모습과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무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조선시대 기와들을 모아 이 탑을 만들었다... 

 

범종각(梵鐘閣)..

정면과 측면 각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1991년에 건립한 것이다.

종각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지리산실상사호국범종(智異山實相寺護國梵鐘)’이 걸려 있다.

1967년 실상사에서 파손된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을 발견하였는데, 현재 범종각이 서 있는 자리가 그곳이다.

파손된 통일신라 범종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범종각에 봉안된 범종은 이 종을 모델로 하여 새로 조성한 것이다..

 

보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3층석탑..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두 탑의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높이는 8.4m이다.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의 정형을 보이며, 각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면의 받침은 4단이며, 살짝 위로 들려진 네 귀퉁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실상사 석등..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으로 높이가 5m나 된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 모양 조각을 얹었으며,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 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보광전(寶光殿)...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종21년(1884년)에 월송(月松)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 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보광전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의 금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광전 아미타삼존상...

 

삼존상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좌우의 관음ㆍ대세지 두 보살입상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紙佛)로 보살상 1구가 과거 분실되어 남은 1구를 대칭적으로 복원하여 모신 것이다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ㆍ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鍾)..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조선시대 범종이다.

용뉴에는 여의주가 없는 용이 종천판(鍾天板)을 딛고 있는 형상이며, 용통은 간략화된 용의 꼬리가 휘감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대(上帶)와 천판(天板) 사이의 입화식(立花飾) 및 하대문양(下帶紋樣)이 없어지고, 상대문양을 범자문(梵字文)으로 대치하여

간략화 되었으나, 용통의 존재는 한국종의 전통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에는 종신(鍾身)보다 한단 높게 원형 단을 만들고, 그 안에 한 자씩 범문을 12곳에 양각하였다.

이 범문자대(梵文子帶)의 아래 4곳에 유곽(乳廓)이 있으며, 방형 유곽의 테두리에는 인동초문을 양각하였다.

유두는 8옆의 중판연화판으로 받치게 하였으며, 유곽 사이의 공간에는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조성연대는 종기(鍾記)에 ‘강희(康熙) 33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1694년(숙종 20)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ㆍ정칠립ㆍ김천수ㆍ김선봉 등인데, 이 기록으로 보아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온다.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종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이 전해 돌았다. 이러한 소문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고 종을 울리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명부전(冥府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을 1821년(순조21)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시왕상ㆍ판관상ㆍ인왕상의 명부 권속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전.. 현재는 복원 해체되어 가건물이 서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3년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았던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에는 가늘고 기교를 부려서 전서(篆書)로 쓴 ‘약사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특히 중앙의 꽃문살은 부분적으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채색이 아직도 아름다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내부에는 창건 당시인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철제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이 있다..

 

1882년 월송(月松) 스님이 화주를 하여 조성한 약사후불탱..

 

 1988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七星閣)..

정면과 측면 각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32년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의 글씨로 ‘칠성각’ 편액을 달았으며, 내부에는 1981년에 조성한 칠성탱을 봉안하였다.. 

 

극락전으로 가는 길목의 요사들..

 

 

 

극락전(極樂殿)...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684년(숙종 10년) 계오대사(戒悟大師)에 의해 부도전으로 지은 것이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錦波寬旿大師)가 중수하였고 이후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奇峰)ㆍ처윤(處允)

스님과 함께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

 

극락전 옆의 요사..

 

보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증각대사응료탑비(證覺大師凝蓼塔碑)...

 

이 탑비는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라는 비 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뒤편의 탑..

 

현재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증각대사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

 

실상사의 개창조인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가 증각(證覺)이고, 부도 이름이 응료(應蓼)여서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린다.

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아 기단(基壇)을 조성한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위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낮은 편이며,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으며,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2.42m이다..

 

보물 제33호로 지정된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높이 3m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실상사의 제2대 조사인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다.

신라 진성여왕 7년(893)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8각 원당을 기본형으로 한 전형적인 묘탑으로 사각 지대석이 지면에 놓이고 그 위에 하대석은 8각으로 3단을 이루었다.

중대석에는 각 우각에 주형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석은 상하 2단인데 하단은 앙련석이고 상단은 특히 높은 탑신 받침이다...

 

탑신은 낮은 편으로 우주형이 모각된 상면에는 목조건축의 첨차를 조각하였다.

신부 각면에는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四天王) 입상이 각각 양각되었는데 특히 문비형은 상부가 반원형을 이룬 점이 특이하다...

 

옥개석(屋蓋石)은 추녀 밑의 반곡(反曲)이 심하고 옥상에는 기와골이 있으나 귀꽃은 없다.

상륜(相輪)은 옥개 정상에 꽃무늬가 조각된 편구형(扁球形) 이륜(二輪)을 얹고 그 위에 보주(寶珠)를 놓았다....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實相寺 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

수철화상(秀澈和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의 건립연대는 효공왕(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전체 높이는 약 3m이며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당시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는 전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실상사 부도전...

실상사의 대표적인 부도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ㆍ증각대사응료탑ㆍ실상사부도 등인데, 이 외에도 많은 스님들의 부도가 흩어져 있다..

실상사에서 약수암으로 가는 길목 옛 조계암 터에는 편운화상탑(片雲和尙塔)ㆍ청련사사리탑(靑蓮士舍利塔)ㆍ용운화상탑(龍雲和尙塔)

등 4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편운화상부도(片雲和尙浮屠)..
구름과 용이 조각된 원형의 하대에 주발을 올려놓은 듯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신 정면에는 ‘창조홍척제자안봉창조편운화상부도(創祖洪陟弟子安峰創祖片雲和尙浮圖)’와 그 아래에 ‘정개십년경오세건

(正開十年庚午歲建)’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라는 연호가 어느 시기의 연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편운화상이 홍척국사의 제자이고, 수철화상과 같은 시대 인물인 것으로

미루어 그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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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목조 건축물..

 

천왕문..

 

해탈교 가설공덕비..

 

석장승(石長生)..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의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초입에는 해탈교를 전후하여 모두 3기의 장승이 서 있다.

해탈교를 건너기 직전에 석장승 하나가 있고, 원래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다하나 1963년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장승의 몸통에는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리고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온 두 눈에 주먹만한 코는 벌름거리는 듯하며,

입술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길게 八자형으로 튀어 나와 매우 해학적인 모습이다..

 

해탈교 건너에 있는 석장승은 2기인데, 하나는 해탈교 건너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나무 밑에 있는 석장승은 몸통에 ‘대장군(大將軍)’이라는 글씨와 받침돌에 ‘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雍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각자가 있어 1725년(영조 1)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주보고 있는 장승 역시 몸통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이름과 ‘신해년오월(辛亥年五月)’이라는 각자가 있어

1731년(영조 7)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를 하고 있다.

위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실상사 해탈교..

 

실상사 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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